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30 ) 짧은 인연
월남 여인을 그린 국보급 벽화
1969년 1월 하순.
이제 귀국선을 타고 그리던 고국으로 다시 돌아 갈 날도 며칠이 남지 않았을 때였다.
내가 다낭 헌병파견대 홍 하사를 따라 안내 되어 간 곳은 다낭 시내의 어느 조그마한 술집이었다.
너무 캄캄하면 누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출입구부터 환하게 불을 밝힌 술집은 그 내부도 별로 어둡지는 않았다.
모두 해야 테이블이 네 개 밖에는 안 되는 술집의 카운터에는 이미 덩치 큰 미군들 세 명이 반쯤을 차지하고 있었고 우리는 좁지만 오히려 테이블 보다는 미군들의 옆자리가 나아 보여 잠시 미군들과 눈인사를 하고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카운터 안쪽에는 머리가 희끗 희끗한 나이든 월남 남자가 하얀 반소매 와이셔츠를 입고 깨끗한 차림으로 우리를 반겼다.
홍 하사는 그 노인에게 마치 아래 사람에게 말을 하듯 한국말로
“야, 너 네 마담 어디 갔어?"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카운터의 노인은 미소를 띠우며
“와. 와”하고는 손으로 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아마 곧 올 시간이라는 제스처 같았다. 우리는 먼저 스크루드라이버 두 잔을 시키면서 내 것은 오렌지 주스를 좀 많이 타달라고 주문을 했다.
우리는 서로 이런 저런 얘기를 해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잠시 조용해지던 홍 하사가 잔을 기울여 몇 모금 마시 더 마시더니 내 귀국 준비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장님, 귀국 준비는 잘 하셨습니까?”
“뭐 전쟁터에 온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가는 것만도 감사해야지. 소총 소대 장들은 넣고 갈 것이 없어 주로 씨레이션이나 넣어 가는 것이 고작인데 그래도 소총 소대장들 보다야 낫겠지”
홍 하사는 안심이나 한 듯 잠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나도 처음엔 귀국 준비라는 것이 소총 소대장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옆에서 보고 있던 수사과 정 상사가 내가 모르는 사이 수사관 모두를 불러놓고 그 동안 여러모로 애써 온 과장을 위해 각자가 분담을 하여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선동을 하여 그래도 꽤 값진 선물들이 모였었고 나는 나름대로 매우 고마운 마음으로 C형이라는 베니어로 짠 나무 박스 한 개와 조금 더 큰 B형의 베니어 박스 하나를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27중대로 막 새로 부임한 중대장 박 대위 선배께서 보낸 한 개의 샌드리 팩과 뜻 밖에도 수송 참모께서 보낸 또 한 개의 샌드리 팩이 무척 고마웠는데 특히 27중대에는 당시 중대장은 물론 모든 대원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느끼기도 했다.
원래 샌드리 팩은 일개 중대 대원들이 나누어 가지는 이름 그대로 잡다한 일용품이 들어 있는 정육면체 모양의 큰 박스였는데 씨레이션 백 박스 당 한 개 정도가 들어 있는 매우 인기 있는 이름 그대로의 잡화품 박스였는데 그 속에는 우선 담배가 10보루, 비누가 100장, 카라멜 , 편지지, 볼펜, 치약, 칫솔, 드롭프스, 초콜릿 등 매우 유용한 것들이 꽉 차 있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 체격이 좋은 미인 한 사람 훌쩍 홀 안으로 들어오는 가 싶더니 거의 동시에 우리 옆자리 미군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그 미인을 끌어안다 시피 하고는 서로가 인사를 나누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우리 홍 하사도 얼른 고개를 움직이더니 “안녕 람”하고는 인사를 했다.
“과장님 저 여자가 마담인데 아마 이런 곳에서는 저 람이 최고 인물일겁니다.”
마치 자랑이나 하듯 내게 얘기를 했다.
