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1) 1차 방월과 방중
나의 사단장 임기는 1966년 3월 17일부로 끝이 나고 그 날부로 해병대부사령관 겸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던 나는 그로부터 약 3개월후인 7월 1일부로 중장의 계급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제7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이 된 나의 감회는 너무나 벅차고 뿌듯했다.
1946년 3월 16일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에 입단한 지 꼭 20년 3개월 15일 만에, 그리고 1946년 10월 28일 해군 소위로 임관된 날로부터서는 19년 8개월, 1952년 2월 25일 내가 소령의 계급으로 해병대로 전과한 날로부터는 13년 6개월 5일 만에 오르게 된 말할 수 없이 영광되고 자랑스런 계급과 직위였다.
그 날 오전 10시 해병대사령부에서 거행된 신․구사령관 이취임식에 앞서 나는 전임사령관 공정식 중장과 함께 이임과 승진 및 취임을 신고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이후락 비서실장, 이석제 총무처장관, 강서룡 국방차관, 김용배 육군참모총장, 함명수 해군참모총장, 박원석 공군참모총장 등이 배석하고 있던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의 옷깃에 손수 중장의 계급장을 달아 주며 축하와 격려의 뜻을 베풀어 주었다.
한편 그 날 오전 10시 해병대사령부 광장에서 거행된 그 6·7대 해병대사령관 이취임 식장에는 수많은 내외 귀빈들과 행사부대 장병들이 참석했다. 전임 사령관으로부터 부대기와 지휘권을 인수하게 되었던 나는 취임사를 통해 국가 전략 기동 예비대로서의 막중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도의 출전 테세를 갖추어 국토방위와 자유민의 전우로서 참전하고 있는 월남전에서 더욱 용전분투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7월 26일 취임 후 첫번째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던 나는「출전준비」를 통솔방침으로 표방하는 한편 전투력 증강을 위한 당면과제를 논의했고, 또 제5여단 창설과 예비사단의 편성 등 나의 사령관 재임기간 중에 꼭 성취시키고자 했던 중요 사업목표를 설정하여 더불어 달성해 나갈 것을 강조했다.
나의 사령관 재임기간 중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해병대로서는 주월 청룡부대에서 발생하는 전투손실에 대한 병력보충과 교체부대의 파월을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66년 7월 22일 마침내 교체병력의 제1진이 출국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매년 한 차례씩 2진과 3진 순으로 차례로 파월하여 전선 근무를 마친 병력과의 주기적인 교체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리고 해병대에서는 청룡부대의 편성과 파월로 인해 생기게 된 병력 규모의 갭을 메꾸기 위해 새로운 전투부대(제5여단)의 창설을 추진한 끝에 1966년 11월 하순경 마침내 그 5여단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월 28일 해병제1상륵사단 연병장에서 거행된 그 제5여단 창설식에는 김성은 국방장관을 위시하여 국회 국방분과위원들과 한․미 고위 장성 등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했는데, 그 석상에서 김성은 장관은 측사를 통해 5여단 창설을 위해 사단장 재임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였던 나의 공로를 높이 치하한다고 말하고 국토방위와 자유수호의 사명 완수를 위해 더욱 매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편 사령관으로 취임한 나는 1967년과 1969년 두 차례에 걸쳐 자유월남 공화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1차 방문(1967년 2월)은 월남 해병대사령관 칸 중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2차 방문(1969년 1월)은 티우 대통령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월남의 제반 군사 현황을 시찰하기 위해 국방부 기획국장 김용국(金龍國) 소장을 비롯하여 행정참모부장 이영우 준장, 정보국장 서상국(徐相國) 준장, 관리국장 조성준(趙性俊) 대령 및 부관 여현수(呂賢秀) 중령 등 5명의 수행장교들을 대동하고 방문했던 그 1차 방월기간(2.13~18) 중 나는, 주월 한·미·월군 사령부와 전투부대 등 여러 군부대를 시찰하는 한편 독립궁(獨立宮)으로 티우 대통령을 예방하여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특히 월남 도착 3일째 되던 15일에는 쨔빈동에 배치되어 있던 청룡부대 제3대대 11중대 장병들이 월남전 사상(史上) 유례없는 대첩을 거두게 됨으로써 나의 마음을 한없이 기쁘게 해 주었다. 많은 추억이 간직되고 있는 그 1차 방문 때의 주요 일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즉 출국 당일(12일) 홍콩에서 1박하고 13일 사이공 탄손누드 공항에 도착했던 나는 월남 해병대사령관 칸 중장과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 신상철 주월 한국대사의 출영을 받으며 칸 중장의 안내로 월남 해병대 의장대를 사열한 다음 숙소인 영빈관에서 여장을 풀고 그 날 저녁에는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이 베푼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다.
