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이 된다.
제7-3부 3연대 5대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해병대 체육기금에 대해서 회상해 본다.
당시 사령부 해체 전에는 해병대의 축구단, 야구단이 운용되고 국내 실업리그에 출전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해병대의 사기를 북돋았다.
현재, 프로야구계의 쟁쟁한 감독들이 해병대야구단 출신인데 두산 김인식, SK 강병철,
전 한화 이희수, 해설가 김소식, 전 삼성 정동진, 우용득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스타들이
해병대를 거쳐갔다.
그러나 당시 해병대는 운동부 운영예산이 항상 부족하여 이를 조달하기 위하여 하사부터
사령관까지 매월 봉급의 1%를 체육기금으로 각출하였다. 당시 단기하사의 봉급이
임관 당시 71년 11월에 3,400원 이었는 데, 봉급명세서를 보니 체육기금이라는 공제내역을
처음보고 의아하여 선임에게 물어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사령부 해체 후 더 이상 체육기금을 공제하지 않았다. 즉, 모든 운동부의 해체로
축구부, 야구부가 해군과 공군으로 전출되는 기막힌 역사를 갖고 있으니 사령부 해체는
해병대의 위상과 이미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모른다.
알량한 해병대원들의 봉급에서 각출한 체육기금을 보조받아 운영된 각 운동부는
정말로 해병대의 명예와 대원들의 바램을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해병정신으로 싸워
우수한 성적을 올렸으며,
육군과의 야구시합은 당시 최고 인기경기로 서울 운동장 야구장(지금의 동대문구장)은
항상 만원이었고, 빨간 모자, ROKMC의 로고, 빨간 언더샤쓰, 빨간 스타킹에 매료된
여성 팬들이 ROKMC를 연호 하였다.
현역시절에 나는 야구장을 한번 가보았는 데 그때의 함성과 환희는 잊을 수 없으며
최근에는 고등학교 야구대회 때 모교응원 차 동대문구장을 가끔 갈 때마다
30여년 전의 ROKMC야구부 모습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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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긴장하고 힘들고 괴로운 하침 생활과 내무생활은 73년 10월 해병대사령부 해체와
더불어 조금은 개선되었다.
그것은 해군통합 이후 5호봉이상 하사들의 영외 거주가 허락되어 고참들이 일과 후 대부분
오천 일대 거주지로 퇴근을 하다보니 영내거주 하사들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탓이었다.
여기서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된 73년 10월 전후의 국내정세와 포항사단의 분위기를
회상해 본다.
사단의 각 연대, 직할부대 모두 술렁대고 사기가 저하되어 분위기가 썰렁하였다.
매일 저녁이면 여기저기서 술판이 벌어지고 사령부 해체를 한탄하고 아쉬워했다.
이때 사령관은 이병문 대장이었으며 해체 명분은 국방비 절약을 내세웠지만 해병대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세력에 의해 주도된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훗날 여러 가지 객관적인
정황이 뒷받침이 되었다.
그 당시 해병대는 타군 특히 특전사로부터 경계와 질시를 받았는데 미국의 국방정책
즉, 주한미군의 감축과 군원의 감소로 인한 국방예산 절감 방안으로 나온 것이
해병대사령부 해체이었다.
그러나 해병대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그것은 5.16혁명 시 본의 아니게 해병대가
혁명의 선봉부대 역할을 수행하면서부터 우려와 질시의 경계대상으로 부각되어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5.16혁명 당시 해병대 고위간부였던 어느 분이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해병대는 2선에서 혁명을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 데
그것은 만일 해병대가 1선에서 역할을 수행할 경우 혁명이 성공해도, 실패해도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을 예상하여 혁명의 선봉이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봉부대로 되어있던 공수부대의 출동이 지연되어 결국 김포 해병대가 제일 먼저
한강 인도교를 통과하여 혁명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어 그 분의 말대로 해병대는 자의든
타의든 보이지 않는 부담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를 걸어온 대한민국 해병대는 결국 73년 10월 불행하게 해체되어
29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으니 80만 우리 해병 전우들은 완전 독립의 사령부 복원을
언제까지 지켜만 볼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ROKMC의 옛 명예회복과 위상정립을 위하여 힘을 모으는 방법을
찾아야 될 것 아닌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미국 해병대도 200년 역사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고 오늘의 미국 해병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고 형식적인 사령부 운영체제에서 명실상부한 인사, 예산의 독립이 확보된
해병대사령부 복원을 위하여 우리 모두 힘차게 나가자 해병대를 부릅시다.