“경쟁자가 많겠군. 자네는 어떤 사이야?”하고 물었더니
“저는 뭐, 사실은 한국 사람들이 애를 많이 쓰는데 워낙 영어를 잘해서 그 런지 미군들하고 주로 친하죠.”
“그럼 미군들한테 몸을 판다는 얘기야?”
“아닙니다. 저 영감이 남편인데요 뭐. 하긴 남의 일이야 알 수가 없지요”
우리는 서로가 우문우답을 나눈 것 같아 함께 웃었다.
잠시 후 람이라는 마담이 우리 뒤를 지나쳐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살짝 우리를 보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머리카락은 검었으나 먼로의 헤어스타일과 늘씬한 키 그리고 옆이 터진 하얀 아오자이와 붉고 짙은 립스틱은 모두가 잘 어울리는 하나의 세트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미 카운터에 있던 나이든 남자는 람과 무어라고 서로 말을 주고받더니 곧 홀 안 입구에 기대 놓았던 오토바이를 끌고는 나가버렸다.
미군들 세 명은 계속 경쟁을 하듯 서로 말을 건네느라 애를 쓰고 있었고 우리는 우리대로 서로의 말을 한참 잇다가 나는 스크루드라이브 한 잔을 더 달라고 마담에게 잔을 들어 보이는 제스처를 하고는
“우리 한 잔만 더 하고 이제 자리를 옮기지”하고 홍 하사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는데 무슨 영문인지 람이 살며시 나를 응시하며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루텐언트 쿠?”
뜻 밖에도 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순간 내 명찰에 적힌 영어를 읽고 있구나 싶어 즉시 고개를 꺼덕였는데 미스 람의 눈이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즉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오! 이럴 수가? 내 뇌리 속에는 순간 람이 아닌 미스 차우가 떠오르고 있었다. “미스 차우?”
나는 혹시나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아주 작은 소리로 불러 보았다. 이미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비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그 때서야 그가 마담 람이 아닌 미스 차우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 차렸고 우리는 카운터 위에 서로 손을 얹은 채 서로가 두 손을 꼭 잡고 악수를 했다.
나는 그가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우리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잠시 조용해 졌던 미군들 중 한 명이
“워쯔 고잉 온?”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리유니파이더! 디스 이즈 마이 영 시스터”라고 하며 내 동생과 헤어졌다 재회를 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는 그러냐고 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더 이상 끼어들지를 않았다.
나는 이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과장님, 나중에 예약해 놓은 호텔에서 만나지요”
나는 언 듯 그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술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의 콘티넨탈 호텔이었다.
아직도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는 빛이 역력한 차우는 내가 시킨 술을 한 잔 더 가시고 와 정중하게 미소를 띠우며 내 앞에다 내려놓았다.
나는 턱과 눈짓으로 미군들을 서빙 하라는 뜻을 슬쩍 전했다. 그는 곧 알아차리고 내 옆의 미군들과 마주 보는 가운데로 몇 걸음을 옮겨갔다.
미군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미스 차우에게 다시 묻고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원래는 한국 사람이라고 농담을 하고는 깔깔 웃고 있었다.
나는 수첩을 슬그머니 한 장 뜯어 볼펜을 쥐고 영어로 쪽지를 썼다.
“내 숙소는 콘티넨탈 호텔 12호실. 만나기를 원함”
살짝 쪽지를 접어서는 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마지막 잔을 얼른 비우고 나는 일어설 채비를 했다. 이미 눈치를 챈 차우는 카운터에서 나와 우리를 배웅하려는 몸짓을 보였다.
“빌 플리즈”하고 홍 하사가 이번에는 점잖게 말을 했다. 우물거리는 차우를 보고 나는 재빠르게 미군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눈짓으로 빌을 주라고 했다. 차우는 빌을 볼펜으로 잠시 적어 오더니 왜 벌써 가느냐고 물었다.
