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8. 해병 제1상륙사단
(3) 전상자 자활촌
청룡부대가 투이호아지구에서 청룡1호 작전을 전개하고 있던 1966년 3월 하순경 이었다.
나는 월남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되고 있는 1급 또는 2급 전상자들이 그들의 직계가족과 함께 입주할 수 있는 자활 복지촌을 건립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여 관련부서의 참모들에게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내가 그러한 구상을 하게 된 것은 첫째는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모군부대의 부대장으로서 마땅히 강구해야 할 원호대책이었고, 둘째는 6․25 전쟁 후 거리에서 목격했던 그와 같은 비참한 영상들을 적어도 우리 해병대에서만은 보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단에서 작성했던 전상자 자활촌 건립 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즉 우선 필요한 토지는 영일군으로부터 군유림(郡有林)을 무상(無償)으로 대여받아 이용할 계획이었고, 그것이 확보되면 택지를 조성할 만한 곳에는 연차적인 계획으로 1970년도까지 약 50동의 주택을 건립하는 한편, 입주자들의 자급자족과 자활대책을 강구해 주기 위해 단지 내에 두부공장과 빵공장, 양계, 양돈, 양우장 등을 마련하여 그 곳에서 생산되는 식품과 육류(肉類) 등을 부대에 남품하여 수입을 잡게 하고, 또 장병들의 노력(勞力)을 지원하여 개간한 논과 밭에서 생산한 농작물도 대부분을 부대에 남품시켜 수입을 잡게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사업 추진에 소요되는 자금은 부대 장병들의 성금으로 충당할 예정이었고, 택지조성과 주택건립 및 농지개간에 필요한 인력과 장비는 사단에서 지원하되 작업을 추진하는 일은 사단의 지원부대인 포항 기지 사령부에서 관장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계획의 성안과 함께 추진이 된 그 전상자 자활촌 건립계획은 영일군으로부터 제공받은 54정보의 임야 가운데 그 일부를 택지로 조성하여 1966년 연말에는 A지구로 확정된 택지에 10동의 주택을 준공하여 입주식을 거행한 데 이어 1967년에는 B지구에 10동, 1968년 C지구에 10동을 건립하는 등 내가 사령관직을 마치고 예편할 그 시기까지 도합 30동의 주택이 건립되고, 또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그 두부공장과 빵공장, 양계, 양돈, 양우장과 상당한 평수의 농지도 개간되어 자활의 터전을 알차게 다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듯이 장병들의 성금으로 계획을 추진하다 보니 영일군의 일부 유지들이 성금을 지원했고, 또 사업계획이 절반가량 추진되었을 때 원호처의 장동운(張東雲) 처장이 고맙게도 상당액의 원호기금을 지원해 줌으로써 건축자재를 확보하는데 요긴하게 쓸 수 있게 했다.
한편 처음 계획을 세울 때 그 자활 복지촌의 명칭을 「새마을」로 정했던 나는 1차적으로 A지구에 건립한 10동의 주택이 준공되기 전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 대통령에게 그 자활촌의 건립 취지와 계획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드린 다음 현판과 새마을 탑에 새길 「새마을」이란 세 글자를 휘호해 주십사고 했더니 참으로 좋은 사업을 추진한다고 말하면서 쾌히 응해 주었고, 또 그 후 1967년에는 자활촌을 위해 금일봉을 하사했는데 그 하사금을 가지고 계획 추진본부에서는 새마을 입주자들의 휴게실과 예식장 및 강당을 겸하는 청해장(靑海莊)이라는 건물을 건립하여 박 대통령의 뜻을 기념하고 그 청해장에 새마을 현판을 걸었다.
또한 내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직후인 1966년 7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친서를 나에게로 보내어 그 새마을 복지촌 건립을 위해 애를 썼던 나와 정광호(鄭光鎬)사단장 및 포항 기지 사령관 이영우(李榮雨)준장 등 여러 지휘관의 노고를 치하했었다. 한자(漢字)위주로 된 원문(原文) 그대로를 여기에 옮겨 둔다.
親愛하는 姜起千 將軍
就任 以后 姜 司令官의 健壯함을 빌며 姜 將軍이 指揮하는 全 海兵隊將兵들의 士氣도 極히 旺盛하리라고 믿습니다.
報告에 依하면 姜 將軍 揮下 海美第1上陸師團 및 基地司令部에서는 派越將兵 家族 돕기에 앞장 서 行政當局과 協調하여 誠과 熱로써 開懇營農支援 및 建築供與 등 援護事業을 活潑히 展開하고 있어 行政當局은 勿論 一般의 稱談이 努努하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오르지 姜 將軍의 卓越한 指揮 統率力에 基因된 것이며 海兵隊의 傳統을 보다 빛내는 훌륭한 事業이라고 생각하며 致賀를 보냅니다.
