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7. 해외특명
(1) 목적지는 이스라엘과 월남
내가 합참 전략정보국장으로 임명된 날짜는 1964년 2월 6일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 후인 5월 1일부로 소장으로 승진이 되었던 나는 5월 하순경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특별지시를 받고 약 4주간에 걸친 해외여행을 떠났다.
내가 방문했던 나라는 이스라엘과 월남 등 두 나라였다. 이스라엘을 방문했던 목적은 이스라엘 대사관의 서울 개설 문제와 관련해서 검토되어야 할 중동(中東)지구에 대한 객관적인 정세분석과 군사현황에 대한 상황판단을 하기 위함이었고, 월남을 방문했던 목적은 월남의 군사정세와 월남정부의 파병요청과 관련된 문제를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그러한 특명을 알고 있던 사람은 그러한 문제를 대통령과 직접 논의했던 김성은(金聖恩)국방장관과 김종오(金鍾五) 합참의장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 나와 동행하게 되었던 국방부 기획국장 장우주 소장과 나의 부관으로 수행했던 장시윤(張時潤) 소령(해병)등은 그들 자신의 감(感)에 의한 판단은 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극비에 붙이라는 윗분들의 지시에 따라 나 자신이 그들에게 그러한 말을 직접 한 적은 없었고, 또 출국하기 전 해병대사령관(金斗燥 중장)에게 보고를 할 예정이었으나 그 때 마침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보고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두 사람의 동행인과 함께 김포공항을 떠난 날짜는 5월 23일이었고, 1차 경유지는 동경(東京)이었다. 그리고 일행은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모두가 사복차림을 했고, 또 보도관제에 대한 조처도 취해져 있었다.
동경에 머물고 있던 기간은 약 1주일간이었다. 숙소인 오꾸라(大倉)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동안 나는 때마침 미국 시찰여행을 마치고 귀국 중에 있던 김두찬 사령관을 그 곳에서 만나게 되어 나의 출장용무를 설명해 드리고 공개치 말아 달라고 했다.
약 1주일간 동경에서 체류했던 나는 5월 30일 위장여행(僞裝旅行)을 위해 하네다 공항에서 홍콩으로 향했는데, 홍콩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 로비에 나온 나는 그 곳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을 겪게 되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혀 낮이 선 영국군 소령 한 사람이 나에게 거수경례를 하더니 '제너럴 강'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그렇다고 했더니 그 소령은 자신의 소속과 관직 성명을 밝히면서 영국 총독(英國總督)께서 오찬을 함께 하고자 장군을 모시고 오라는 분부를 받고 온 것이라고 했다. 그 소령은 영국 총독의 부관이었다.
한데 졸지에 그러한 일을 겪게 된 나는 내심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극비에 붙여져 있던 그 일을 영국 총독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흡사 수수께끼와도 같은 일을 당하고 보니 과연 듣던 대로 영국의 정보망은 대단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소령으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우리는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로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총독의 뜻은 고맙지만 사양을 하겠으니 총독에게 그 뜻을 잘 전해 달라고 했다. 가뜩이나 비밀이 샌 듯해서 마음이 편치도 않았지만 그런 곳에 가서 그런 정치적인 인물을 만났다가 또 무슨 소문이 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나로서는 그 총독의 초청을 그렇게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사양의 뜻을 표명하자 소령은 "장군께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요직에 계시다가 최근에 합참으로 전보된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공직에 있는 분을 어찌 사사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분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고 했는데, 그러한 말을 듣게 된 나는 내심 또 한 차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러한 의사를 표명하자 소령은 숙소가 어딘가를 물어 본 다음 기왕에 장군을 영접하러 나왔으니 숙소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기에 일행은 소령이 손수 운전해 온 영국제 승용차에 올라타고 숙소로 향했다.
그 때 내가 눈여겨 본 그 영국제 승용차는 옛날 영국 귀족들이 타고 다니던 그러한 형의 소형 승용차이긴 했었지만 운전기사석과 뒷좌석 사이에 유리로 된 방음벽(防音壁)이 설치돼 있을 뿐 아니라 에어컨 등 최신시설을 갖추고 있는 방탄차였다. 그리고 내가 승차하기 직전 소령은 앞뒤쪽 범퍼에 씌워져 있는 별판 가리개를 벗기고 있었는데 그 곳을 보니 빨간 바탕의 이성(二星)별판이 붙어 있었다.
