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부사관 글/하교90기 김종훈

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 제7-1부 3연대 5대대

머린코341(mc341) 2015. 3. 29. 13:51

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제7-1부 3연대 5대대

5대대의 해안방어가 거의 끝나는 어느 날 포항일원에 집중호우가 며칠간 계속되었다.
인근 해안지역에 육군 통신 싸이트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 데
이곳의 방어용 지뢰가 유실되어 상당 수가 떠 내려와 수거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때 소초 분대장인 하교 78기 김모 하사가 지뢰 한 개를 수거하여 처리과정 중 폭발하여
두 손이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되었다.

중대가 발칵 뒤집어지는 소동이었다. 사고 당사자는 월남 참전 분대장으로
사지의 전쟁터에서도 무사히 귀국하였는 데 해안방어 중 안전사고를 당하여
두 손이 절단되는 불행한 일을 당하였으니 오죽이나 애통하였는 지
그날도 비바람은 계속되어 포항사단의 긴급 후송용 헬기도 오지 못하고 도로마저 유실되어
구룡포를 경유하여 사단병원까지 도보로 후송한 기억이 난다.

해안 철수 후 포항병원으로 그를 면회하여 위로하였는 데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자세로 투병생활을 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고 얼마 후 그는 전역하였는 데
당시 대전이 집이었던 하교78기 김모 하사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대보 장기곶 등대에서의 해안방어는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현장이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곳에서 연이어 두 번의 해안방어를 보냈기 때문이다.
대보는 지도상에서 보듯이 동해에서 영일만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장기곶 등대는
국내 최대의 등대로 지금도 등대 박물관이 소재 하는 관광명소이며,
해안지대가 수많은 암반으로 구성되어 해산물이 풍부하여 제주해녀들이 이곳까지 와서
현지해녀들과 해산물 채취 작업을 하였다.


<대보 등대와 장기곶 등대박물관의 현재 모습>

이러한 지리적 환경으로 나는 이곳에서 해녀들에게 본의 아니게 얼굴이 알려져
그들과 가깝게 지내며 전북, 해삼, 성게, 문어 등 온갖 해산물을 즐기는 행운과
동시에 이들과의 데이트도 심심치 않게 즐겼으며, 동네의 애 경사에도 초청을 받아
마치 지역유지 행세를 하였었다.

그 중 한 처녀와의 사귐은 해안방어 귀대 후 전역 시까지 지속되었는 데
구체적인 사연은 그녀를 생각해서 밝힐 수는 없지만 아무튼 지금은 중년의 부인이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헤어질 때 우수에 찬 그녀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런저런 사유로 포항 특히 대보는 나의 젊은 시절의 잊지 못할 곳이며
그 후 전역하여 9년후 83년 여름휴가를 집사람과 같이 구룡포, 대보, 강사리, 석병리 일대를
찾아보았으며 언젠가 시간이 나면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을이다.

그해 장기곶 등대 소초에서의 기억나는 일은 태풍 후 해안에서의 멸치 잡기와
오징어 말리기다. 멸치는 원래 앞으로만 가다가 해안에서 방향을 선회하는 습성이 있다.
태풍이 지나간 후 파도가 높으면 멸치가 해안가로 이동하는 데
이때 개인용 모기장을 2명이 들고 멸치를 뒤에서 해안가로 몰면
그야말로 모기장이 찟어질 정도로 멸치를 잡아 올렸다.
이렇게 잡은 멸치는 즉석에서 금복주 소주 안주로 별미의 횟감이었다.

남은 멸치는 소초 옆의 바위에 자연 건조시키고 두고두고 부식 겸 안주로 조달하였다.
오징어는 그 당시 대보항에 이른 아침 만선으로 귀환하는 고깃배에 바케스를 들고 가면
인심좋은 어부들한테 가뜩 얻어 오징어회로 먹고,
남은 것은 철조망에 말려 다 건조도 되기도 전에 먹었으니 요즘의 반축이 바로 그것이었다.

해안방어를 끝내고 귀대하여 또다시 긴 사단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3연대 5대대는 신설대대라서 월남귀국자와 신병들로 구성되었으며
통신반도 절반이 귀국자와 신병이 주축이되어 내무생활을 하였다.
이때 내무반장은 하교 68기인 유지창 하사로 고향이 금산이었다. 그는 성격이 부드러웠으며
정이 많고 월남 귀국자로 내무생활을 화목한 분위기로 조성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가수 정미조의 노래를 즐겨 불렀었다. 그리고 하사 최고참은 단기 7차로 기억되는
서울 중앙고 출신의 태춘식 하사로 조그만 키에 인정 많고 사리판별이 명쾌한 선배로 기억된다.

