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179기 황석영의 해병이야기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76>
미군 도로 순찰대 보조로 첫 임무 시작
내가 순찰병의 명을 받고 파견대를 찾아가던 중
길을 잃었던 일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
나는 하역작업이 한창인 부둣가에서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아직 위장 무늬가 선명한 새 정글복을 입고 있었으며,
여기서는 이미 구식이 된 지 오래인
이차대전 때의 보병 무기였던 엠원 소총을 느슨히 걸쳐 메고
한쪽 어깨에는 내가 지급받은 보급물로 가득찬
촌스러운 '따블백'을 땅에 질질 끌 듯이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냉동창고가 있는 에이 레이션 창고 앞의 상자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오르내렸다.
철모에 눌린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땀이 철철 흘러내렸고,
어깨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배낭의 끈과 소총의 멜빵을 번갈아 치켜 올려야만 했다.
나를 지켜보던 미군 위병 근무자가 다가와서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내 소속과 찾아가려는 부대 이름을 더듬더듬 말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여기가 보급창이고 파견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였다.
주위에는 벌써 곳곳에 불이 켜지고
캔틴 컵과 프라이 팬을 든 병사들이 식당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여러 차례 애를 쓰면서 전화를 걸었고
드디어 나를 데리러 오는 차가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아냈다.
그동안 위병은 체크포인트 안에서 나를 쉬도록 해주었다.
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동안에
어쩐지 나는 집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여기온 지 사흘 되었다고 말했더니
그는 나직하게 휘파람 소리를 냈다.
밤색 머리털의 앳된 미군 병사는 내가 작년 이맘때의 자기와 같다고 말했다.
나의 임무는 미군 도로 순찰대의 보조였다.
순찰대의 한국군 책임자는 하사관이었는데
제일 졸병이었던 나를 포함하여 일개 분대병력의 절반도 안 되는 여섯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모두들 교대로 기지 외곽의 도로를 기동순찰하거나
작전차량의 안내라든가 도로 주변에 있는 초소들이며
교량의 안전 여부를 매 시간마다 체크했다.
내가 맡게 된 지역은 제일 위험하고 기동 거리가 멀다는 일번도로 주변이었다.
날마다 출라이 기지에서 해병 여단본부를 지나 쾅나이까지 이어진 도로를 왕복했다.
먼지 속에서 코끝까지 내리 덮이는 플라스틱 고글을 쓰고
쉴 새 없이 오가는 중장비들의 행렬과 장갑차, 탱크,
호송행렬들을 안전한 도로로 안내했다.
우리는 언제나 아침 일찍 지뢰탐지기를 등에 걸머진 일개 분대의 수색조와 함께
천천히 작전도로를 탐사했고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다른 조와 마주치면 서로 엇갈려 가서 도로를 개통했다.
오후에는 개통된 도로를 따라 두 명의 미군 순찰병과 함께
나는 뒷자리의 삼십미리 기관총좌에 앉아서 일번 도로를 왕래했다.
우리는 촌락을 순찰 중인 수색대로부터 포로를 인계받기도 하고
군사정보대로 가는 베트남 민간인 정보원을 호송하거나
도로에 매설된 부비트랩을 발견해서
도로를 봉쇄하고 공병대에 연락하기도 했다.
저녁에 귀대할 때쯤에는 내 드러난 팔과 목덜미와
고글 아래편의 턱 언저리와 뺨에 두터운 붉은 흙의 켜가 덮여 있었다.
한번은 얼마쯤 되나 하고 긁어 모았더니,
큰 자두알만 한 흙덩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본대의 대원들과 전투원들을 생각했고,
가끔 마음의 갈등이 있었을 때에는
내일은 꼭 작전엘 나가리라, 가리라, 결심하곤 했었다.
그림=민정기
출처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61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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