14일의 방문 일정은 매우 분망했다. 월남군 최고사령부와 해군본부를 방문한 데 이어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하여 칸 사령관으로부터 2등 킴칸(KIMKAHN) 훈장을 받았던 나는,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방문해선 작전 상황실에서 월남정세 전반에 걸친 사항과 한국군의 작전 현황에 대한 브리핑을 청취하고 사령관 및 참모들과의 의견교환도 했다.
그 날 월남 외무부를 경유하여 독립궁으로 티우 대통령을 예방했던 시각은 오후 3시경이었다.
1964년 6월 내가 박 대통령의 특명으로 방월했을 때 합참의장으로 재임했던 그 티우 대통령은 나와의 재회를 반가워하면서 시종 극진한 환대를 해 주었고, 당면한 관심사를 논의하는 가운데 특히 그는 청룡부대의 용맹성을 극구 찬양했다.
그 날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곳은 사이공 부두의 함정에 자리잡고 있던 해군 백구부대(白鷗部隊)와 주월 미군사령부였다. 백구부대에서는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명감을 고무하기 위한 훈시를 했고, 주월 미군사령부에서는 웨스트 모랜드 장군과 방패(防牌) 교환을 하며 우의를 다졌는데, 웨스트 모랜드 장군 역시 나와의 재회를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월남 해병대사령관 칸 중장이 베푼 환영만찬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방문 2일째의 일정을 모두 마쳤다.
그런데 그 이튿날 이른 아침이었다. 쨔빈동의 11중대 진지에서 대첩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던 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을 느끼면서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랜드 대장이 제공해 준 그의 전용기(소형 쌍발제트기)를 타고 청룡부대 본부로 가서 여단장 김연상(金然翔) 준장으로부터 상황보고를 청취한 다음 여단장 의전용 헬기를 타고 혈전이 벌어졌던 그 쨔빈동 진지를 시찰했다. 초연이 물씬거리고 있는 그 혈전장에는 수많은 적병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진지 일각에는 노획된 적의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한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나는 말할 수 없는 긍지를 느꼈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11중대장 정경진(丁京鎭) 대위를 비롯한 중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적의 재공격에 대비토록 했는데 그 때 수명의 막료들을 대동하고 그 현장으로 비래했던 미 해병대의 제3상륙군사령관 월트 중장은 나와 인사를 나누면서 2차 대전 때부터 허다한 전투에 참가했었지만 이와 같은 기적적인 전과를 거둔 전투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한국 해병대의 감투정신을 격찬했다.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월맹군 1개 연대의 기습공격을 격파하여 월남전 사상 유례없는 대첩을 거두었다는 전과 보도가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자 청룡부대 본부에는 티우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군부 인사들과 정치인 및 내·외신 기자들이 쇄도하여 승전을 축하했다.
즉 16일에는 월남전 최고사령부 참모부장과 주월 한국군사령부 작전참모 및 UPI기자들이 방문했고, 17일에는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와 김성은 국방장관, 신상철 대사 일행, 그리고 21일에는 자유월남 공화국의 국가원수 티우 중장과 키 수상 및 람 1군단장 일행이 내방하는 등 3월 중순경에 이르기까지 방문객이 줄을 이었는가 하면, 특히 월남군과 미군 당국에선 연구반을 현지로 보내어 진지견학과 방어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게 했고, 또 박정희 대통령과 주월 미군사령관은 승전 축하 메시지를 보내 와서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했다.
쨔빈동 전투는 유례 있는 특진의 기록과 훈장 사태를 남게 했었다. 그 전투에 참가했던 전 사병들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가 내렸고, 11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게는 대한민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고, 배장춘 하사 외 1명의 분대장에게는 을지무공훈장, 김기홍 중위를 비롯한 8명의 수훈장병들에 게는 충무무공훈장이 각각 수여되었다.
그리고 귀국 후 나는 관계관에게 지시하여 그 쨔빈동 전투를 해병대의 5대작전에 이은 또 하나의 대작전으로 전사에 기록되도록 지시했다.
한편 쨔빈동 진지를 시찰했던 그 날 오후 나는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의 배려로 그 전날부터 안내역을 맡아 준 이범준(李範俊) 제100군수사령관의 안내로 나트랑에'있는 주월 한국군 야전사령부를 방문한 데 이어 캄란만에 건립되어 있는 (大韓民國 海兵靑龍部隊上陸記念碑)를 둘러보고 기념 촬영을 했다. 그런 다음 백마(白馬)부대와 주월 한국군 제100군수사령부를 방문하고 다시 청룡부대로 떠났다.
