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9)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이었다. 서울시 서대문구 세검동(洗劒洞)에 있는 자하문(紫需門)밖에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잠입한 국군장교들로 위장한 31명의 북한 무장간첩(武裝間諜)이 출현하여 긴급 출동한 경찰관들과 교전을 벌이는 바람에 서울 시민들을 전전긍긍케 했었다. 그 날 밤 아군 토벌대(군경)는 5명의 간첩을 사살하고 1명(金新朝)을 생포한 반면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총경을 비롯한 수명의 경찰관과 민간인이 피살되고 4명의 경찰관과 민간인이 부상을 입었다.
그들에 대한 소탕전은 1월 말경까지 계속 되었고, 그 결과 기적적으로 월북한 단 1명을 제외하곤 전원 사살되었다.
다음 얘기는 그 때 내가 겪었던 얘기와 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에 대한 심문과 그를 전향(轉向)시키기 위해 취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조처와 관련된 얘기들이다.
1·21사태가 발생했던 그 날 밤 나는 국방부에서 소집한 각 군 총장들의 긴급 대책회의에 참석한 데 이어 그 다음 날 아침에는 합참(合參)에서 소집한 대책회의에 참석한 다음 각 군 총장들과 함께 생포된 간첩이 수감되어 있는 곳으로 가서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콘크리트 바닥에 끓어 앉아 있는 그 김신조란 자를 심문하는 현장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자의 얼굴에 얼마나 무서운 독기(毒氣)가 서려 있었던지 도무지 사람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떤 임무를 띠고 내려왔는지 말해 봐!"
심문관이 이렇게 묻자 그는 원색적인 우녁 말씨로 "내래 남조선 괴뢰정권의 괴수(魁首) 박정희를 까부시러 왔어 !"하고 거침없이 대꾸했다. 한마디로 소름이 끼치는 언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밖에도 대한민국을 매도(罵倒)하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악랄한 말을 그는 마구 내뱉고 있었다.
그 자의 그런 말을 말없이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공산당에 의해 얼마나 철저히 세뇌를 당하고, 얼마나 철저한 특수훈련을 받았기에 저런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청와대에서는 국방장관을 위시하여 합참의장, 각 군 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등 군 수뇌부가 합석 한 대책회의를 가졌는데, 그 때 김신조에 대한 심문 결과를 보고 받으면서 저런 자를 감화(感化)시키거나 전향시키려면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 같다는 말을 들은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이러한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즉 수사관의 미행(尾行)과 보호를 받게 하는 가운데 당분간 그 자를 서울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김신조는 남한사회에 대한 불신감(不信感)이 얼마나 철저했던지 거리에서 양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모두 일본인(日本人)이라고 단정을 하는가 하면, 미도파(美都波)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갖가지 국산품들을 눈여겨 보더니만 우리나라 상표가 또렷하게 붙어 있는 그 상품들을 상표를 위장한 일제(日製)나 미제(美製)상품이라며 조소(嘲笑)를 했고, 또 상냥한 한 점원(店員) 아가씨가 한두 가지 국산 일용품을 포장지에 싸서 선물로 주려고 하자 그는 "내래 그 따위 일제 물품 받지 않갔어!"하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중앙시장(中央市場)안을 둘러보던 중 싸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쌀을 목격했을 때는 얼마나 그 쌀에 한이 맺혀 있었던지 두 손을 그 쌀무더기 속에 푹 집어 넣었다가 잽싸게 때내고선 놀란 듯이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미행 수사관으로부터 보고된 그와 같은 말을 전해들은 나는 언필칭 노동자와 인민의 천국(天國)이라며 기회있을 때마다 떠들어대고 있던 그 북한사회에서 그가 얼마나 쌀밥 구경을 해 보지 못했고, 또 얼마나 자유를 구속당한 채 살아 왔었던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었다.
그 후 김신조는 남한 사회의 실상(實相)을 피부로 느끼는 한편 남한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그 인간적인 자유가 어떠한 것인가를 깊이 깨우치게 된 나머지 마침내 사상적인 전향을 하여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는 그의 이름 그대로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 새로운 인생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 때가 꼭 27년 전의 일이다.
새삼스럽게 회고해 보는 일이지만 1·21사태는 31명의 무장간첩들이 휴전선과 아군의 전방 방어지역을 유유히 통과하여 청와대 앞까지 침투해 옴으로써 우리 국민에게 충격적인 놀라움을 안겨 주었고, 또 김신조의 자백으로 900명의 283군부대(일반간첩공작대)요원들과 20대(代)의 장교들로 편성된 특수유격훈련을 받은 8개 대대(1개 대대 300명)의 124군부대 요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 국민들에게 무서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는데, 불행하게도 그러한 경각심은 북한의 변함없는 대남(對南) 적화전략과 위협적인 핵무기의 개발 등으로 인해 27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발에 이르기까지 늦추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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