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13) 한·영 해병대 합동훈련
1969년 3월 말경이었다. 한국 해병대와 영국 해병대는 헬리콥터에 의한 사상(史上) 최초의 합동 수직상륙훈련(垂直上陸訓練)을 실시했다.
훈련 일정이 1박 2일로 책정이 된 그 합동 수직상륙훈련에는 한·영 각 1개 대대의 병력으로 편성된 2개 대대의 혼성 상륙군(上陸軍) 병력과 1척의 헬리콥터 항공모함(영국 극동함대 소속 알비온호), 그리고 그 알비온(ALB10N)호를 호위하는 1척의 영국 극동함대소속 구축함과 유조선 및 1척의 한국 해군 구축함이 참가했는데, 그 합동훈련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즉 그 날 인천항에서 알비온호에 탑승하게 된 김포 여단에서 차출된 1개 대대의 한국 해병 상륙군부대는 그 알비온호에 탑승해 있던 1개 대대의 영국 해병 기동부대와 합류하여 목적지인 진해만(鎭海灣)까지 항진해 가는 동안 주야간에 걸쳐 짜여진 빈틈없는 훈련계획에 따라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훈련과 신속하게 내리는 훈련, 비행을 했다가 함상에 착륙한 헬기로부터 신속하게 내려서 산개하는 훈련, 그 밖에 항진 중인 두 척의 구축함에서 통신연락병을 교환하는 위험한 훈련과 유조선의 급유훈련도 실시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진해만에 도착한 후에는 해병대의 발상지(發祥地)인 덕산비행장(德山飛行場)에 수직상륙을 감행하여 그 비행장을 점령한 다음 비행장 뒷산으로 진출하여 해안두보(海岸頭堡)를 확보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결짓게 되어 있었는데, 최종일에 실시된 그 수직상륙훈련에는 혼성된 상륙부대가 공포탄을 쓰며 수직상륙을 했고, 또 박격포와 화염방사기 등이 동원되어 실전을 방불케 했다.
그 날 그 비행장 일각에 설치되어 있던 훈련 관망대에는 해군참모총장 장지수(張志洙) 제독을 위시한 몇몇 해군·해병대의 장성들과 주한 유엔군사령부 소속 장성들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는데, 그 최종 훈련이 시작되기 전 그 항공모함 함장의 전용 헬기를 타고 비행장에 내렸던 나와 함께 그 훈련을 관망했던 그 모든 인사들은 이구 동성 멋진 훈련이었다면서 감탄을 했다.
한편 인천항에서 1개 대대의 우리 해병대 병력이 알비온호에 탑승할 때 그들과 함께 그 항모에 탑승했던 나는, 그 합동훈련을 총지휘 한 영국 극동함대 부사령관 그리핀(Gripin) 중장의 배려로 알비온호에 있는 극동함대사령관의 침실에서 기거하며 최종일의 수직상륙훈련 직전까지 그리핀 중장과 함께 시종 그 모든 훈련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또 최종일의 수직상륙훈련 시에는 그 비행장 관망대에서 그 수직상륙훈련과 해안두보 점령과정을 끝까지 지켜 본 다음 그 관망대의 인사들로부터 그러한 찬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훈련이 종료된 후 나는 4월 4일에 사령부를 방문한 트렌치(Trench) 주한 영국 대사와 4월 9일에 사령부를 방문했던 그리핀 중장, 그리고 5월 12일에 사령부를 방문했던 홍콩 주둔 영국 극동군사령관 어그스터(Eugster) 중장과 그 합동훈련의 성과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상호간의 우의를 돈독히 했다.
6·25전쟁 때 미국과 함께 유엔군의 주축(主軸)이 되었던 영국은 홍콩에 기지를 둔 극동함대와 2개 여단의 보병부대(1개 여단은 본토로부터 파한) 및 1개 중대의 해병특공대를 파견한 바 있었지만 휴전 후에 있어서는 미국처럼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한국군과 영국군 간의 합동훈련은 한 번도 실시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관례를 깨고 그와 같은 합동훈련이 실시될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었다. 즉 그러한 훈련 구상을 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러한 구상을 하게 된 시기는 1964년 6월 내가 박 대통령의 특명으로 이스라엘과 월남을 방문하기 위해 동경(東京)을 거쳐 홍콩에 기착하여 극동군사령관의 오찬 초대를 받았던 바로 그 날이었다.
물론 그 날 나 자신의 신분으로서는 그러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할 처지가 못 되었지만 다만 개인적인 희망사항으로 언젠가 영국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가 합동상륙훈련을 실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극동군 사령관에게 피력한 바 있었는데, 결국 나의 그러한 제의가 영국 군부의 관심을 촉발시켜 내가 해병대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나 자신이 수차 영국 대사(大使)를 만나 협의를 거듭했고, 또 관련부서의 참모들을 주한 영국 대사관으로 보내어 영국 무관(武官)들과 접촉을 하게 하는 등 꾸준한 노력으로 이어진 끝에 내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지 꼭 2년 9개월 만에 그와 같은 합동훈련이 실시된 것이었으니 그 배경을 따지자면 무려 5년이란 세월이 지난 끝에 실시된 최초의 한·영 양국 해병대의 합동 수직상륙훈련이었고, 또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실시된 적이 없는 합동훈련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뜻을 지니고 있는 그 훈련이 성공적으로 종료된 후 나는 국방장관과 박 대통령에게 그 결과를 보고 했는데, 그때 나는 4월 9일 그리핀 중장이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나와 박 대통령에게 제공하기 위해 가지고 온 그리핀 중장 자신의 사인이 담긴 두 장의 항모 알비온호의 사진 가운데 한 장을 박 대통령에게 드리면서 그 훈련과 관련된 소상한 보고를 드렸다.
다음은 해병대의 전력배양과 관련된 사항이다. 해병대의 전투역량 배양을 위한 노력은 행정 및 군수 보급 등의 지원체제가 꾸준히 개선되고 향상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갔다.
사령부를 중심으로 그 예하에 있는 모든 부대가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국토방위와 월남전의 수행을 위해 배양해 나갔던 그 전력은 특히 해병대에 의해 수행되고 있던 김포·강화 지구의 수도권 방위와 백령도 등 서해 최북단의 주요 도서방위 등 국토방위의 사명을 더 한층 자신감있게 수행하는 역량으로 축적이 되었고, 또한 월남전선에서 거두어지고 있던 청룡부대 장병들의 고무적인 전적(戰積)으로 실증되고 있었다.
그리고 청룡부대의 월남 파병기간 중에도 해병대의 기본임무인 상륙작전 전투능력 향상을 위한 상륙전훈련은 계속 실시되었다. 나의 사령관 재임기간 중(1966.7~1969.7)에 실시했던 상륙전훈련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1967년 : 해풍작전, 상어작전, 빙원작전, 백구작전, 해표작전, 거우작전
1968년 : 은파작전, 하마작전, 백룡작전, 흑룡작전
1969년 : 돌풍 2호 작전, 철새작전, 청파작전, 영국 해병대와의 합동수직(垂直) 상륙훈련
한편, 나의 사령관 재임기간 중 해병대에서는 장비의 현대화계획에 따라 1967년에는 155밀리포, 1968년에는 OH-23G 정찰용 헬리콥터, 1969년에는 M16소총을 도입했으며(주월 청룡부대에 Ml6이 지급된 것은 1967년 4월 하순경이었다) 이 밖에도 개량된 야전지휘소용 통신장비와 해병대 항공대의 다인승(多人乘) 경비행기 등 각종 신형장비를 도입함으로써 전력(戰力)의 증강을 도모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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