홍 하사가 돈을 계산하는 동안 나는 내가 쓴 쪽지를 슬쩍 차우에게 남이 보지 않게 건네주었다.
그는 문간까지 따라 나와 얼른 내가 준 쪽지를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하사는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 호텔로 직행하면서 “과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여태껏 물어볼 말을 참았다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우리는 서로가 못 만날 줄 알았던 친구였어.”
“아니 과장님은 호이안에만 계셨는데 언제 그렇게 동작이 빨랐습니까.?”
“실은 내가 구정공세 때 결사대 소대장으로 디엔반 군청에 나가 있었지. 그 때 차우는 미 고문단 실의 타자수였어.”
“아, 그렇군요. 좋은 친구 만나셨습니다. 아주 인간성도 좋고 인기가 있어 아마 성공 할 겁니다. 또 남편이 돈 많은 홀아비였는데 얼마 전에 서로가 만났데요.”
“언제부터 여기서 술집을 했나?”
“제가 알기로는 아마 6개월쯤은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잘됐군. 그렇다면 그 후 디엔반 군청이 베트콩의 기습을 두 차례나 받았다는데 그럼 이미 디엔반을 떠나 있었군.”
운전을 하고 온 홍 하사는 차를 호텔 앞에 세우고 나를 따라 호텔 방까지 잠시 들어왔다. 그는 혹시 안전한지 어떤지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냥 돌아갔다.
나는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술기운을 씻어 버리기 위해 먼저 샤워부터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해서는 차우와 서로 약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올 때까지 무료하게 방안에서만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나는 권총을 방안 깊숙한 곳에 감추어 놓고 호텔 로비로 나가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1층에 있는 내 방에서 나와 로비로 향하는 코너를 돌 때 2층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약간은 통통한 젊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여인은 어제 저녁 로비에서 잠시 서성거리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얼른 알아차리고 말을 걸자 반갑게 맞아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미소를 띠우면서 잠시 목례를 하고 지나쳤다.
가수라는 그 여인이 로비에 들어서자 미군 한 명이 그를 모시듯 인도해 호텔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 볼 수가 있었다.
어제 이 여인으로부터 잠시 들은 얘기지만 호텔 2층에는 자기를 합해 모두 여섯 명의 연예인들이 묵고 있다고 했다.
아마 동남아 시장으로 계약사에 의해 송출 된 연예인들 같았다.
내 추측으로는 지금 이 늦은 밤 호텔을 빠져나가는 것은 이미 쇼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어떤 파티에 초대를 받거나 개인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나가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어제 부두에서 본 엉터리 기술자나 지금 이 연예인이나 간에 모두가 대한민국의 국군들이 피를 흘리며 닦은 토양 위에서 작으나마 그 싹을 틔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마음이 흐뭇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로비에 나가 채 담배 한 개비도 마저 피우기 전인데 차우가 호텔의 현관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왠지 내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억제하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미모가 주위의 모든 시선들을 끌고 있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웃음과 함께 온 얼굴에 기쁨을 활짝 담으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 머뭇거림도 없이 나를 따라 내가 안내하는 대로 내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서로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가 마치 향수처럼 은은하게 느껴지고 서로가 입을 통해 주고받는 사랑의 나눔 속에는 안도와 기쁨이 뒤범벅 된 행복 외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한 참 만에야 우리는 서로가 숨이 끊어질듯 가빠져 있음을 알아차리고 포개고 있던 입술을 떼면서 엉켜있던 팔도 약간씩 풀었다.
그의 눈은 이미 눈물에 젖어 불빛에 반사되었고 나는 더욱 회상에 젖어 다시 한 번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결국 우리는 밤이 거의 샐 때까지 캄캄하고 무더웠던 벙커 속이 아니라 이제는 시원하고 깔끔한 침대 위에서 서로와 서로의 몸을 섞고 또 섞을 수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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