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7대사령관 강기천

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2) 미 해병대 시찰

머린코341(mc341) 2015. 3. 11. 18:44

나의 人生旅路 - 9. 해병대사령관 시절

 

(2) 미 해병대 시찰

 

  1967년 9월이었다. 나는 미 해병대사령관 그린 대장의 초청으로 9월 초순경부터 하순경까지 약 20일간 미 해병대를 방문 시찰했다.

 

  나의 아내도 함께 초청을 받았던 그 시찰 여행에는 당시 진해기지사령관으로 있던 박성철(朴成哲) 소장과 비서실장 변용찬 중령 및 부관 여현수 소령 등 3명의 장교들이 동행했다.

 

  출국 당일(9월 2일)로부터 이틀간 동경에서 머물다가 9월 4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던 나는, 나를 출영해 준 샌프란시스코 미해병대 막사장(幕舍長)의 안내로 숙소로 제공된 호텔에서 1박하고 그 이튿날 아침 워싱턴으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 저녁 나는 미해병대의 협조로 내가 꼭 만나보고 싶어 했던 미 해병대의 옛 전우 한 사람을 만나 감개무량한 추억담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출국하기 전 사령부 수석고문을 통해 미 해병대사령부에 요청하여 상봉을 하게 된 그 첫 전우란 내가 해병 제1전투단 작전참모로 부임했을 때(1952년 6월 하순) 전투단 좌일선 지역에 있는 86고지에 전초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나의 건의에 대해 매우 좋은 아이디어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인 찬의를 표명하고 지원을 해 주었던 그 전투단 시절의 미 해병 고문관 섹스튼 중령이었다.

 

  대령으로 예편된 후 샌프란시스코 근교에서 가족들과 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던 그 섹스튼 씨는 그 날 오후 내가 숙소에 도착하기전 막사장의 주선으로 그의 부인과 함께 그 곳에 와 있었다.

 

  15년 만에 나와 재회를 하게 된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고, 한국 해병대의 사령관이 된 나를 만나게 된 것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그 날 저녁 섹스튼 씨와 나는 서로가 장만해 간 간소한 재회의 기념품을 교환하고 막사장이 베푼 만찬도 함께 하면서 장단지구 전투때 겪었던 그리운 추억담을 나누는 등 너무나 감회 깊은 해후의 시간을 가졌다. 그 날 섹스튼 대령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즉 그는 6·25전쟁 때 한국의 수도 서울을 방어한 장단지구 전선에서 KMC전투단의 수석고문으로 근무했던 그 일이 자신의 군대시절 가운데 가장 보람 있는 시절이었다고 말하면서 나의 건의로 전초진지를 설치했던 그 86고지가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박한 나는 그 다음 날 아침미 해병대사령부에서 제공해 준 사령관 전용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그 전용기는 덴버 공군기지에 잠시 기착하여 우리 일행을 출영해 준 기지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고 오찬을 함께 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하여 그 날 오후 앤드류 공군기지에 도착하여 그린 사령관내외의 출영을 받았던 나는 그 첫날 저녁 미 해병대사령관이 베푼 환영만찬회에 참석하여 한 미 해병대의 전통적인 우의를 더욱 돈독히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미 해병대 부사령관 차프만 대장의 안내로 알링턴 국립묘지를 참배하여 헌화하고 미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하여 브리핑을 청취하고 그린 사령관과 요담을 하며 한국 해병대의 장비 현대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군원문제와 한·미 해병대의 합동상륙전훈련 및 월남전 수행과 관련된 주요 현안 문제에 대해 진지한 의견을 교환했다.

 

  또한 그 날 낮 그린 대장과 오찬을 함께 하고 국방성을 방문하여 해군장관실을 예방했던 나는, 그 곳에서 폴 지나티우스 해군장관으로부터 미 합중국 정부가 나에게 수여하는 「리존 오브 메리트」(장관급 지휘공로훈장)를 받고 기넘 촬영도 했다. 그 자리에는 미 합참의장 무어 해군대장도 동석을 하여 훈장 수여식이 끝난 후 한국해병대에 대한 군원문제와 월남전 수행과 관련된 중요한 의견 교환을 했고,그 날 저녁에는 내가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 있을 때 혁명정부의 내각수반으로 있던 김현철 주미대사가 주재하는 환영리셉션에 초대되어 그 만찬회에 참석한 저명인사들과 교환(交驩)을 했다.

