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부사관 글/하교90기 김종훈

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 제7-2부 3연대 5대대

머린코341(mc341) 2015. 3. 29. 14:30

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제7-2부 3연대 5대대

73년 1월에 들어 3연대 5대대는 알파 대대로 다시 해안방어에 투입되었다.
나는 구룡포 중대와 왜 그리 인연이 많은지 세 번째 같은 중대로 이번에는 통신반장으로
중대본부에 배속되었다. 당시 52중대의 중대장은 해간37기 김효정 대위었다.
그 분은 동아대 출신으로 주월 한국군 태권도 장교로 용맹을 떨치신 분이며 크지 않은 키에
주먹이 엄청 커서 태권도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중대장이었다.

그 분과 근무하면서 많은 일화가 있는 데 그 중 한가지는 무단으로 전기를 중대본부까지
끌어온 사건이었다. 지금은 모든 해안초소에 전기가 들어오지만 당시에는 중대본부
인근 마을도 전기가 공급되지 않다가 그때 한전에서 전력공사를 막 끝낸 뒤였다.

하루는 중대장이 호출하여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는 데 우리도 전기를 끌어 올 수가
있느냐"고 물어와 문제는 "한전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니
책임질 테니 해보라고 하여 통신반원과 전화선 A품을 총동원하여 전주대에서 중대본부까지
무단으로 전기를 끌어와 TV를 시청하고 상황실을 대낮같이 밝힌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지금 같으면 위험하고 불법이라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었다. 


     
            <장기곶의 해돋이>                                                        <대보 등대>

구룡포 일대는 해안절경이 뛰어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때 나는 이 지역 유선수리작업을 하며 두루 다녔는데 북으로부터 구만리, 대보리, 강사리,
석병리, 삼정리, 구룡포, 하정리 일대가 그 곳이다. (맨 아래 사진 참조)

당시 구룡포항의 고래잡이 포경선의 귀항과 고래고기 작업은 장관이었다.
엄청 큰고래를 인양하여 삼국지에서 관우가 사용한 청룡도 모양의 큰칼로 고래를 썰어내는
작업 구경은 매우 흥미 있었고 이때 처음 고래고기 회를 맛보았다

그밖에도 동해안 꽁치, 골뱅이, 문어, 가자미, 해삼, 멍게, 소라, 성게 등 온갖 생선과
해산물을 맛보았으니 이때부터 나의 식도락은 시작된 것 같다.
83년 여름휴가를 구룡포 해수욕장에서 야영을 하고 그때의 맛 생각에 강사리 해안에 있는
회집을 들렸다가 후임 52중대장이었던 이화영 중대장을 그 곳에서 재회하여
가자미회에 소주잔을 비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혹시 기회가 나면 꼭 다시 가고싶은 곳이 바로 강사리 해안의 회 집인 데
해안바위에 부딪혀 깨어지는 흰 파도를 바라보며 회 한 접시에 기울이는 소주는
온갖 세상사를 잊게 하는 추천할 만한 곳이다

     

                    <구룡포항>                                              <구룡포 해수욕장>

이때 227기 손길호 해병이 전역하여 얼마 후 편지가 왔는데 부산에서 택시기사로
사회 첫 발을 시작하였다고 하며 그의 집은 부산 동광동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손 해병이 생각나는 것은 그가 선임이지만 어려운 야간 유선수리 작업을
도맡아 했으며 종종 집합 시 RC-292 안테나 연결봉 밧따에도 내색하지 않고 통신반을
잘 이끌어 주었다. 지금은 50이 훌쩍 넘어있을 손길호 해병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고싶다.

그 당시 통신반원들은 해안 유선작업수리에 애를 먹었다.
해안 특성상 밤이 되면 전화선에 바다안개(해무)가 끼어 전화감도가 떨어지고 불통되는
경우가 빈번하여 긴급상황이 밭생 되 면 칠흑같이 어두운 해안을 헤매며
야간작업에 투입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간에 중대 교환 2명을 남겨놓고
매일 중대 관할지역의 유선수리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때 보급 반에서 점심식사용 쌀을 수령하여 TA-1 전화기 통에 넣고 작업하다
점심 식사시간이 되면 인근 민가를 찾아가 밥을 해달라고 부탁하면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뜨거운 밥을 지어주고 반찬을 내주어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밥맛이란 중대 주계에서 타온 밥과는 비교가 되질 않아 우리 통신반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간 유선수리 작업이었다.

괴롭고 즐거운 해안생활도 순식간에 지나가고 해안방어 교대가 되면 모든 대원은
즉시 철수하지만 각 중대 통신반장은 해안유선 인계인수를 해야 되는 데
이를 위하여 보통 1주간 현지에서 잔류하게 된다. 이때에는 인수자가 갑의 입장이고
인계자는 을이 된다. 따라서 인계자는 인수자에게 중대 관할 전지역을 데리고 다니면서
현황 파악과 재고 상황을 체크해준다.

그러다 보니 우리수준에 맞는 적당한 접대도 빠질 수 없는 관행이 되어 있었다.
접대라야 생선회에 소주 한 두 병이지만 나도 인수 시에는 접대를 받았으나
인계 시에는 접대를 하는 입장이다.
그래도 이 기간이 해병대 생활 중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누구하나 간섭하는 상관도
선임도 없는 기간이고 해안 민가에서 신세를 지고 그야말로 완전해방의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저녁만 되면 구룡포, 대보리 민가에 머물며 낮 익은 마을 처녀들과
밤 가는 줄 모르고 데이트를 즐겼다. 한편 본부 통신대에서는 빨리 인계 인수를 끝내고
귀대하라고 불호령이지만 하루라도 귀대를 연기하려고 온갖 이유를 들어 인계인수가
늦어진다고 보고하고 해안에 지체하던 기억이 새롭다.