한편 일행을 예약이 된 호텔까지 안내해 준 소령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잠시 통화를 하고 나에게로 다가오더니만 장군의 뜻을 총독 각하에게 잘 전했다고 말한 다음 "영국 극동군사령관께서도 장군이 오신 것을 알고 장군을 오찬에 초대하고자 하시니 사령관의 초대에 응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치인이 아닌 극동군사령관의 초청마저 사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초청에 응했는데, 극동군사령관과 인사를 나눌 때 6·25 전쟁 때 영국이 한국을 위해 많은 병력을 파병해 준데 대해 깊이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던 나는, 오찬도 함께 하고 극동지구의 정세에 관한 의견도 함께 나누는 등 비록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행이 홍콩에서 머문 시간은 이틀간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6월2일)아침 일행은 홍콩에서 이스라엘로 직행하는 항공기 편으로 이스라엘로 향했다.
당시 한국과 이스라엘은 국교는 수교가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대사관만은 설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사관이 설치되지 못하고 있던 요인은 유엔에 가입해 있는 아랍권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었고, 또 아랍권과의 석유를 중심으로 한 경제교류를 염두에 두고 있던 한국 정부의 조심스런 외교 자세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런 일로 아람권의 반발을 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한국 정부의 그러한 소극적인 자세와는 달리 유엔에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정부측에서는 약 3개월 전에 이미 한국에 주재시킬 대사와 대사관 요원들을 임명하여 동경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대기시켜 놓고 한국 정부의 대사관 개설을 촉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홍콩에서 이스라엘까지 가는 데는 약 20시간이 걸렀다. 장시간의 비행 끝에 항공기가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그 날 밤 10시경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보니 야간인데도 의장대가 도열해 있었고, 이스라엘군 총사령부 작전참모부장 바레브 중장(육군)을 비롯한 여러 명의 정부 및 군 관계 인사들이 출영하여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출영한 인사들과 악수를 교환한 나는 의장대를 사열한 다음 공항귀빈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동행 장교들과 함께 지중해(地中海) 해변에 있는 조용한 숙소로 안내되어 여장을 풀었다.
내가 이스라엘에 체류했던 기간은 6월 2일부터 9일까지의 8일간이었다.
그 기간 중 나는 이스라엘 정부의 외무성과 국방성을 비롯하여 이스라엘군 총사령부 등 주요 부처와 군기관을 방문할 수 있었고, 또 이스라엘군 총사령관과 작전 및 정보참모부장, 육해공군참모총장, 북부 중부· 남부군 사령관, 국방대학원장, 소년군사령관, 나할(국방수비대 겸 영농하는 군대)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국토방위 문제와 관련된 뜻있는 회의에도 참석하여 고무적인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지(聖地)를 비롯해서 주요 산업시설과 키부츠·나할 등의 공동방위촌락과 주요군사시설 등을 두루 시찰해 볼 수 있었던 나는 이스라엘의 접경지대에 있는 가자지구와 골란고원, 요르단강 지구 및 네게브 사막지대 등의 국제적인 분쟁지역도 시찰했고, 또한 바위산에 조성된 기적적인 녹화사업 현장도 목격했다.
한편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많은 인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는데, 그 많은 인사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감명 깊은 말을 했던 사람은 여성 각료인 골다 메이어 외상이었다.
