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4) 이인호 소령의 해병대장

머린코341(mc341) 2015. 3. 12. 13:37

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4) 이인호 소령의 해병대장

 

  1966년 8월 31일 해병대사령부 광장에서는 그 해 8월 11일 투이호아지구에서 전개된 해풍작전(海風作戰) 기간 중 약간 명의 수색대원들을 진두지휘하여 베트콩이 숨어 있는 동굴을 수색하던 중 갑자기 적이 던진 수류탄을 자신의 가슴으로 덮쳐 뒤따르는 대원들의 목숨을 구한 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전사 후 소령으로 특진)의 영결식을 해병대장(海兵隊葬)으로 엄수하고 고인의 유해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그 날 오전 10시부터 KBS에서 전국에 생방송하는 가운데 거행된 그 영결식장에는 고인의 유족과 3부 요인, 여야 각 정당대표, 국방장관, 합참의장, 각 군 총장, 주한 외교사절과 무관(武官)들, 유엔군사령관과 한․미 고위장성들, 숙명여대 총장(尹泰林)과 동 대학교의 합창단, 중앙대학교 총장(任永信)과 동 대학교의 학생대표들, 남녀고등학교 학생들과 해군사관학교 동기생 등 많은 조객들과 해병대사령부의 전 장병과 군악대 및 의장대가 참석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얼을 빛낸 그 고인의 고귀한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빌었다.

 

  해병대 군악대의 구슬픈 주악 속에 진행이 된 그 영결식에서 제주(祭主)인 나는 조문을 통해 "고 이인호 소령은 청룡이 낳은 해병대의 영웅인 동시에 국군의 귀감이며 조국 대한의 영원한 자랑"이라고 했고, 김성은(金聖恩) 국방장관은 자신의 조사를 통해 "고 이인호 소령의 거룩한 살신성인의 정신은 부하애(部下愛)의 극치(極致)"라고 말하면서 "고인이 빛낸 그 희생정신을 국군 전 장병이 계승하여 조국과 자유민(自由民)을 위해 더욱 용전분투 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편 그 영결식장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비롯하여 3부 요인과 각계 각층에서 보내 온 100여 개의 조화가 답지해 있었으며, 고인에 대한 약력소개와 국목의 기도, 제주(祭主) 및 국방장관의 조문과 조사, 해사 11기 동기생 대표와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의 추도사, 해병대 군종감의 성경 봉독, 헌화 및 조총(弔銃)발사 등순서로 진행이 된 그 해병대장 영결식은 3발의 조총이 의장대에 의해 발사된 후 고인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숙명여대 합창단이 '고 이인호 소령의 노래'를 합창하는 가운데 서서히 식장을 떠남으로써 끝을 맺었다.

 

  다른 한편 영결식이 거행되기 하루 전날 각의(閣議)에서는 고 이인호 소령에게 대한민국의 최고무공훈장인 태극훈장(太極勳章)을 추서키로 의결했고, 또 영결식을 마친 뒤 해병대사령부에서는 고인의 동상(銅像) 건립과 유족을 돕기 위한「추모사업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하여 당시 김포(金浦) 해병여단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에서는 고인의 두 유자녀가 유치원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공납금 없이 다닐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증서(證書)를 유족에게 전달했고, 해군·해병 장학회(獎學會)에서는 학자금 지급을,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장남 제욱(濟旭) 군의 해사입교(海士入校)보장을 각각 기록으로 남겼는데, 결국 당시 7세였던 장녀 선민(宣旼)양과 당시 4세였던 장남 제욱 군은 유치원에서 국민학교까지는 중대(中大)부속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나오게 되었으나 그 뒤로는 입학제도(入學制度)의 변경 등으로 선민 양은 중대 부속중학교와 정신여고(貞信女高)를 거쳐 숙명여대(史學科)로 진학하고 제욱 군은 선린중학(善隣中學)과 배문고등학교(培文高等學校)를 거쳐 해군사관학교(40기)로 진학, 현재 해병 소령으로 근무하고 있고, 숙대를 졸업한 선민 양은 25세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두 자녀의 모친이며 고 이인호 소령의 미망인인 이경자(李敬子)여사는 1963년 11월 원호처의 주선으로 조흥은행에 입사하여 본점 업무개선과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94년 명예퇴사를 했다고 한다.

 

  1966년 9월 초순경이었다. 월남 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국군장병들을 위문하고 작전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월남을 방문했던 민중당(民衆黨) 당수(黨首) 박순천(朴順天) 여사는 김대중(金大中) 대변인 등 몇몇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주월 한국군사령부에서 제공한 헬기편으로 추라이지구에서 작전 중인 청룡부대 본부를 방문하여 여단장 이봉출(李鳳出) 준장으로부터 상황을 청취한 다음 베트콩의 소탕과 촌락 재건작전을 위해 연일 빛나는 개가를 올리고 있는 청룡부대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런데 9월 3일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방문한 후 수일 간에 걸쳐 주요 한국군 부대를 시찰했던 박순천 여사는 귀국 후에 가진 정당출입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주월 한국군 부대 방문 소감을 피력하며 특히 가장 위험한 북쪽 지역에 배치되어 선전감투하고 있는 청룡부대 장병들의 진중(陣中)을 방문해 보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박순천 여사는 그 해 8월 31일 해병대사령부에서 거행된 고 이인호 소령의 해병대장에도 참석했다.

 

  1967년 1월 13일이었다. 김포(金浦)지구로 이동하게 된 해병제5여단본부에선 부대이동과 여단장의 교체발령에 따르는 군기(부대기) 이양식이 신구 여단장과 해병대사령관 및 본스틸 주한 유엔군사령관등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1966년 11월 23일에 창설이 된 그 5여단은 1965년 10월 청룡부대(해병제2여단)의 결단과 파월에 따르는 해병제1상륙사단의 병력 증강을 위해 편성된 것이었는데, 그 날 이루어졌던 그 부대 교대와 군기이양은 부대 교대와 동시에 이루어진 5여단장의 교체발령으로 초대 5여단장 김한수(金漢壽)준장이 후임 여단장 이병문(李丙文)준장에게 5여단의 부대기를 이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이병문 준장의 대(代)에 이르기까지 존속해 왔던 김포 제1임시여단은 그 날부로 해체가 되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