 


73년 이른봄 떠나기 싫은 구룡포 해안중대의 통신반 인계 인수를 끝내고 귀대하였다.
그것이 포항사단에서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해안방어었다. 그후에도 토요일 외출외박 시에
구룡포 해안과 대보 등대를 종종 찾아가 훈련과 내무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부대로 복귀한73년 봄부터 74년4월 전역 시까지 그야말로 교육과 훈련의 연속이었다.

통신반 자체교육, 대대, 연대훈련이 계속 되었으며,
그해 여름에는 수색훈련이 제일 힘들었지만 기억이 남는다.
각종 수색훈련을 도구해안에서 받고 최종과정이 야외수색훈련으로 도구해안에 상륙하여
목표지점을 찾아가 가상훈련을 하는 3박 4일간 양포, 구룡포, 한달배 지역을 밤낮없이
다닐 때 얼마나 더위와 씨름을 하고 배고프던지 팀장으로 팀원들과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고 밤이면 주머니를 털어 인근 주막에서 사온 막걸리 파티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자 낙이었다.

훈련이 끝나면 긴 내무생활이 시작된다.
중대 하침(하사관 침실)의 생활은 그야말로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당시 해병하사들은 고참들이 워낙 많아 입대 2년이 넘은 하교90기인 나의 후임으로는
91기부터 96기까지 6명 정도이고 20여명 넘게 선임들이 즐비하다 보니
매일저녁 순찰하사 근무가 주어지고 하침 집합이 있는 날에는 온 중대가 쥐 죽은 듯
조용하였다.

당시 하침의 집합은 단기 7차인 통신반 태춘식 하사와 하교 41기인 81mm 이모하사가
주도하였는데 50자, 60자 하교부터 기수 빳다가 시작되면 1시간이 넘게 진행되다
나의 앞 기수인 88기에서 끝이 났다. 빳다에는 이골이 났지만 셀 수도 없는 5파운드에
시달린 나는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

그 당시 집합은 제일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집합 보고를 위하여 기수별로 도열해 있는
몇 분간은 그야말로 어디론지 도망치고 싶은 긴장과 초조함이 휘몰아치는 순간이었다.
집합장소는 집합을 몇 자 하교가 하느냐에 따라 달랐다. 앞에서 처럼 최고선임이하면 하침,
60자 이하가 하면 중대 맨 끝에 있는 공용 화기실 이었다.

윙윙 요란한 바람을 일으키는 106mm 꼬질대, 소리는 없고 둔탁한 LMG총열, 딱딱 소리가
좋은 5 파운드, 임팩트 효과의 통신반 RC-292 안테나 연결 봉, 그런 공포의 연장들은
사정없이 나의 엉덩이를 강타하였다. 지금은 하침도 폐쇄되고 중대에 하사관들도
화기반장 외에는 일반 병들로 분대장 직책을 수행하고 13명의 분대 화력조도 축소 운영하고
그 전 같이 하침도, 집합도 없는 민주화된 해병이라니 시대의 흐름과 변화는 막을 수 없지만
어딘지 해병전통과 전투력이 약화되는 것은 아닌지 나의 좁은 소견으로 우려가 된다.

당시의 집합은 대개 빳다(구타)로 끝이 났고 오늘날 현실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나의 관습이며 일반화 되어 있었다.
하사관 나아가 장교사회에서도 존재하였다. 구타는 나쁜 것이다.
그러나 부대지휘와 통솔과정에서 완벽할 수 없으며 이럴 경우 선임으로부터 지적과 주의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도 매번 집합 시 구타가 수반된 것은 아니며
주위 환기도 많았다.

사실 통신 내무 반장직을 수행하며 나도 많이 통신반원들을 기재실로 집합시켜 훈계와
체벌을 가했다. 집합의 이유야 뻔한 것이지만 어쨌든 반장으로 50여명의 혈기왕성하고
거친 팔도의 해병들을 장악하고 부대생활을 하려면 피할 수 없는 방법이었으며,
그때마다 제일 밑에 있는 어린 신병들이 긴장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며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반원들을 대하였다.

그래도 당시에는 그 많은 집합과 체벌에도 오히려 부대통솔과 내무생활에 인간미가 있었다,
나의 경우 전역하는 해병들과 마지막 인사 시 나에 대한 감정보다는 사나이로서의 의리와
전우애를 나누었다, 하사관은 내무반원을 감싸고 보호하며 그들과 희노애락을 같이하였으며
해병들은 하사관에 대하여 오늘날과 다른 복종과 권위를 존중하였다

"로마인의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저)에서 로마군단이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최일선 전투 단위조직인 백인 대장(분대장)의 지휘 통솔력이 뛰어났고,
그들이 지휘관 회의에도 참석하는 신분보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과거 독일,일본 군대도 이와 같았고 미군들도 직업 하사관 제도의 정착이
강한 미군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 유명한 "지상에서 영원으로" 영화에서
진주만 공습 시 보여준 중대 선임하사의 활약상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해병 하사관 학교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진정한 해병대의 위상과
강한 군대가 되기 위하여는 하사관들의 역할이 중요하고 이렇게 중요한 분대장 제도가
변화되었다는 현실이 우려가 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해병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3군 모두 해당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내가 근무할 당시에는 미 해병대의 훈련 규범(COI), 규칙( SOP)이 준용되고 있어,
모든 교육훈련이 미 해병대와 같이 하사관단에 의해 주도되고 전투 편제도 증강된 부대로
운영되었으나, 최근에는 예산 절감의 명분으로 모든 것이 축소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모든 원인은 독립된 해병대 사령부의 부재로 인한 현상일 것이다.

<제7-3부로 계속>

[구룡포 지역의 자연 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