나와 대담을 한 자리에서 메이어 외상은 이런 말을 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과거 2000년간 나라를 잃고 유랑했던 이유가 민족적인 각성과 단결력이 부족한 때문이었다고 말한 메이어 외상은 1948년 비록 뒤늦게나마 좁은 땅에 나라를 세워 살고 있지만 또다시 민족적인 정신이 해이해지고 단결력이 와해된다면 이번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배수(背水)의 진으로 삼고 있는 지중해(地中海)에 모두가 빠져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한국은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 매우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던 메이어 외상은 국민의 통일과 경제발전 및 국토의 방위가 이스라엘의 삼대(三大) 국가목표라고 했는데,「국민의 통일」이란 목표와 관련해서 장관은 이런 설명을 부연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과거 2000년간 중동지역을 비롯해서 구라파, 미주, 소비에트 연방, 아프리카, 동남아, 동북아 등 주의·사상과 종교·풍습 및 언어가 다른 여러 나라에서 혼혈을 하며 흩어져 살다가 돌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민족적인 단결심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주의(主義)·사상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가운데 정신적인 통일을 기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는데, 메이어 외상으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은 나는 국가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 국민의 일원으로서 매우 유익하고 가치있는 말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의 국토는 그 면적이 2만 698㎢이고 인구는 약 400만이 되는데 그 400만의 인구로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1억 아람권의 위협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갖추고 있는 그들의 군비(軍備)는 내가 느끼기에는 유비무환이란 말이 실감될 만큼 튼튼한 것 같았다. 특히 병역제도 면에서 이스라엘은 남자들만이 병역의무를 갖지 않고 여자들도 적령기가 되면 병역의무를 갖는 명설상부한 국민개병제도(國民皆兵制度)를 시행하고 있었고, 소년병제도(少年兵制度)와 예비군제도 등도 놀라울 만큼 잘 운용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로부터 유대인 이민(移民)들의 자위상(自衛上)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농업경영을 계승한 모샤브와 모샤바, 키부츠 등의 독특한 향토조직이 있는데, 그 키부츠에서 촌락방위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목격했던 나는 마음 속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협동촌락들은 공동방위를 위한 화망구성(火網構成)이 잘 되어 있었고, 부락민들은 모두가 개인화기를 각자의 에 보관하고 있어 전 국토가 요새화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키부츠에서 나는 키부츠 제도를 배우기 위해 이스라엘에 유학 온 예쁜 스위스 처녀들(대학생)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유학생들의 존재를 통해 나는 영세중립국이면서도 국토방위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스위스 국민들의 국방의식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방문기간 중 놀랍게 여겨졌던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목격했던 바위산의 녹화현장은 나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느끼게 했다. 암석지대를 계단식으로 만들어 그 곳에 30~40센티 두께의 흙을 부은 다음 그 곳에 풀과 나무를 심어 무성하게 가꾸어 놓은 그 놀라운 현장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기적적인 현장과도 같았다.
내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건국 후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관개사업과 함께 사막과 불모지로 돼 있는 국토의 20% 이상을 경작 가능한 지역으로 조성하고, 또 대대적인 국토녹화사업을 벌여 왔다고 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이스라엘정부는 서독 정부로부터 받은 8억 불의 전쟁배상금으로 1․2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이스라엘 민족의 희생자 수를 상징하는 6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되 그 나무들을 이스라엘의 미래를 지켜 나갈 이스라엘 소년군(少年軍)들로 하여금 심게 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6월 기온은 섭씨 30~40"를 오르내리는 더운 날씨였다. 우리 일행이 시가지를 다닐 때는 세단차를 제공해 주었지만 원거리에 있는 군사시설이나 키부츠 또는 이스라엘군이 배치되어 있는 국제적인 분쟁지역을 방문할 시에는 스리쿼터나 헬기 등을 제공해 주었고, 또 우리 일행이 어디를 방문하든지 이스라엘 정부 당국에선 항상 군의관과 간호장교 및 경비병을 수행시켜 만약의 경우에 대비케 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해 주었다.
8일간의 이스라엘 방문기간은 나에게 있어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을 만큼 매우 인상이 깊었고, 또 매우 유익했던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기간 중 내가 만나 보게 된 이스라엘 정부요인들과 군사지도자들은 모두가 국가관과 민족관이 투철한 인물들이었고,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는 아람권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사수해야겠다는 비장한 결의하에 조직적인 국가운영을 해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만난 인사들 가운데 외상이었던 골다 메이어 여사와 이스라엘군 총사령관 라빈 장군 및 국방차관 파레스 씨 등 세 사람은 후일 이스라엘 정부의 수상직을 역임했다.
내가 이스라엘에 머물고 있는 동안 두어 차례 만나게 된 골다 메이어 외상은 한국과 이스라엘 양국의 우호증진과 국익신장을 도모하기 위해 양국 대사관이 하루 속히 설치되기를 희망한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간곡한 의사를 표명하면서 그러한 뜻을 한국 정부 요인들에게 전해 달라고 했는데, 소극적인 외교를 지양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나는 그 뜻을 잘 전하겠다고 말하면서 방문기간 중 우리 일행을 위해 베풀어 준 친절하고 세심한 배려에 대해 깊은 사의를 표명했다.