그리하여 청룡부대에서 1박했던 나는 그 다음 날 청룡부대를 방문한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성은 국방장관을 그 곳에서 맞이하게 되었는데, 청룡부대를 방문한 정 총리와 김 장관은 브리핑을 청취하는 자리에서 특히 쨔빈동 전투의 혁혁한 전공을 높이 치하했다.
그 날 정 총리와 김 장관 일행은 부대 본부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한 다음 주변에 있는 진지를 시찰하고 사이공으로 떠났는데, 그때 함께 사이공으로 가게 되었던 나는, 그 다음 날 월남에서의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자유중국을 방문하기 위해 홍콩으로 떠났다.
내가 홍콩을 경유하여 대북(臺北)에 도착했던 날짜는 2월 19일이었다.
그 날 대북 공항에는 자유중국 해병대사령관 우호장(于衰章) 중장과 김신(金信) 주중대사 및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 많은 교포들이 출영하여, 나와 수행원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공항에 도착한 나는 자유중국 해병대사령관의 안내로 해병대의 의장대를 사열하고 출영인사들과 인사를 교환한 다음 영빈관인 대원반점(大圓飯店)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 날 저녁 나와 수행 장교 일행은 대북에 있는 자유중국 해병대의 대형 극장으로 초대되어 노래와 춤과 연극 등으로 짜여진 자유중국 해병대 연예대의 수준높은 공연을 관람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공연의 핵심이 되는 연극의 주제는 대륙반공(大陸反攻)의 숙원성취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려는 자유중국 해병들의 비장한 결의를 담은 내용이었다.
그 다음 날 나는 우호장 중장의 안내로 자유중국군 총사령부와 육군본부, 해군본부, 공군본부 및 자유중국 중앙정보부 등을 방문하고 그 날의 일정을 마쳤다. 그리고 21일에는 항공기 편으로 대만 최남단에 있는 고웅(高雄)으로 가서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중국 함대사령부와 함대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한 다음 22일 아침 항공기편으로 대중(臺中)으로 향발했다. 대중으로 간 목적은 일월담(日月潭)의 산정호반(山頂湖畔) 별장에 머물고 있는 장개석(蔣介石)총통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그 날 일월담 호반에 있는 영빈관에 여장을 푼 나와 수행장교 일행은 그 산정호수 부근에 있는 원주민촌(原住民村)을 방문하여 원주민들이 추는 민속무용과 그들의 생활상도 관람하고 그 마을 추장(酋長)과 사진도 찍으며 추억에 오래 남을 인상 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 10시경 나는 그 전날 기륭에서 대중으로 올 때 함께 동행했던 자유중국 함대사령관과 함대해병대사령관 옌(袁) 장군의 안내로 장 총통의 별장을 예방했더니 그 별장에는 총통 부처외에 김신(金信) 주중대사의 안내로 장 총통을 예방한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과 민병권(閔炳權) 공화당 원내총무를 위시한 여야 원내총무단 일행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도착한 후 월남전쟁의 양상과 월맹군과 중공군의 전술 등을 화제로 떠올려 질문도 하고 대화도 나눈 그 자리에서 장 총통은, 느닷없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여 좌중에 있던 자국(自國)의 고위 장성들을 긴장시켰다. 장 총통이 나에게 했던 질문의 요지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는 미군의 장비가 썩 좋고 전쟁물자도풍부하며, 또 미국사람들의 체격조건도 월등한 데도 불구하고 체격도 왜소하고 무기나 장비도 빈약한 월맹군과 베트콩을 당해 내지못해 왕왕 전투에서 패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있고, 또 청룡부대 장병들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을 한다는 소식도 전해 듣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러한 물음에 대해 선뜻 나는 "군의 정신 전력은 무기체계에 앞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변을 했더니 장 총통은 마치 출제해 놓은 정답(正答)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듯이 금새 희색이 만면해지며 파안대소를 했고, 그러자 굳어져 있던 고위장성들의 표정도 환히 밝아졌다.
그리고 좌중의 분위기가 그러하자 영부인 송미령(宋美齡)여사도 몹시 기분이 좋았던지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선 마치 인자스런 어머니가 귀여운 아이들의 입에 맛있는 음식물을 넣어 주듯 탁자 위에 놓인 긴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더니만 쟁반에 담겨 있는 송편떡 하나를 집어 나의 입에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 날 그 자리에 송편떡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정월 대보름날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그러한 분위기가 미처 가라앉기 전에 장 총통은 우호장 중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말하면서 청룡부대에서 노획한 중공제화염방사기 한 문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부탁을 하면서 장 총통은 월맹군이 보유하고 있는 그 중공제 화염방사기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적 보병부대의 중요한 무기라 했고, 또 장 총통 자신이 과거 대륙(본토)에서 공산군과 싸울 때부터 관심을 가져 왔던 무기라고 했는데, 장 총통으로부터 그러한 말을 듣게 된 나는 대북에 도착했던 그 첫날밤 내가 해병대극장으로 초대되어 우호장 사령관과 잠시 환담을 나눌 때 자랑삼아 했던 그 말, 즉 그 동안 청룡부대에서 노획한 무기 가운데 2문의 중공제 화염방사기가 있다고 했던 그 말이 어느 새 총통에게 전해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귀국 후 꼭 보내 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더니 총통은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리고 그 날 오전 11시경 내가 총통별장을 물러 나을 때 장 총통은 영부인 송미령 여사와 함께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영접실 문밖까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나의 손도 잡고 등을 두드려 주며 극진히 배웅해 주었다.
