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8. 해병 제1상륙사단 (1) 청룡부대의 결단과 파월

머린코341(mc341) 2015. 3. 8. 22:29

나의 人生旅路 - 8. 해병 제1상륙사단

 

(1) 청룡부대의 결단과 파월

 

  내가 해외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지 꼭 1개월 후인 7월 18일부로 나는 해병 제1상륙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부임 인사차 국방부장관실을 거쳐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나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즉 해병사단을 철저히 훈련시켜 월남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국회의 승인을 받을 때까진 극비에 붙이라는 당부도 했다.

 

  대통령으로 부터 그런 지시를 받고 사단장으로 부임했던 나는 부임하기 전부터 구상해 놓은 바에 따라「출전준비」를 해병사단의 통솔방침으로 정하는 한편 집행 중에 있던 기존 훈련계획을 대폭 수정하여 소단위부대의 기동훈련과 유격전훈련, 산악전훈련, 사격훈련(보병 및 포병부대) 등 월남전에 대비한 훈련계획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출전준비」라는 구호를 표방하는 데 있어 나는 이러한 조처도 취했다. 즉 청림동에서 오천면을 거쳐 감포(甘浦)에 이르는 그 오른쪽 도로와 도구(都丘)를 거쳐 구룡포로 가는 왼쪽편 도로로 분기되는 그 3차로 안쪽 길목 요지에 가로로 한 자(字) 한 자씩 띄어서 세워 놓은「神仙燒酒」(신선소주)의 입간판이 서 있는 그 자리에「出戰準備」(출전준비)라는 입간판을 세우기로 한 것이었다.

 

  내가 그러한 착상을 하게 되었던 것은 그 곳에 세워져 있는 그 신선소주의 입간판을 처음 보는 순간 마치 해병사단 장병들이 신선소주를 좋아하는 것 같은 고약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해병들의 정신을 무디게 할 것만 같은 그 신선소주의 입간판을 제거하는 대신 그 자리에 「출전준비」의 입간판을 세워 해병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본부에선 신선소주 회사와 그 땅 주인의 협조를 구한 끝에 적당한 보상금과 임대료를 지불한 다음, 어느 일요일 오후 그 두 개의 입간판을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그 다음 날 아침 통근버스를 타고 시내 쪽에서 출근하고 있던 장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출전준비의 입간판은 비단 해병들의 사기만을 고무한 것이 아니라 그 길목을 내왕하는 민간인들에게도 해병대에 대한 마음 든든한 인상과 함께 해병들에 대한 두터운 신뢰감을 갖게 하는, 그와 같은 역할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부에서 월남 파병에 대한 결정을 내려 국회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은 64년 7월 하순경이었다. 그러한 결정에 따라 그 해 9월 11일 제1이동 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월했던 정부에서는 65년 2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주월 한국 군사 원조단)를 창설하여 파월한 데 이어, 그 해 9월 20일에는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를 결단(結團)하여 10월 초에 파월했고, 또 그 뒤를 이어 맹호부대와 백마부대 등을 차례로 파월하는 한편, 해군수송전대(백구부대)를 창설하여 파월부대 장병들에 대한 해상수송 지원업무를 담당하게 했고, 또 소수의 공군 지원 부대도 파견했다.

 

  따라서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애당초 해병사단 전체를 파월하겠다고 했던 그 박 대통령의 복안에 변동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비둘기 부대에 1개 중대의 해병공병중대가 포함되게 됨에 따라 그 공병중대의 편성과 교육 및 파월을 위해서도 무척 바쁜 시간을 보냈다.

 

  2월 5일 창설되어 3월 10일에 출국했던 그 비둘기 해병공병중대는 사단에서 받은 기본교육 외에 본대(本隊)에 합류하여 강원도 지구에서 약 2주간의 종합 야외훈련을 받던 중 2월 9일 서울 종합 운동장에서 거행된 국민 환송 대회에 참석하여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송을 받았다. 그 국민 환송 대회장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을 했다.

 

  한편 해병사단 기지 내에 파월장병들을 위한 특수교장과 특수교육대가 발족한 것은 그 해(65년) 7월 하순경이었다. 월남의 촌락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그 특수 게릴라 훈련장은 베트콩의 지하 동굴과 지하진지, 각종 장애물과 지뢰, 부비트랩 등 베트콩이 사용하는 전법과 전술 등이 그대로 적용되도록 한 것이었는데, 그러한 특수교장을 설치하기 위해 나는, 내가 월남에서 찍어 왔던 사진과 직접 견문했던 지식을 십분 활용하게 됨으로써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의 창작품이란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 교장에 등장시켜 놓은 모의 인간들(월남인과 베트콩)의 복장과 각종 장애물 및 부비트랩 등은 그 일부는 주한 월남 대사관을 통해 입수한 실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특히 월맹군이나 베트콩이 만든 부비트랩 중에는 수류탄과 포탄, TNT 및 지뢰 등으로 만든 부비트랩과 죽창(竹槍)과 철창(鐵槍), 독시(毒矢)나 철침(鐵針) 등을 이용한 비폭발성 지뢰 등 그 종류가 너무나 다양했다.