이때 약 50여명의 통신반원은 성이 30여 개가 될 정도로 전국 팔도의 해병들로 구성되고
밤이 되면 이곳 저곳에서 한바탕 소란이 매일 지속되어 거친 사나이들의 혈기를 자제하기가
매우 힘들었으며, 서울 출신의 문취병인 232기 노모해병은 어찌나 몰개월 대포집 아가씨를
좋아했는지 그가 없으면 몰개월에서 찾아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같으면 당장 탈영보고를 할 사건이었다.

기억나는 해병으로는 부산 출신의 225기 손진화 해병, 227기 손길호 해병이 생각난다.
그들은 동향 출신의 월남 귀국자로 정분이 매우 두터웠으나, 저녁 자유시간이 되면
한 잔술에 같이 취하고 종종 심한 몸싸움도 하여 내무반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손길호 해병은 내가 73년 1월 구룡포 중대 통신반장으로 배속될 때 같이 근무하다
그곳에서 전역하여 부산에서 택시기사로 사회 첫발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있다. 혹시 아는 선 후배님이 있으면 연락주기를 부탁합니다.

 


72년 가을, 겨울의 포항사단은 매우 분주하게 계속되었다.
오천 사격장의 사격훈련, 대대 TTT훈련, 야간 100리 행군, 매일같이 무장구보,
숨 돌릴 수 없이 훈련의 연속이었다. 훈련의 과정에서 유일한 낙은 외출, 휴가 날짜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해 10월 그 유명한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이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운 좋게도 나는 투표를 위한 특별휴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투표권이 있는 해병은 내무반에서 1/4정도였다.
지금 같으면 부재자 투표로 실시되지만 당시 갑자기 실시된 국민투표라
휴가비에 3박4일 특박을 받고 포항사단을 출발한 나는 중앙선 야간열차로 청량리역까지
가기 위해 영천 역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포항사단의 후배해병들은 휴가 시 포항공항에서
대부분 휴가를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당시 영천 역에는 우리 포항 해병들이 이용하는 단골 주막이 있었는데
상호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해병 주막이라 불렸던 이곳을 청량리 행 해병들 모두가
이용하였는데 주인 할머니가 휴가 해병들을 위하여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다.
밥값, 술값, 그리고 아가씨 팁이 부족하고 없으면 연대 별 외상장부에 적어놓고
귀대 시 후불하고 귀대는 경우가 허다 하였다.
이 집을 들어서면 사단장, 각 연대장 감사장이 요란하게 벽을 장식하고있었는 데
지금 생각해도 낭만과 인정이 풍요로운 먼 추억의 이야기로 다시 한번 찾아가고 싶다.

심야의 중앙선 열차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당시 중앙선 군용열차는 육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10여명의 해병들이 열차한칸을 전세내어
여행을 한 기억이 난다. 승차한 육군헌병이 제발 육군들을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여행할 것을
부탁하였지만 영천 역전 해병 주막에서 국밥과 막걸리 주전자를 비우고 아가씨들과 한판
멋들어지게 놀아난 우리는 그야말로 우리 세상인양 청량리에 도착하는 이른 아침까지
열차 내를 휘어잡고 다녔다.

청량리역에 도착하면 당시 역전 앞 대왕코너에서 해장국과 막걸리 한잔으로 속을 달래고
귀대 시 청량리역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각자 고향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는 청량리역에서 그들과 다시 재회하지 못하고 나 혼자 귀대하게 되었다.
너무도 짧은 특박 기간이라 친구들과 명동, 용산일대를 돌아 다니다 귀대전날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타지 못하고 귀대 당일 아침 용산에서 경부선 완행열차에 승차하였다.

이때에는 일반열차 기차표를 사야하는 데 열차비용을 절약한다고 안양 역까지 승차권을 구입,
탑승하고 동대구 역에서는 소화물 취급 사무실 옆을 지나 역을 유유히 통과하였다.
지금도 자주 새마을열차를 타고 동대구 역을 통과하는 데
그때마다 30년 전의 무임승차의 동대구 역사 기억이 아련히 생각난다.
그때 철도청에 진 빗을 조금이나 갚기 위하여 지금은 철도회원에 가입하여
기차를 이용한 출장, 여행을 자주 한다

이 당시 특기 할만한 해괴한 일이 있었다.
해병들의 전역명령 하달에서 지금 같으면 도저히 상상 못할 일로
같은 기수 해병들이 군번 순으로 3번에 나누어 전역하는 해프닝이 바로 그것이었다.
225기 같은 경우, 동기생들이지만 선임군번은 224기와 같이 전역하고,
1개월 후 중간 군번해병, 또 1개월 후 후임 군번해병들이 전역하는 현상이 발생되었다.
그 사유는 월남 귀국자들로 인한 유휴인력의 발생으로 조기전역을 실시하다 보니
동기생 중 군번이 늦은 해병들은 2개월 더 복무룰 하게되는 기막힌 현상으로
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전역파티를 하면 끝에 가서 난장판이 되곤 하였다

<제7-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