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5) 6일 전쟁과 나의 예언
나의 사령관 재임기간 중인 1967년 6월 5일 중동지역에서는 충격적인 전쟁이 발발하여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해졌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터질 것 같던 전쟁이 마침내 터졌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필시 이 전쟁은 이스라엘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장이 날 것이고 또, 그 일방적인 승리는 불과 며칠 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전망을 했다.
그 이유는 1948년 5월에 일어났던 제1차 중동 전쟁 때의 경우는 비록 이스라엘군이 공격을 받은 입장이었으나 개전 25일 만에 이스라엘군이 승전을 장식했고, 1956년 10월에 발생했던 수에즈 운하 전쟁때는 물론 영․불(英佛) 양국군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했지마는 개전 11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석권했던 이스라엘군의 그 전격적인 전쟁수행능력을 익히 평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아랍권 간에 벌어진 그 3차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핵심적인 원인이 그 해 5월 22일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아카바만(灣)을 봉쇄함으로써 그 때까지 무역을 통해 연간 13억 불(弗)을 벌어들이고 있던 이스라엘의 경제적(經濟的)인 생명선(生命線)을 절단한 데 있었으므로 이스라엘로서는 필사적이고 결사적인 군사행동으로 그 위기를 돌파하지 않을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는 만약에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고 한다면 전쟁은 불과 며칠 안으로 결판이 날것이란 생각을 했다. 내가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그 1․ 2차 중동전을 통해 입증된 이스라엘군의 전쟁수행능력과 1964년 6월 내가 이스라엘 시찰여행을 통해 직접 목격했던 그 막강한 군비와 예비군 제도를 포함한 빈틈없는 국가동원체제 및 내가 만나본 그 군부 지도자들의 뛰어난 전략과 탁월한 지휘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쟁 발발 4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 날 오후 나는 미국 본토로부터 사령부를 방문한 미국 본토 방위총사령관을 비롯한 2명의 미 육군 고위장성(대장과 중장)과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화제를 중동전으로 전환시킨 그 미군 장성들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휴전을 결의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제너랄 강은 중동전을 어떻게 전망을 하느냐."고 하기에 나는 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휴전을 결의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앞으로 한 이틀이면 이스라엘군이 골란고원과 시나이반도를 점령하고 말 텐데···"하고 대꾸를 했더니 그들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했는데 그로부터 수일 후, 그러니까 내가 예언했던 대로 그 전쟁이 6일로써 끝난 뒤 나는, 특별한 방문 목적도 없이 나를 방문한 주한 이스라엘 대사가 "제너럴강이 수일 전 그런 말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하기에 그렇다고 대꾸를 했더니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사실이었군요."라고 했다.
그 날 이스라엘 대사가 나를 찾아오게 된 연유는 수일 전 사령부를 방문했던 그 2명의 미군 장성이 바로 그 날 유엔군사령부로 본스틸 대장을 방문하여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 날 내가 했던 그 말이 화제가 되는 바람에 그러한 얘기를 가까이에서 전해들은 한 이스라엘계 미군 장교가 주한 이스라엘 대사에게 귀뜸해 줌으로써 내가 그러한 말을 한 것으로 알고 있던 그 이스라엘 대사가 그로부터 이틀 후 과연 이스라엘군이 내가 예언했던 대로 놀라운 승전을 거두자 어쩌면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전망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그러한 말을 했는지를 나로부터 직접 확인해보려고 했던 것이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 나를 찾아왔던 그 주한 이스라엘 대사의 말에 따르면 내가 한 그 말을 본국 정부에까지 보고를 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6일 만에 끝난 그 3차 중동 전쟁은 다음과 같은 상황전개를 통해 종식이 되었었다.
즉 6월 5일 오전 7시 30분을 기해 약 300대의 공군기로 기습적인 선제공격(先制攻擊)을 감행하여 1차적으로 아랍군측의 전투주력인 공군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제공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던 이스라엘군은 전격적인 지·공(地空)합동작전으로 개전 4일 이내에 주전선(主戰線)인 시나이반도를 비롯한 골란고원과 요르단강 서안(西岸)일대 및 가자지구와 아카바만 봉쇄지인 티탄해협의 요새 샤름·엘․세이크항 등을 석권하고 말았으니 실로 놀라운 승전보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아랍권 10개국(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쿠웨이트, 알제리, 수단, 예멘,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군대에 비해 월등하게 열세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서도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 발발 후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미·소 양국의 휴전결의안(休戰決議案)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승인한 날짜는 6일(현지 시간) 밤이었으나 전쟁 당사국들이 그것을 이행하지 않자 그 다음 날 2차 결의안을 통과시킨 끝에 개전 7일째인 11일에 이르러 가까스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세상사람들은 6월 5일에 발발하여 6월 10일까지 계속된 그 3차 중동 전쟁을 「6일 전쟁」이라 일컫고 있다.
이 밖에 덧붙여 둘 얘기가 있다.
