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8) 향토예비군
1964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돌아왔던 나는 내가 이스라엘의 군사현황 시찰과정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예비군 제도(制度)를 포함한 군사현황을 소개하기 위한 작은 책자를 한 권 펴내어 각 군 부대와 정부 각 부처 및 그 산하의 여러 기관과 새마을운동본부 등 여러 민간단체에 배부한 바 있었다.
「이스라엘의 軍事現況」이란 표제가 붙은 그 책자(4.6배판 80면)에는
1.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
2.이스라엘의 지리적 조건
3. 이스라엘의 국가기구
4. 군사(軍事)
가. 방위군의 발전과정
나.방위군의 임무 및 편성
다. 방위군의 활동
5. 기타
가. 중동지역의 일반정세
나. 아랍과의 하천분규
6. 결론
등의 목차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내가 그러한 일을 추진했던 것은 감탄할 만큼 조직이 잘 되어 있고, 또 잘 운용이 되고 있는 그 이스라엘의 예비군 제도를 본받아 우리 대한민국에도 우리나라의 실정에 알맞는 예비군 제도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나 자신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대남(對南) 적화야욕(赤化野慾)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북한은 휴전 후에도 정전협정(停戰協定)을 서슴없이 위반하는 가운데 호시탐탐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1958년 2월 16일에는 국민항공기의 납북사건을 일으켜 온 국민을 격분시켰었다.
그리고 1962년 12월 27일에는 연평도(延坪島) 근해에서 아 해군함정에 발포를 했고, 또 1963년 5월 17일에는 미군 OH헬기의 피격(추락)사건, 1964년 1월 14일에는 공군 F86기의 피격(추락)사건이 발생하는 등 그 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여러 건의 도발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며, 또 그러한 도발행위를 자행하는 가운데 어느 시기에 재침을 해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북한의 그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도 향토를 방위할 예비군을 창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나는 박 대통령과 김성은 장관에게 그러한 뜻을 개진하여 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1966년 7월 내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에는 국방장관에게 이스라엘의 군사현황과 예비군 제도를 연구하기 위한 각 군 장교들로 구성된 견학단의 파견을 건의하는 한편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을 방문하여 그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그리하여 국방부에서는 그 계획을 구체화시켜 1966년 2차에 걸친 국군장교단의 이스라엘 파견을 실현했는데, 그 때 이스라엘 정부와의 사전협의에 따라 국방부에서는 국방부와 합참, 육·해·공군 및 해병대로부터 차출된 파견장교단에 대한 왕복 여비만 부담하고 숙소 등 현지에 도착한 후의 일체의 경비와 교통편의의 제공 등은 이스라엘 정부가 부담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주관부처인 국방부에서는 본격적인 계획안의 작성에 착수한 끝에 나의 사령관 임기 중인 1968년 4월 1일 마침내 그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그 역사적인 향토예비군 창설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참석하여 향토예비군의 사명감을 고무하는 유시를 했었다.
북한이 기도하고 있는 무장공비의 침투공작과 유격활동에 대처하기 위한 향토방위체제(鄕土防衛體制)의 확립과 자주국방의식(自主國防意識) 배양, 유사시(有事時)의 부대 보충과 동원 등을 위해 창설했던 그 향토예비군은 그간 국가비상사태(國家非常事態)에 대비한 동원체제를 확실하게 확립하는 가운데 무장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침투했을 때 매우 긍정적인 역할과 기여를 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4년 6월 내가 이스라엘을 다녀온 후에도 북한의 도발은 계속되어 1965년 5월 18일 발생했던 육군항공기 피격(추락)사건을 비롯하여 우리 해군 PCC 56함의 피격(침몰)사건(1967.1.19), 간첩 이수근(李穗根)의 위장 탈출사건(1967.3.22), 무장간첩단의 청와대 습격사건(1968.1.21), 미 해군 푸에블로호의 피납사건(1968.1.23)등 여러 건의 도발사건이 발생했고, 또 1968년 4월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후에도 울진(蔚珍)·삼척(三陟) 무장공비 대량 침투사건(1968.11.5)을 비롯해서 판문점(板門店) 미군 헌병 집단구타사건(1970.10.12), 대한항공기 남북미수사건(1971.1.23), 판문점 미군 경비병 집단폭행사건(1974.3.5), 판문점 미류나무 도끼 만행사건(1976.8.18) 등 수많은 도발사건이 저들에 의해 자행이 되었고, 또 그 후 수차에 걸쳐 발견이 되었던 그 남침용(南侵用) 땅굴은 우리 국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지 올해로써 꼭 27주년을 맞게 되며, 27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대남 적화전략(赤化戰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뿐더러 특히 몇 해 전부터서는 중·장거리 유도탄과 핵개발(核開發)을 통한 위협을 가중시킴으로써 한반도와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의 향토예비군은 앞으로도 더욱 잘 운용되어 나가야 할 것으로 믿는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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