 

  그 만찬회장에서 나는 그린 대장과 함께 불과 수개월 전 쨔빈동에서 만난 적이 있었고, 또 워싱턴으로 귀임할 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던 전 주월 미 해병 제3상륙군사령관 월트 중장과 각별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는데, 미 해병대 부사령관 차프만 대장의 후임으로 내정되어 있던 그는 곧 대장으로 승진하여 부사령관으로 임명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워싱턴 도착 3일째와 4일째가 되던 날에는 나와 내 아내는 동행했던 장교들과 함께 시내 관광도 하고 교포를 방문하는 등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9월 9일에는 뉴욕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미 해병대사령관의 전용기가 뉴욕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 공항에는 수십 명의 미 해병대 장병들이 출영하고 있었는데, 도열해 있는 그 출영 장병들 가운데 나의 시선을 끌게 했던 사람은 70대의 고령으로 보이는 한 사람의 노장군이었다.

 

  비록 낡은 군복이긴 했지마는 정장(正裝)을 한 그 위에 비뚤어진 정모를 쓰고 있는 소장 계급장을 단 그 노장군은 퇴역 소장 크루리취(Krulewitch) 장군이었는데, 나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날 그 노장군이 공항에 나오게 되었던 것은 미 해병대사령부로부터 전갈을 받고 나(일행 포함)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여 환대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나와 맨 처음 악수를 나눈 그 노장군은 우리일행을 경관이 좋기로 소문나 있는 센트럴파크 바로 옆에 있는 자기 소유의 고층 빌딩으로 안내하여 그 빌딩 6·7층에 있는 살림집에서 그의 부인과 함께 성대한 오찬을 베푸는 등 극진한 환대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 날 공항에서 그 노장군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그의 빌딩(20여 층)앞에 도착했던 나는 그 빌딩 정문에서부터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마치 의장대가 도열해 있듯 통로 양쪽에 줄지어 서 있다가 나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사복 차림의 청장년들을 대하게 되있는데, 그 노장군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가 자기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미 해병대의 예비역 장병들이라고 했다.

 

  백만 장자로 알려져 있던 그 노장군은 퇴역 후에도 변함없이 모군의 발전과 전통정신의 발양을 위해 물심 양면의 헌신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고, 또 특히 6․25전쟁 때 미 해병대와 혈맹의 전우애를 맺은 한국 해병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리 깊은 분이라고 했다. 무척 존경스럽게 여겨졌던 그 노장군을 기억 속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분이야말로 영원한 해병상(海兵像)을 지닌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뉴욕에서는 도착한 그 날로부터 3일간을 머물렀는데, 도착 2일째인 10일과 11일 양일간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부터 수행 장교로 차출된 한 안내 장교(대령)의 안내로 시내 관광도 하고 링컨기넘관도 방문했다. 또 뉴욕시에 거주하는 교민 대표들과 총영사관 관원들 및 해병전우회 임원들의 방문을 받아 환담을 나눌 수 있는 모처럼의 시간도 가졌고, 특히 10일 저녁에는 롱아일랜드 대학교 학시(Hoxie) 총장이 베푼 환영 만찬회에 참석하여 매우 인상 깊고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학시 총장의 공관 정원에서 개최된 그 환영 파티는 약 300명의 각계 인사들이 초청되어 성황을 이루었는데, 그 파티는 바로 그 무렵 캐나다에서 개최된 세계교육자대회에 참가했던 학시 총장이 그 곳에서 회동하게 된 중앙대학교 임영신(任永信) 총장과 방미 중인 나와 나의 아내를 환영하기 위해 개최한 것이었다.