이스라엘을 떠날 때 나는 국방성으로부터는 이스라엘 국민의 잔위성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제 자동소총 한 정과 작은 실탄상자 한통을 선물받고, 외무성으로부터는 히브리어와 영문으로 합본된 이스라엘 성서 두 권을 선물받았는데 그 자동소총은 귀국 후 박 대통령에게 보고를 한 다음 한동안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후일 해병대 기념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그 두 권의 성서 중 한 권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박물관에 기증하고 한 권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그 세 분의 수상 역임자 중의 한 사람인 라민 장군은 1966년 내가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나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해병대사령부에서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성대한 환영 리셉션과 만찬회를 베풀었었는데, 때마침 지방 순시 중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의전수석비서관을 보내어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그 날 라빈 장군은 1964년 내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나와 만났던 주요 인사들의 사인을 담은 조그마한 사인북을 나에게 전달했는데, 그 값진 사인북을 나는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후 라빈 장군은 1994년 12월 중순경 이스라엘 수상으로서 한국을 공식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라빈 수상과 나는 신라호텔에서 회동하여 친구로서의 우의를 나누었고, 한국 이스라엘 친선협회 임원들과 오찬도 함께 하고 기념촬영도 했다.
그 됫 얘기는 한국·이스라엘 친선협회를 소개할 때 언급하기로 한다. 그 사인북의 사인들 가운데 그 당시의 가장 저명한 인사들인 골다 메이어 외상과 다얀 국방상,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군 총사령관 등 세 분의 사인을 여기에 소개해 둔다.
8일간의 이스라엘 방문을 마친 나는 여행 스케줄에 따라 6월 10일 카이로로 향해 떠났다. 카이로에서 1박한 다음 태국(泰國)을 거쳐월남(越南)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 항공기가 텔아비브 상공으로 솟아오를 때 창문쪽 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기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이스라엘의 국토를 바라보고 다시 한 번 놀라움을 느꼈다. 상공에서 내려다 본 이스라엘 국토가 그 주위에 접경해 있는 다른 아람국들의 영토에 비해 두드러지게 녹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마치 황량한 사막속에 녹색 빛깔로 이스라엘 지도를 그려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암석지대에까지 나무를 심어 뿌리를 내리게 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의 그러한 의지와 노력, 그리고 바윗덩어리 같은 단결심이 있는 한 그들의 생존권은 영원히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내가 우정 카이로에 기착하려 했던 것은 아랍권과 이스라엘간의 분쟁문제 등에 관한 내 자신의 지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함이었다.
당시 카이로에 개설되어 있던 북한 대사관에는 무관(武官)을 포함한 60명의 직원이 상주하고 있었는데 반해 국교가 수립되어 있지 않던 한국은 북한의 압력으로 인해 그 곳에 진출해 있던 불과 10여 명의 영사관 직원들마저 이집트 정부들로부터 퇴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날 카이로에 기착한 우리 일행은 그 곳 한국 총영사관을 방문하여 현지 사정도 알아보고 시가지 관광을 위한 안내도 받았는데, 이집트 정부로부터 퇴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던 그 총영사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이러다간 발붙일 곳이 소멸되고 말겠다고 했던 그 말은 나에게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카이로에 있는 명소(名所)를 관광할 때 나는 대통령궁에도 가 보았는데, 그 때 총대를 끌어 안은 채 그 궁궐 성벽에 기대앉아 낮잠을 자고 있는 경비병을 목격했던 나는 이스라엘에서 목격했던 그 이스라엘 군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상(像)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카이로에서 1박한 우리 일행은 그 다음 날 방콕에 도착하여 로얄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 날 방콕 공항 로비에는 태국군 총사령부 작전참모부장(육군중장) 내외가 우리 일행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다른 목적 없이 기착한 곳이긴 했지마는 우리 일행은 그 다음 날 아침 준비해 간 군복으로 갈아 입고 태국군 총사령관을 예방한 데 이어 태국 소년단 본부로 안내되어 소년단원들의 사열도 받고 브리핑을 청취하는 등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일행이 방콕 공항에서 사이공 공항으로 향했던 날은 13일이었다.
그 날 사이공 공항에 도착하니 월남 해병대 의장대가 도열해 있는 그 공항 활주로에는 당시 합참의장으로 있던 티우 장군(후일 대통령 역임)과 월남 해병대사령관이 월남군 총사령부 수송감을 비롯한 몇몇 장교들과 함께 출영하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티우 장군이나 해병대사령관 등 다른 모든 장교들은 다 초면이었지만 오직 한 사람 월남군 총사령부 수송감(대령)만은 구면이었다. 언젠가(내가 해병대사령부 행정참모부장으로 있을 때) 그가 서울을 방문했을때 그를 한국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대접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공항에 도착했던 우리 일행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숙소인 사이공 영빈관으로 안내되었다. 헌병 백차와 사이드카들이 우리 일행이 탄 승용차를 에워싸고 시가지를 질주할 때 네거리의 모든 차량들이 정지를 당해 있을 정도로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고, 숙소인 영빈관에 대한 경비는 더욱 삼엄하여 경찰관과 헌병들이 2중 3중의 경비망을 펴고 있었다.
