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12) 태국 방문과 2차 방월
1969년 1월 1일부로 대장으로 승진을 했던 나는 그 해 2월 중순경태국 장부와 월남 정부의 초청을 받고 약 2주간의 일정으로 이들 두 나라를 차례로 방문했다. 그 시찰여행에는 여단장 이병문(李丙文)준장과 부관 여현수(呂賢秀)중령이 동행을 했다.
2월 15일에 김포공항을 떠났던 일행은 동경에서 2박을 한 다음 17일 태국에 도착했는데 그 날 방콕 공항에는 태국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한 몇 몇 군부 요인들이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고, 태국 해군의장대를 시찰한 후 영빈관으로 안내되어 여장을 푼 나는 그 날 저녁에는 해군참모총장이 베푼 환영 만찬회에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부터 수일간 나는 태국 해군본부와 태국군총사령부를 방문한 데 이어 각 지역에 있는 주요 군사시설을 시찰했고, 또 한표욱 태국 주재 한국 대사의 안내로 태국 수상과 국왕(國王)을 차례로 예방했는데, 특히 나에게 태국의 일등십자대기사훈장(一等十字大騎士勳章)을 수여한 타남 키티 쿠호른(Thanam Kitti Kouhorn) 태국 수상은 주월 청룡부대의 용맹성을 극구 찬양한 반면 월남전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서도 여러가지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의 처지를 "호랑이의 꼬리를 잡고 그것을 당기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고 있는 그와 같은 형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밤위불 아불 야디즈 태국 국왕은 한국의 눈부신 발전상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한·태 양국의 전통적인 우의가 더욱 돈독해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또한 태국 수상과 국왕은 한·태 양국 청소년단의 교환방문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청소년단의 상호 교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에게 표명했던 것은 1964년 내가 태국을 방문했을 때 태국 청소년단을 방문하여 사열도 받고 현황 청취와 시찰을 하는 등 내 자신이 깊은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인연의 매체로 나는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한두 차례 태국 청소년단관계 인사들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편 23일까지 태국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24일에는 태국 방문을 마치고 월남으로 떠났다. 그 날 낮 사이공 탄손누드 공항에 도착했던 나는 월남 해병대사령관 캉(Kahng) 중장과 사이공 주재 한국공사, 채명신(蔡命新) 주월 한국군사령관의 영접을 받는 가운데 월남 해병대의 의장대를 사열한 다음 영빈관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주월 한국군사령관이 베푼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던 나는 그 다음 날인 25일과 26일 양일간 많은 군 기관을 방문했다.
즉 25일에는 월남 해군본부를 방문한 데 이어 신상철(申尙撤) 대사와 채명신 사령관의 안내로 월남군 총사령부를 방문하여 총사령관 비엔(Vien) 대장과 요담을 했고, 또한 그 날 오후 월남 정부청사로 후옹(Huong) 수상을 예방한 데 이어 독립궁(獨立宮)으로 티우 대통령과 키 부통령을 예방하여 요담을 했던 나는 김용휴(金容烋) 주월 한국군 부사령관의 안내로 청룡부대를 방문하여 이동호(李東湖) 여단장의 안내로 여단 의장대를 사열하고 상황 청취와 노획무기 전시장을 관람한 다음 청룡부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방문 2일째인 26일에는 미 해병대의 제3상륙군사령부로 쿠쉬맨(Cushman) 중장을 예방한 데 이어 월남군 제1군단장 람(Lam) 중장을 예방했고, 또 1차 방월 시에 방문하지 못했던 맹호부대(尹必歸 소장)와 백마부대(李召東 소장)를 차례로 방문하여 부대현황을 청취하고 사단장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 체재일인 27일에는 해군 백구부대(白鷗部隊)와 주월 미군사령부를 방문했는데, 백구부대에선 장병들의 사명감을 고무하는 훈시를 하고 주월 미군사령부에서는 에이브람스 대장과 요담을 했다. 전임 사령관이었던 웨스트 모랜드 대장은 그 때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전보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2차로 월남을 방문했을 때는 그 전 해인 1968년 5월 3일 월남전을 평화적으로 종결시키기 위한 참전 당사국(미국과 월맹)간의 회담이 개시된 후 막후협상이 부단히 진행되어 1968년 6월 월맹은 베트콩으로 하여금 사이공에 대한 위협적인 로켓포 공격을 중지하도록 한 데 이어 그 해 10월 중순경에는 월남에 투입되어 있던 7개 사단의 월맹군을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국경지대로 철수시키는 가운데 존슨 대통령이 제의한 일괄협상안을 심의하기 위해 월남 정부와 민족해방전선기구 대표를 회담에 가담시키자는 미국측의 제의를 수락함으로써 협상을 그들의 유리한 방향으로 진전시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내가 2차로 방문했던 그 시기는 월남의 국내정정(政情)과 군사정세가 1967년도에 방문했던 그 1차 방문 시의 상황과 비교해서 매우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는 시기였다.
그리고 월남의 정치 및 군사정세에 밝은 웨스트 모랜드 전 주월 미군사령관이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이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주월 미군의 철수에 대비한 미국 정부의 정책적인 인사조처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한국 정부로서도 그 때 이미 미국 정부와 그러한 문제와 관련된 협상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또 나 자신도 박대통령에게 직접 그러한 문제에 대한 건의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4일간의 월남 방문을 마치고 탄손누드 공항을 떠날 때 월남해병대의 의장대와 군악대가 동원되어 있는 그 공항에는 월남 해병대사령관 캉 중장과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 신상철 대사 및 이동호 청룡부대장 등 많은 환송인사들이 나와 나를 배웅해 주었는데, 나에게 있어서는 그 때 그 이별이 자유월남공화국(自由越南共和國)과의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다.
한편 귀국길에 재차 동경에 기착했던 나는 우정 틈을 내어 일본 자위대(自衛隊)간부와 비공식적인 면담을 했고, 또 구 일본군 장성출신의 자위대 자문위원 몇 사람과 만나 동복아 정세에 대한 의견교환도 했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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