 

  롱아일랜드대학교와 중앙대학교는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들이었고, 또 그 전 학시 총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임영신 총장이 그를 해병대사령부로 안내하여 나와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교분(交分)으로 3자 회동이 가능했던 모처럼의 그 기회에 임 총장과 나를 환영하기 위해 그처럼 성대한 파티를 열게 된 것이었다.

 

  뉴욕에서 사흘간을 머물렀던 나는 12일 미 해병대사령관의 전용기 편으로 동해안 지역에 있는 미 해병대의 「캠프 리젼」으로 가서 휴전회담 때 유엔군측 수석대표를 역임한 기지사령관 부쳐 소장과 2사단장 심프슨 소장을 만나 부대현황도 청취하고 특히 월남전에 교체병력의 일부를 파견하고 있던 2사단의 특수훈련장과 각종 장비 등을 견학하고 시찰하는 등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도착 당일 기지 내 비행장에서 출영한 부쳐 기지사령관의 안내로 의장대를 사열했던 나는 기지사령부와 그 기지 내에 주둔하고 있는 2사단 본부를 차례로 방문하고 그 날 저녁에는 기지사령관 부쳐 소장의 초청 만찬회에 참석하여 한·미 해병대의 우의를 돈독히 했다.

 

  그 만찬회 석상에서 나는 과거 한국 해병대에서 개최한 각종 파티에서 만난 적이 있던 상당수의 낯익은 구면(고급 장교들)들을 대할수가 있었다. 그리고 방문 2일째인 13일에는 모처럼 망중한을 즐기며 기지 옆에 있는 골프장에서 골프도 치고 당구장에서 당구도 치며 하루 해를 보냈는데,그 사이 나의 아내는 기지사령관 부인과 2사단장 부인의 안내로 시내 관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캠프 리젼에서 LA로 떠난 날짜는 9월 15일이었다.

 

  LA에 도착했던 그 날 저녁 나는 오페라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고전적인 한 유명 음식점에서 베푼 요티(Yorty) LA 시장 부처의 초청만찬회에 참석하여 인상 깊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몇 사람의 교민대표들도 초대된 그 만찬회 석상에서 요티 사장은 근면 성실한 한국인들의 생활상과 생활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 후 한 차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던 그 요티 시장은 주한미국대사의 안내로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했었다.

 

  4~5일간 LA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나는, 한국 총영사관도 방문하고 교민들 대표와 해군·해병대의 예비역 장병들도 만났고, 연세대 동문회의 초청을 받아 동문들과의 우의도 나누고 환담도 했다. 그리고 디즈니랜드와 할리우드, 예술인들의 휴양도시인 팜스프링도 구경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편 귀국길에 들렀던 하와이에서도 나는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도착 당일 미 태평양지구 전구사령관과 미 태평양 함대해병대사령관이 따뜻하게 맞이해 준 호놀룰루 공항에서 미 태평양 함대해병대의 의장대를 사열했던 나는, 그로부터 이틀간 함대해병대사령부와 미 태평양전구사령부를 차례로 방문하여 브리핑도 청취하고 상호 관심사에 대해 요담도 하고 훈련장에 대한 시찰도 했다.

 

  즉 태평양 함대해병대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는 브리핑을 청취한데 이어 그 산하에 있는 각종 훈련장과 비행기지 등을 시찰했고, 태평양지구 전구사령부 방문 시에는 월남전 수행과 관련된 정책적인 논의를 하는 등 매우 유익한 요담을 했다.

 

그리고 그 이틀간 나는, 하와이 총영사관의 초청에도 응했고, 또 100여 명의 교포들이 베푼 불고기파티와 김치파티에도 참석하는 등 매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그 밖에 하와이에 체재하는 동만 나는 과거 미 태펀양 함대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3명의 미 해병대 퇴역장성을 그들의 가정으로 방문하여 구정을 나누었는데, 사전 연락을 통해 개별적으로 방문했던 그 세 사람의 퇴역장성들은 현역 때 나와 각별한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