사이공 도착 당일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방문했던 곳은 주월 한국대사관이었다. 당시 한국 대사는 신상철(申尙撤)씨였다.
영빈관에서 1박한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신상철 대사와 함께 월남정부의 국방부를 방문하여 키엠 장관과 인사를 나눈 다음 상황실로 안내되어 브리핑을 청취했는데, 그 브리핑을 통해 나는 월남의 군사정세와 전황 등을 상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는 월남 해병대사령관의 초청을 받고 그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령관과 참모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런데 그 날 저녁에 초대된 월남 해병대의 만찬회 석상에서는 어부들의 풍어(豊漁)축제를 테마로 한 희비가 엇갈리는 흥미로운 무대 예술인들의 특별한 무대공연을 관람했는데, 그 무대공연을 넋을 잃고 관람하고 있던 나는, 체구가 왜소한 그 남녀 예술인들이 약 2시간 동안을 어떻게나 민첩한 템포로 율동을 하면서도 전혀 지칠줄을 모르고 움직이고 있는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즉 월남인들의 왜소한 체구와 체질을 처음으로 읽어 보게 되었던 나는 만약에 저들이 베트콩이 되어 정글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게 된다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었다.
사이공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 우리 일행은 티우 장군의 안내로 예의 그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차량 또는 헬기편으로 원근 지역에 있는 군 주둔지역을 시찰하며 브리핑도 청취하고 진지구축 현황과 부대배치 현황 등을 살펴보았다.
가장 위험했던 시찰지역은 공산군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메콩 델타지역이었다. 베트콩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그 델타지역에는 1개 여단의 월남군 정예 해병부대가 배치되어 독립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티우 장군과 월남 해병대사령관이 함께 동행했던 그 메콩 델타지역 시찰 때는 남방 차림으로 대형 헬기를 이용했는데, 그 헬기는 지상포화를 피하기 위해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고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던 일행은 여단장과 참모들의 영접을 받으며 브리핑도 청취하고 가까이에 있는 포진지도 살펴보았다. 완전히 고립이 된 작전지역,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월남 해병대 장병들을 대하고 보니 그들은 모두가 남이 해내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용감한 군인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그 고립된 메콩 델타지역의 월남 해병여단 진지를 시찰하고 그 날 사이공으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티우 장군의 안내로 인근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웨스트 모랜드 군수사령관(후일 주월미군사령관 역임)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시 초기단계에 있던 미국의 월남전 지원은 중대 또는 대대규모의 병력을 축차적으로 투입하여 월남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는 병력의 소모성이 초래될 우려가 있는 소부대 병력의 축차적인 투입방식보다는 대부대 병력의 집중적인 투입이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웨스트 모랜드 장군의 말에 따르면 전후방이 없는 월남전의 특성때문에 미군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한 말을 듣게 된 나는, 그간 각급 부대에서 청취했던 브리핑을 통해서 알게 된 베트콩에 대한 내 자신의 전술적인 능력 평가와 그 전 전날 밤에 관람했던 그 무대공연 때 문득 느끼게 되었던 그러한 느낌때문이었는지 언젠가는 은둔술에 능한 들쥐들과도 같은 베트콩들이 분대가 소대가 되고, 중대가 대대, 연대가 사단이 되어 나타나게 될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었다.
한편 메콩 델타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왔던 바로 그 다음 날 나는, 사전에 약조가 돼 있던 칸 대통령과의 회담을 갖기 위해 신상철 대사와 함께 월남군 총사령부를 예방했다.
집무실 밖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칸 대통령은 나를 보자자기 성(姓)도 강(姜-KHAN) 씨라고 말하면서 나를 포옹하며 반가워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대통령 집무실 옆방에서 수십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쏟아져 나오더니만 플레시를 터뜨리며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로서는 예기치 못했던 일이어서 정색을 하며 보도관제를 하기로 약조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칸 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후일을 위해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고자 할 따름이라고 했다.