한데 숙소인 영빈관으로 돌아왔을 때 나와 함께 그 곳에 왔던 그 고위 장성들 중 한 사람이 한숨을 몰아쉬며 "오늘 우리 큰일 날 뻔했어." 하자 다른 장성들도 "정말 그랬어,"하며 얼굴들을 맞대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러한 말을 하며 새삼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은 내 자신의 직감으로는 총통이 나에게 했던 그 갑작스런 질문이 그들 자신에게 던져진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말을 끝까지 들어본 즉 혹 내가 답변을 망설이다가 주저할 경우 그 질문의 화살이 그들 자신에게 던져질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순간적으로 긴장들을 했으나 다행히도 내가 한 그 답변이 총통의 환심을 사는 바람에 만사형통이 되고 말았다면서 나에게 그런 명답을 해 줘서 고맙다고들 했다.
내가 자유중국에서의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의 길에 올랐던 날짜는 2월 24일이었다. 그 날 아침 나는 대만 방위군 총사령관 정위원(鄭爲元) 대장의 초청을 받고 대북의 영빈관 「대원반점」에서 정 대장과 조찬을 하고 있었는데, 식사 도중 정 대장은 자신에게 걸려 온 전화가 있어 잠시 자리를 했다가 곧 돌아와선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즉 총통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고 말한 그는, 내가 언제 떠나는가를 물어 보더니만 "총통께서 나에 대한 대접을 잘 해 드리란 말과 함께 며칠 더 체류하여 자국의 장성들에게 월남전에 대한 강연을 해 달라고 하시니 그 청을 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상부로부터 급히 귀국하라는 전문을 받고 있던 터였으므로 그 청을 들어 줄 처지가 못되어 정중하게 사절하는 대신 화염방사기는 귀국한 후 곧 보내 드릴 것을 재차 약속하는 한편, 월남전과 관련된 100여 장의 사진(8x10 크기)을 우호장 해병대사령관에게 제공하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내가 제공했던 그 사진은 월남 방문 기간 중 청룡부대와 주월 한국군사령부에서 수집한 약 300매 중의 일부였다.
한편 귀국 후 나는 귀국보고를 하기 위해 국방부를 경유하여 청와대를 방문, 박 대통령에게 귀국보고를 했더니 박 대통령은 먼저 귀국한 이효상 국회의장으로부터서도 장 총통 예방 시의 분위기와 대담내용을 잘 전해 들었고, 또 화염방사기에 관한 얘기도 전해 들었다고 말하면서 청룡부대에서 노획한 그 중공제 화염방사기 한 문을 깨끗이 손질해서 장 총통에게 증정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노획무기를 잘 손질해서 시험발사까지 해 본 다음 그것을 분해하여 조립이 용이하도록 부속품별로 번호를 매기고 도면까지 떠서 잘 포장을 하여 김신(金信) 대사에게 보내는 서신과 함께 자유중국 대사관으로 보냈더니 10여 일 후 김신 대사로부터 그 물건을 잘 수령해서 장 총통에게 전달했다는 답신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시사 과정을 통해 확인해 본 그 중공제 화염방사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기관총처럼 엎드린 자세에서도 화염을 방사할 수 있도록 손잡이의 앞부분에 받침다리가 달려 있는 그 중공제 화염방사기는 미제 화염방사기에 비해 방사통신(放射筒身)이 더 가늘고 긴 것 같았다. 그리고 단발식 또는 연발식으로 방사할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는 그 중공제 화염방사기의 화염도달 거리는 약 100야드 정도였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7대사령관 강기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3) 애기봉(愛妓峰) (0) | 2015.03.11 |
---|---|
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2) 미 해병대 시찰 (0) | 2015.03.11 |
나의 人生旅路 - 8. 해병 제1상륙사단 (3) 전상자 자활촌 (0) | 2015.03.09 |
나의 人生旅路 - 8. 해병 제1상륙사단 (2) 5인의 순직 해병 (0) | 2015.03.09 |
나의 人生旅路 - 8. 해병 제1상륙사단 (1) 청룡부대의 결단과 파월 (0) | 2015.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