姜 將軍께서는 이와 같은 事業을 보다 擴大해서 온 國民이 相互拉脚하고 合心團結하는 새로운 風土造成에 앞장 서고 나아가 派越된 將兵들이 后顧의 念慮없이 오로지 祖國의 繁榮을 爲해 힘껏 싸울 수 있도록 하여 주기 바랍니다.
나의 뜻을 今般 이 事業에 앞장 섰던 鄭光鎬 師團長과 李榮雨 司令官은 勿論全將兵에게 傳해 주기 바라며 姜 司令官과 海兵隊 全 將兵의 健鬪를 빕니다.
1966年 7月 15日
大統領 朴 正 熙
海兵隊司令官 姜起千 將軍 貴下
아울러 언급해 둘 얘기가 있다. 그것은 곧 상이군인들의 정착촌을 건립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를 전후하여 사단에서는 단지 내의 유휴지를 개간하여 채소밭도 일구고 무논에는 벼를 심어 가꾸는 등 장병들로 하여금 영농을 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이게 했다. 정부 당국의 식량증산 정책에 부응하고 장병들의 복지기금 조성을 위해 착안했던 그 영농사업은 경제적인 소득증대를 위해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장병들의 마음 속에 국토에 대한 끈끈한 사랑을 심어 주는 역할도 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내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월남 파병에 대비한 교육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 차례 해병사단을 방문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해 주었고, 또 사단의 발전을 위해 많은 조언과 배려를 해 주었다.
박 대통령이 사단을 방문할 시에는 공식적인 방문이든 비공식적인 방문이든 간에 언제나 특별하사금을 내려 장병들의 복지증진과 사기 앙양을 도모해 주었고, 또 산악전 훈련장을 비롯한 야외 훈련장을 시찰하여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공관(公館)이 없던 해병사단에 공관이 건립된 것도 바로 그러한 시기에 박 대통령께서 베푼 각별한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공관 건립에 읽힌 배경담은 다음과 같다.
즉 청룡부대의 결단을 약 1개월 남짓 앞두고 있던 1965년 여름철 어느 날 오전 10시경 김종갑(金鍾甲) 국방분과위원장을 비롯한 수명의 국방위원들과 2군사령관 박경원 중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박종규 경호실장 등을 대동하고 사단을 방문했던 박 대통령은 상황실에서 브리핑을 청취한 데 이어 나의 안내로 야외훈련장을 시찰한 다음 사단본부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오후 2시경 부대를 떠날때까지 사단장실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때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기보단 오히려 후덥지근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선풍기를 바라보고 있던 박 대통령은 느닷없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즉 과업시간이 끝난 후엔 어디서 숙식을 하느냐고 묻기에 야간훈련이 있을 때는 사단장 집무실에 야전침대를 펴 놓고 잠을 자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시내에 얻어 놓은 방 하나 부엌 하나 딸린 셋집에서 숙식을 한다고 답변하고 간혹 서울에서 집사람이 내려와서 2~3일간씩 그 셋집에 머물러 있다가 간다고 했더니,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해병사단장이 이렇게 더운 퀀셋 집무실에서 잠을 자서야 되겠나, 휴식을 위한 공관이 있어야 되겠군."하면서 국방위원장에게는 공관 건립에 소요되는 예산을 염출해 보라고 지시하고 나에게는 공관 건립을 위한 설계도를 준비하라고 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 자신도 친히 소요 예산의 일부를 부담하겠노라고 했다.
그렇게 하여 건립이 추진된 그 해병사단의 공관은 나의 사단장 재임기간 중에 착공은 되었으나 나의 후임 사단장 정광호 소장 재임시에 준공이 되었으므로 그 정 장군이 그 공관의 첫 입주자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나의 사령관 재임기간 중 박 대통령을 모시고 사단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나는 그 때 우정 박 대통령을 그 공관으로 안내하여 함께 그 내부를 살펴볼 수도 있었고, 또 박 대통령에게 거듭 정중한 감사의 뜻을 표명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날 오후 3시경 부대 방문을 마친 박 대통령과 그 수행인사들이 포항역에 대기 중인 대통령 전용 기동차을 타고 부산으로 떠날 때 박 대통령을 전송하기 위해 포항역에 나가 있던 나는, 기동차가 출발하려 할 때 나의 손을 덥석 잡고 "사단장, 잠깐 나와 함께 가지."하며 끌어당기는 박 대통령의 권유를 뿌리칠 길이 없어 그 길로 부산까지 가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 경주 일대의 헐벗은 산들을 바라보며 산림녹화와 지방 도로 및 지방 선거 등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부산에 도착했던 박 대통령은, 부산 시청에 들러 시정 현황을 청취하고 곧 울산으로 떠났다.