회담의 내용은 월남 정부와 미국 정부에서 요청한 군사 지원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인사말을 전한 다음 본론에 들어갔던 그 회담에서 나는 월남 정부에서 원하는 지원 형태가 무엇인가를 타진했고, 월남 정부측에서는 내가 가지고 온 복안이 무엇이냐고 했는데, 결국 쌍방의 의중(意中)을 타진하는 데 그친 그 1차 회담에서는 내가 가지고 간 복안이 공병과 의료 및 테권도 교관단 등으로 구성된 비전투 지원단이란 사실을 밝히는 데에 그쳤고, 그러한 복안에 대한 의견을 묻는 말에 칸 대통령은 대단히 좋은 지원책이란 말로써 자신의 반응을 표시했다.
그리고 공식회담을 마친 자리에서 나는 그 전날 합참의장 티우 장군과 해병대사령관의 안내로 메콩 델타지역의 해병여단을 시찰하고 왔다는 말을 칸 대통령에게 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며 자신도 한번 가 보지 못한 그 위험한 곳을 어떻게 다녀왔느냐고 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신문과 라디오 방송에서 대한민국의 원조사절단(援助使節團)이 사이공에 도착했다면서 대대적인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을 시청하고 조심스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 당시 정치적인 elf레마에 빠져 있던 칸 대통령으로서는 국민의 사기를 고무할 수 있는 그러한 보도를 통해 그 어떤 정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차 회담은 그 다음 날 오후에 개최되었다. 그 날 오전 한국 대사관에 들렀던 나는 대사관에서 해독한 청와대에서 보내온 암호전문을 받아 보았다. 칸 대통령에게 전투부대의 필요성 여부를 타진해보라는 것이 그 전문의 요지였다.
2차 회담 때 칸 대통령은 전투부대의 지원을 요청할 필요성 유무를 타진한 나의 물음에 대해 만면에 희색을 띠우면서도 당장에는 그러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나 깊이 연구를 해 보겠다고 했는데, 자신의 정치적인 위상과 체면 때문에 그런 답변을 했는진 모르나 그의 그러한 답변은 그 당시 내가 칸 대통령의 얼굴에서 읽어 볼 수 있었던 내용 그대로의 답변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비록 결론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2차 회담을 마친 나는, 그 날 밤 키엠 국방장관과 티우 합참의장이 베푼 송별만찬과 무도회에 참석하고 그 다음날 사이공 주재 한국 대사관을 고별 방문하는 것으로 월남에서의 모든 방문일정을 마쳤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6월 17일) 동경을 거쳐 19일 귀국하게 되었고, 귀국하는 즉시 나는 이스라엘과 월남을 방문한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방장관을 경유하여 박 대통령에게 직접 제출했는데, 그날 저녁 나는 박 대통령과 대좌한 가운데 그 여행 중에 겪었던, 그리고 그 보고서와 관련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홍콩 공항에 마중 나온 그 영국군 소령 이야기를 했더니 박 대통령 자신도 수수께끼와 같은 일이라고 했고, 또 내가 이스라엘 방문기간 중에 들었던 다음 같은 얘기, 즉 이스라엘 여군 1명이 아랍군인 10명을 당한다는 말을 하자 참으로 놀라운 민족이라고 했다.
한편 내가 그 보고서를 통해 건의했던 것은 한국 정부가 그간에 지속해 왔던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대(對)중동(中東) 외교자세를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시켜야 할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나의 그러한 건의는 그 여행을 통해 내가 직접 견문하고 취득할 수 있었던 지식과 내 자신의 진지한 인식과 판단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내가 귀국한 지 불과 1개월도 채 못 되어 서울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개설되어 그간 일본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스라엘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이 서울에 와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한국 정부의 그와 같은 외적인 노력은 한국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외교자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처가 취해진 후 그 동안 이집트 정부로부터 퇴거 독촉을 받고 있던 카이로의 한국 총영사관은 오히려 발붙일 곳을 소멸당한 뻔했던 그 처지를 면하게 되었고, 또 그 해(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그 해 3월 한국을 방문했던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서독을 방문할 시에는 처음 예정했던 텔아비브를 경유지로 택하지 않고 카이로 공항에 기착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이집트 정부의 농림부장관을 공항 귀빈실로 보내어 박 대통령에게 화환을 증정케 하는 등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오히려 대(對)중동 외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했었다.
귀국 후 나는 이스라엘의 군사 현황을 소개하는 팜플렛(소책자) 한 권을 펴내어 정부 내의 각 부처와 각 대학 도서관, 관공서 등에 기증했는데, 그 책자 속에는 이스라엘의 정치제도와 군사현황, 예비군제도에 관한 자료 등이 내가 맺고자 했던 결론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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