호랑이 없으면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말이 있다. 그 당시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5호봉 이상 하사들이 일과 후 썰물처럼 영 외 거주지로 빠져 나가니 통신내무반 선임 3명도
오천 일대에 방을 구해놓고 출퇴근을 하였다.
73년 여름부터 통신반 내무반장을 맡아오던 나는 일과 후에는 영내 생활을 주도하였다.
영외 거주가 시작되면서 포항사단의 분위기는 안정이 되고 특히 고참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근무하여 각 부대 내무생활이 종전에 비하여 활력이 살아났다.
그해 늦여름 어느 날 나한테 오천 파출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사단의 전화는 다이알 전화기이었는데 인근 파출소에도 사단 전화가 연결되어있었다.
궁금히 전화를 뱓으니 구룡포 아가씨가 면회를 온 것이다. 과업 종료 후 외출증도 없이
퇴근 하사관에 섞이어 대대 닷찌 차에 탑승하고 오천 남문을 통과하여 부대를 나왔다.
사복으로 갈아입기 위하여 81mm 이 반장 자취방에서 작업복을 벗어버리고
사정없이 큰 남방과 바지 한 벌을 빌려 입고 오천 파출소에서 그녀를 만나
그날 밤을 오천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 총 기상 시간을 앞두고 다시 이 반장 집에 들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대대관할 경비초소인 PS판을 열고 부대에 복귀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의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그런 분위기가 만연되었고
특히, 하사관 영외 거주 전 에는 고참하사들과 PS판 담장을 무단으로 넘어 인근 주막에서
밤을 새우고 총 기상 전에 귀대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그러다 보니 순찰 헌병들의 단속이
심하여 잘못되는 경우 종종 헌병대 신세를 지는 경우도 다른 중대에서 발생되었다.
매달 말이면 전역하는 해병들을 위하여 전역파티가 있었는 데 통신반은 기재실이 아주 좋은
파티장소로 이용되었다.
어느 월말 230기전후의 전역파티에서 사고가 발생되었다. 241기(?)인 전남 해남 출신의
이태현과 경남 김해 출신인 문재홍(정확한 이름인지 기억이 않됨)이 다투다가 이태현의
앞니 3개가 뿌러지는 사고가 났다. 문재홍이 다투다 던진 캔통 컵에 이태현이 정통으로
얻어 맞아 순간적으로 발생되었다
다음날 아침 선임하사관, 통신관에게 보고를 하고 자체수습을 위하여 문 해병의 고향인
김해로 향했다. 그의 집에 도착하여 문 해병 부모님에게 사고경위를 설명하고
조용히 해결하기 위하여 피해자의 치아를 수리해 주는 것과 이에 대한 부모님의 선처를
부탁드리고 나서 치료비를 마련하여 귀대한 일이 기억난다.
요즈음 같으면 단순 구타도 엄하게 처벌하는 상황에서 중대장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내무반장인 나의 선에서 해결하였으며, 이때 피해자였던 이태현 해병에게는 솔직히
미안하였다.
이태현 해병은 구룡포 해안방어 시 나와 근무하며 어려운 임무수행을 도 맡아한
책임감이 있는 해병이었으며, 전역 후 79년 5월경 부산 출장 시 부산에 산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은 기억이 나며 수산업에 종사하였는데 지금껏 소식이 없어 궁금하다.
사령부 해체 후 사단의 분위기는 급변하였다.
부대 명칭이 해병0000부대에서 해군0000부대로 간판을 바꿔 달고 사령부 등의 유휴 병력이
대거 포항으로 배속되어 새로운 연대가 창설되었다.
제7연대가 창설되어 3연대 5대대는 7연대 2대대로 배속되어 부대이동을 하였다.
나는 다시 7연대 생활을 시작하였다.
<제8부 7연대 2대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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