즉 그것은 6일 전쟁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1969년 연말경, 그러니까 내가 예편(豫編)했던 바로 그 해 세모(歲暮)에 신임 주한 이스라엘 대사가 그 당시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나의 집을 방문하여 이스라엘 국방성(國防省)에서 제작한 이스라엘군의 6일 전쟁 상황도(狀況圖) 한 권을 나에게 전해 주었던 일인데, 이스라엘군 총사령부로부터 나에게로 보내 왔던 그 상황도를 면밀히 검토해 보는 가운데 나는 그 6일 전쟁의 전략(戰略)을 소상하게 연구해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도를 전달해 주면서 대외비(對外秘)로 해 달라고 한 그 신임대사의 요청이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공개(公開)하는 일이 없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 간에 일어난 중동 전쟁은 뒤에 가서 언급이 되겠지만 그 후에도 한 차례 더 일어났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 중동 전쟁의 역사적 배경(背景)을 잠시 고찰해 보기로 한다.
3차에 걸친 중동전쟁은 다음과 같은 분쟁사(紛爭史)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대인과 아람민족은 원래 같은 햄계(系)민족이다. 햄족의 한 지류(支流)인 아르메노이드 왕족(王族)이 로마에 멸망당한 뒤 유대민족은 팔레스타인(가나안)을 떠나 조국을 잃은 유랑민족으로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 수는 1,200만 명에 달하였다.
한편 아랍민족은 남(南)아라비아와 동(東)아프리카의 햄계(系) 인종이 혼혈한 민족으로서 아프리카의 대서양 해안에서 페르시아만에 걸쳐 1억 1천만이 14개국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유대교, 아랍인들은 코란을 경전으로 하는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이 두 민족이 심각한 적대관계를 빛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일어난「시오니즘」운동과 영국(英國)의 정략적 중동정책에서 비롯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로마의 탄압과 중세의 종교적 핍박, 나치의 인종학살이란 시련 속에 생존해 왔던 유대인들에게는 어느 날엔가 성지 예루살램(BC 11세기 때 사울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국했고, 다윗왕 때 예루살렘을 왕도로 정함)의 시온 언덕에 유대인의 나라를 재건한다는 것이 가장 절실한 민족적 비원(悲願)이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프랑스의 유대계 부호인 로드차일드가(家)등 재벌로부터 자금을 얻어 터키로부터 팔레스타인의 토지를 사들여 계획적인 유대인의 이민을 보내기 시작했고, 오스만 투르크제국(帝國)의 압정 속에서 살고 있던 아랍인들도 19세기부터 민족주의에 눈을 떠 파리(巴里)에 아랍민족회의를 설치하여 반(反)터키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터키와 중동에 대한 독일(獨逸)의 진출을 막기 위해 아랍인과 유대인의 지지가 필요했던 영국은 카이로 주재 고등판무관 맥마흔으로 하여금 메카의 추장에게 아랍인의 협력을 교환조건으로 아랍인이 획득한 땅에 독립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또한 영국은 시온협회 대표 로드차일드에게 전후(戰後)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건국을 보장하게 됨으로써 같은 땅에 두 나라의 독립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 유대인과 아랍 양 진영의 독립 요구에 직면하게 된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령(委任統治嶺)으로 두게 됨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양 민족의 투쟁장으로 화하게 했다. 한편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 있는 5백만 유대인의 압력과 소련의 남진(南進)을 봉쇄하는 대(對)공산권 전략의 필요상 유대국가의 건설에 중동(中東)의 안정을 걸게 됨에 따라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세우는 팔레스타인 분할결의안(分割決議案)이 논의되기에 이르렀고,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기간(委任統治期間)의 만료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독립국가 건설을 선언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등 아랍제국(諸國)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전쟁이 벌어졌으나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나 그 해 6월 유엔의 중재하에 휴전(休戰)이 성립되었다. 이 전쟁이 곧 1차 중동 전쟁(中東戰爭)이었으며 그 1차 중동 전쟁의 결과 요르단은 아랍측의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고 이집트는 가자지구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5월 미·영·불(美英佛) 3국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국경(國境)을 보장하는 이른바 3국선언을 발표했고, 1955년 9월 나세르가 소련과 체코로부터 면(綿)과 무기의 교환을 결정하자 공산권과의 무기흥정에 놀란 미국이 이집트의 아스완 댐 건조를 지원하겠다고 한 약속을 철회함에 따라 이에 분노를 터뜨린 나세르는 수에즈운하(運河)의 국유화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6년 10월 영·불 양국군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게 됨으로써 제2차 중동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집트의 패배로 귀결된 그 2차 중동 전쟁은 그 해 12월 미·소 양국의 압력으로 휴전이 성립되어 이집트로 진격한 영·불군이 철수를 하는 대신 6천명의 유엔 비상군(非常軍)이 이집트에 주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1964년 5월 이스라엘이 네게브 사막에 물을 대기 위해 갈릴리호(湖)에서 요르단강의 수로(水路)변경공사를 시작하자 아랍권은 이에 대한 보복을 위협했고, 1966년 11월 시리아와 상호방위조약(相互防衛條約)을 체결하고 연합군사령부(聯合軍司令部)를 설치했던 나세르가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국경충돌이 한층 찾아지고 있던 1967년 5월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일전을 불사할 태세를 갖추자 그 해 6월 5일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3차 중동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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