한데 그 날 부산 시청에서 시정 보고가 있기 전 잠시 시장실에서 박 대통령과 차를 마시고 있던 나는, 박 대통령의 소개로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동명목재(東明木材) 강석진(姜錫鎭) 사장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시 진주 강씨 종친회의 이사(理事)로 추대되어 있었던 강석진 사장과 나는 서로가 이름 두 자만은 알고 있던 사이였지만 그 때까지 서로 대면하여 통성명을 한 적은 없었다.
그 때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며 그 강석진 사장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즉 "사단장, 같은 종씬데 동명목재 강석진 사장을 몰라요?"하기에 "존함은 듣고 있었지만 아직 뵌 적은 없다."고 했더니, 나에게는 "그렇다면 인사를 해야지."했고, 강석진 사장에게는 강기천 장군이라고 소개하여 비로소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 강 사장과 나는 간혹 만날 기회가 있을 적마다 박 대통령의 소개로 인사를 나눈 일가라고 말하면서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었다. 그리고 그 날 해가 질 무렵 울산역에 도착했던 박 대통령과 수행인사들은 울산 관광호텔에서 울산 지방 유지들이 베푼 간소한 만찬회에 참석한 후 각자의 침실로 들어갔는데, 그 때 한 잔 더 하고 가라고 한 박 대통령의 권유로 대통령의 침실로 들어가게 되었던 나는, 박 대통령이 따라 준 양주 한 잔을 받아 마시고선 부대 훈련 때문에 그만 귀대하겠다고 했더니 박 대통령은 "호텔에서 자고 아침 일찍 가면 되지 이 어두운 밤중에 가야만 되느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부득불 그 다음 날 아침 6시부터 실시되는 BLT(대대급 상륙단)훈련에 유엔군사령관도 관망대에 임석하게 될 것이란 말을 하여 가까스로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무슨 차를 타고 가느냐고 하기에 부대에서 보내 온 지프차가 이미 호텔에 도착해 있다고 했더니 박 대통령은 침실 밖까지 나와 나의 등을 두드리며 "요새 자동차 사고가 많은데 더구나 밤길이니 운전을 조심해서 잘 가라."고 했다. 나는 지금도 다정한 부정(父情)처럼 느껴졌던 박 대통령의 자상하고 인정 어린 그 마음씨를 잊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한편, 청룡부대의 결단과 파월을 전후한 그 시기에 해병사단에는 서울에서 뻔질나게 내려왔던 신문·방송국의 취재요원들 외에 김종필 의원, 이효상 국회의장, 국회 국방분과 의원들과 유엔군사령관 및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한두 차례 방문하여 출전 준비에 임하고 있는 장병들을 격려해 주었는데, 그 분들에 대한 고마움도 늘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지면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사진은 1965년 1월 23일(일요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성은 국방장관과 공정식(孔正植) 해병대사령관, 박종규 경호실장, 이원엽(李元燁) 장군(육군)등과 함께 사단을 방문하여 사냥을 하며 망중한을 즐긴 장면을 찍은 스냅 사진이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그 날 박 대통령이 휴대하고 왔던 그 엽총은 불과 한 달 전 박 대통령이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1964. 12)했을 때 뤼브케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망원조준기가 부착된 성능이 썩 좋은 엽총이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으로서는 그 날 그 엽총을 처음으로 사용해 본 시사(試射)를 겸한 사냥 나들이를 한 셈이었는데, 그 날 포항 뒷산에서 울산 뒷산까지 넓은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사냥을 했던 일행은 여러 마리의 꿩과 오리 및 토끼 등을 잡았고, 또 점심 시간에는 잡은 그 짐승들을 사냥터에서 구워 먹으며 즐거운 환담도 나누었다.
그리고 청룡부대의 결단(結團)을 목전에 두고 있던 1965년 6월 16일에는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단을 방문하여 출전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해병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뜻을 전했다.
그 날 부대 인근 지역인 중단동(迎日面 中丹洞)에 건립된 재해(화재)복구 주택 준공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김인(金仁) 경북지사와 2군사령관, 경북도 경찰국장, 중앙정보부 대구시 지부장 등 경북 도내의 주요 기관장 일행과 함께 사단을 방문했던 육 여사는 장병들을 위해 정성껏 마련해 온 위문품을 전달한 후 사단본부 상황실로 안내되어 브리핑을 청취한 데 이어 사단본부 참모 및 예하부대의 주요 지휘관들과 오찬을 같이하고 그 재해 복구주택 준공식에 참석했는데, 중단동에 건립된 그 재해복구주택 건립 시 해병사단에서는 건설용 장비를 지원했었다.
한편 준공식이 끝난 후 육 여사는 나의 안내로 포항에 있는 수녀원(修女院)을 방문한 다음 서울로 떠났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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