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31 ) 만감의 교차
마치 지옥의 굴레를 벗어난다는 느낌이 잠시 들기도 했다.
귀국 며칠 전 나는 다낭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귀국 신고의 행사 때는 잠시 청룡부대 본부로 다시 들어 가 함께 행동을 해야겠지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오래 동안 잊고 있었기 때문에 더 더욱 도회지가 그리웠던 것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다낭으로 나올 때 공중에서 내가 늘 상 작전을 하던 어느 지역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물론 내가 작전을 하고 있었을 때도 고엽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푸른 숲들이 마치 누가 나무를 뽑아 누른 물속에 담가 흔들어서는 다시 이쑤시개처럼 꽂아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당시 내가 들어서 알고 있었던 고엽제는 그것을 뿌리게 되면 나무는 물론 사람까지 살 수 없다는 말만 들었기 때문에 의례 식물이 없어지니 그 결과로 사람이 살 수가 없겠지 하는 추측을 했을 뿐 인체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렇게 피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
한편 청룡부대의 한국 민간인에 대한 보호 의무는 비록 직접적으로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지마는 간접적으로는 월남의 경찰이나 미군들로부터 요청이 있을 때에 한하여 가끔씩 협조를 해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한국 민간인들에 대한 통제를 때에 따라서는 해 주어야 하는 경우가 발생 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호이안 지역은 물론 다낭과 후예지역까지를 대체적이나마 파악을 하고 있어야 했다.
내 집무실 안에는 누가 언제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다낭지역 한국인 실태” 라는 브리핑 차트가 걸려있었는데 그 내용에는 자세한 지역별 민간인 숫자나 세부적인 분포 사항이 없었고 모두 추산된 대체적인 숫자로만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도 언제 현재라는 날짜를 발견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 자신도 브리핑 차트에 적어 놓은 그대로 대충 호이안지역과 다낭지역 그리고 다낭 북쪽 17도선이 가까운 후예지역까지로 해서 대략 5천여 명의 한국인 근로자들이 퍼져 있다는 것 외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가운데 더 이상의 해 볼 수 있는 일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낭은 월남의 제 2의 항구도시이며 미군의 전투비행단이 있는 전진기지였다. 나는 그 동안 두어 차례 출장을 와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 귀국에 앞서 미리 휴가차 푸근한 마음으로 돌아다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길을 잘 몰라 하루는 직접 내가 운전을 하지 않고 우리 헌병대 다낭파견대에서 근무하는 수사관에게 운전을 해 다낭 항구를 더 차분히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원래 내가 부산에서 자랐던 탓인지는 몰라도 큰 배들이 정박한 부두가 어쩐지 자꾸 보고 싶어 며칠 전 잠시 보고 왔는데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안내를 받아 내가 가지 않았던 부두의 어떤 한 구역에 들어서니 보급선들로부터 이미 하역을 하여 군데군데 군수품들을 산더미 같이 쌓아 둔 것이 보였고 지게차들은 그 짐들을 남은 빈 공간에다 다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지게차 기사는 우리가 입은 유니폼을 보고 잠시 손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한국인 같아 보였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한참을 아슬아슬하게 운전하는 그의 운전 솜씨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포크로 파렛의 짐 덩어리 하단을 찔러 그만 낭패를 보고 말았다.
나는 아마 한국에서 돈을 먹이고 기술자로 온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아니 그저께도 어떤 한국 사람이 엉터리로 하는 걸 보았는데 오늘도 또 엉터리 기술자를 보구먼.”
“얼마 안 있으면 또 일류가 될 텐데요 뭐” 나를 태우고 갔던 수사관이 웃으면서 대꾸를 했다.
그러나 물끄러미 쳐다보다 차를 타고 되돌아 나오는 내 마음 속에는 가족도 버리고 이 뜨겁고 위험한 지역까지 온 억척의 한국인들이 무척 장하게 보였다.
나는 “제발 달러만 많이 벌어라. 벌어서 우리끼리 잘 살면 되지” 라는 생각을 되 뇌이면서 나도 모르는 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차를 몰아 다시 다낭의 시가지로 나왔다.
다낭의 진풍경은 무어니 해도 2,3층짜리 건물들의 모습이었다. 한결 같이 그물을 옥상 위에서부터 땅바닥까지 내려놓은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왠지는 몰라도 모두가 초록색 그물 일색이었다.
색상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그물을 친 이유는 베트콩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면서 수류탄을 창문으로 획~ 던져 넣기 때문에 그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건물에다 씌운 것이라 했다.
역시 다낭이 큰 도시다 보니 시내 중심가에는 억척의 한국인들이 식당이며 터키탕이며 술집들의 경영에 한 몫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68년 1월 28일은 내가 전쟁을 치기 위해 월남의 다낭항구에 도착을 했던 날이었고 1969년 1월 28일은 내가 전쟁을 치고 나서 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선상에서 바라보는 다낭 항구는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그 것은 여느 큰 항구처럼 불빛이 휘항해서도 아니고 우뚝 솟은 건물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도 자연에 감싸 안긴듯한 토박한 풍경 바로 그 것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부 웅~부 웅~” 이별을 고하는 뱃고동 소리는 언제나 슬픈 것이었다.
내 전우들의 영혼을 두고 떠나는 곳.
그러나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해 썩은 한 알의 밀알처럼 숲 속 어느 한 구석 그리고 어느 무너져 내린 벙커의 한 구석에 쓸쓸히 남겨졌을 영혼들을 생각하니 슬프기 그지없었다.
함께 와서 함께 돌아가는 사람이 가장 적다는 해병대의 파월 제23제대.
1년 전 함께 배를 탔어도 다낭에서 우리를 내리고 나트랑으로 며칠을 더 가야했던 육군의 백마부대 용사들은 가는 도중 구정공세가 터졌기 때문에 적의 예봉이 지나갈 때까지 배안에서 대기를 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사 전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다낭항에 상륙을 했기 때문에 M-16이라는 소총을 어떻게 쏘는지 교육훈련도 받기 전에 모두가 다급히 적의 예봉을 맞아 도착 즉시 싸워야 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희생을 당하지 않았던가?
실로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이제 목숨을 걸고 계속 싸워야하는 사람은 싸워야하고 또 싸운 후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야 한다.
“부~웅 부~웅” 차츰 멀어지는 항구를 뒤로 하고 나는 그 동안 교차했던 모든 만감을 뒤로 물린 채 선실로 찾아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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