 

  파월장병(청룡부대)들을 위해 실시했던 특수교육 기간은 8월 초부터 9월말까지의 약 2개월간이었다. 인원이 많아 5단계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실시했던 그 특수훈련과목 중엔 게릴라전과 산악전을 비롯한 각종 특수훈련 외에 군대예절, 함상생활, 부대안전, 월남정세, 특별정훈교육 등의 일반과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9월 20일에 거행된 청룡부대(해병제2여단) 결단식 때 그 식장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방부장관, 주한 미국 대사, 유엔군사령관, 해병대사령관, 국회 국방위원 전원, 각 군 참모총장, 육군의 주요 지휘관 등 수많은 귀빈들과 포항시의 남녀 고등학생 및 수십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참석하여 출전을 앞둔 청룡부대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 날 출전태세를 완비한 그 청룡부대의 결단식에 참석했던 귀빈들은 박 대통령이 청룡부대장 이봉출(李鳳出) 준장에게 수여한 부대기 수여에 이은 박 대통령의 유시와 열병 분열식 등의 순서로 진행된 그 결단식을 통해 월남에 파병될 한국군 전투부대 중 가장 선봉적인 역할을 하게 된 청룡부대 장병들이 그 늠름한 패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날 낮 오찬 회식을 같이 할 때 박 대통령은 훈련이 썩 잘 됐다며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행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육군 지휘관들은 행사를 마친 뒤 박 대통령을 수행하여 해병사단의 특수유격훈련장과 산악훈련장을 둘러보곤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 되겠다며 필요한 자료의 견본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청룡부대의 결단식을 마친 해병사단에서는 10월 3일로 박두한 출국준비를 위해서도 만전을 기했다. 출국 당일 주둔지의 역과 부산항에서는 관계 당국에 의해 처음으로 파월되는 전투부대에 대한 보안조처가 취해졌던 탓으로 출전부대 장병들의 가족이나 일반 시민들의 공개적인 환송은 없었고, 사단장을 비롯한 사단본부 참모들과 연예대원들로 구성된 사단 자체의 행사 요원들에 의한 환송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출국일자를 알리지 않는 등 필요한 보안조처를 취하긴 했었지만 청룡부대 장병들이 떠나간 그 주둔지의 역(驛)과 부산항부두 입구쪽에는 수많은 가족들이 몰려와서 장도에 오르는 혈육 또는 남편을 말없이 환송하고 있었다.

 

  그 날 청룡부대 장병들이 승선했던 수송선은「엘틴저」호와 「가이저」호 등 두 척의 미 해군 수송선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이저 호에는 수백 명의 맹호부대 선발대 요원들이 해병들과 함께 승선해 있었다.

 

  그리고 부두에 도착하는 즉시 승선을 했던 출전부대 장병들은 비록 함상에서나마 정연하게 도열하여 김종필(金種泌) 의원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국방위원들과 맹호부대장 채명신(蔡命新) 장군 및 육군 군수기지 사령관 등과 함께 부두에 도착한 김성은 국방장관과 해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및 사단장 등 직속상관들에게 출국신고를 한 다음 환송 행사요원들의 열띤 환송을 받으며 멀고 먼 이국 전선으로 떠났다.

 

  청룡부대 장병들이 떠나간 뒤 나는 그 동안 나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큰 짐덩어리를 벗은 듯한 느낌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무거운 짐이 다 벗겨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투손실에 대비한 보충병력을 계속 확보해야만 했고, 또 1년에 한 차례씩 파월해야 했던 교체부대 병력에 대한 특수교육을 계속 실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청룡부대의 결단시기를 전후하여 사단에서는 그 때까지 발생한 적이 없던 도망병이 발생하는 바람에 나로 하여금 그 대책에 부심케 했다. 물론 극소수의 인원이긴 했지마는 특수교육대가 설치되어 특수교육이 실시되면서 부터 발생하기 시작횄던 그 도망병 발생 요인을 은밀히 분석해 본 결과 과거 불란서군도 전멸을 당해 손을 뗀 그 월남 전선에 가게 되면 다 죽는다고 하는 그러한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고, 또 면회하러 온 사람들 가운데 도망을 종용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사단장실의 운전병과 부관실과 비서실에 근무하는 장병들을 보병부대로 전속시켜 파월을 자원케 하여 출전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한편, 자유민의 전우로서, 그리고 6·25 전쟁 때 자유우방국들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공산침략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유 월남 공화국을 돕기 위해 출전한다는 그 파월의 의의와 사명감, 그리고 불패 상승의 해병 정신을 제고하기 위한 정신교육과 정훈교육을 한층 더 강화하는 가운데 장병들의 출전의지를 북돋우어 줌으로써 자신의 공포심과 부모들의 종용에 따르는 도망병을 발생을 최단시일 내에 근절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바로 그러한 시기에 아들을 도망시키기 위해 도망갈 때 입고 갈 옷을 싸 가지고 면회하러 왔던 어떤 해병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로 부터 오히려 설득을 당한 끝에 몰라보게 씩씩하게 성장해 있는 그 아들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믿음직스럽게 여겨졌던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옷보자기를 손에 든 채 대대장실로 찾아가선 그 보자기를 끌러 보이며 도망갈때 입고 갈 옷을 챙겨 가지고 면회하러 왔다가 오히려 설득 당하고 간다는 말과 자기 아들을 그토록 믿음직스런 군인으로 키워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감으로써 고무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