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179기 황석영의 해병이야기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75>
`영어 잘할 수 있습니닷! `…미군 배속 부푼 꿈
전쟁과 가난한 마을은 내게는 어릴 적부터 낯익은 세계였다.
아마도 내 또래의 한국군 병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이 떠나온 지방의 농촌 마을들은
베트남의 밀림 사이에 틀어박힌 작은 마을과 다를 바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곳곳에 널린 논밭과 모내기와 추수를 하는 들녘의 광경은
고향 사람들을 생각나게 했을 터였다.
신병들은 각 대대로 배속되어 나갔고
다시 대대에서 중대와 소대로 편성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신병이 삼 개월을 무사히 넘기면
대개는 육 개월을 넘어서서 선두 첨병을 설 정도의 고참이 된다고 했다.
어느 부대에서나 팔 개월 이상 전선에 두지는 않는다고 했다.
늦어도 십 개월이면 나머지 두 달은 본부중대 방석이나 대대 본부에서 지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신병의 대부분이 이 첫 석 달 동안에 죽거나 후송되는 경우가 많아서
모두들 '백날만 넘기면' 살아남는다는 미신에 사로잡혔다.
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작게는 언제나 운이 나빴고
크게 본다면 결국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작가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작가에게 불운이란 또 하나의 좋은 이야기 감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고생을 이 다음에 꼭 글로 쓰리라 마음먹게 된다.
그런 마음가짐이야말로 내 낙천주의의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군대에서 상관이 뭔가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무조건 '옛, 잘할 수 있습니닷'해두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게 되어 나중에 단단히 기합을 받게 되는 일은 어쨌든 오늘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일 걱정은 그때 가서 하면 된다.
수용중대에서 차례로 배속을 받는데
신원서를 뽑아낸 어느 부서의 장교가 와서 이름을 불렀다.
이를테면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병사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내 차례가 되어 하사관과 장교가 나란히 앉은 책상 앞에 가서 섰더니
내 주소지와 학력란에 대해서 자세히 묻고는 끝으로 다짐을 했다.
- 영어를 잘할 수 있나?
- 옛, 잘할 수 있습니닷!
그는 서류에 뭔가 적고는 턱짓으로 나가보라는 시늉을 했다.
밖에 나오니 이미 면접을 끝낸 병사들이 줄지어 선 채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지금 차출된 사람들은 아마도 미군 측으로 파견을 나가거나
본부나 전투부대에서도 미군 병사와 협동 근무를 하는 자리로 나갈 거라고 했다.
미군 통신병과 함께 포 지원에서 헬기 요청에 이르기까지 협력을 하거나,
한국군을 지원하는 외곽의 미군 부대로 파견 근무를 나가거나,
아니면 아예 미군에 배속될 거라고 했다.
그런 임무에는 보병에서부터 운전병이나 위생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서
운이 좋으면 아예 귀국할 때까지 힌국군과는 다시 만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내가 다낭 기지에 파견 나간다고 했을 때
기간병들은 모두들 중간 운은 된다고 말했다.
제일 나쁜 데가 한국군 중대에 파견 나온 미군 통신병의 보조자가 되는 일이었고
가장 좋은 자리가 직접 전투와 부딪치지 않는 미 공군이나 해군 부대에 배속되는 일이었다.
그림=민정기
출처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61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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