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48) 뒤 돌아 보며/ 두 해병

머린코341(mc341) 2015. 8. 1. 13:55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48) 뒤 돌아 보며/ 두 해병



"쿵 쿵 쿵~" 연방 쏘아대는 포성이 점심을 먹고 잠시 낮잠을 자던 나를 깨웠다. 내가 지키고 있는 해병청룡부대 본부의 외곽으로부터 2키로쯤 떨어져있는 포병대대 지원사격이 또 시작된 것이다.


오늘따라 해병대가 가진 105미리 포는 물론 맹호부대에서 지원 나온 155미리 포까지 동원되는 것으로 보아 어느 대대인지는 몰라도 무척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968년 1월31일 구정을 전후해 피아간에 서로 3일간의 휴전을 합의해 놓고도 월맹 정규군과 베트콩들은 민간인처럼 가장을 하여 한국해병대와 미 해병대의 지역에 무려 2천여 명이 잠입해 들어왔던 것이며 사실 이러한 공세는 비단 우리지역만이 아니고 월남의 전 지역을 통해 동시에 일어났던 총공세였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구정공세"라는 것이며 호이안을 중심으로 한 우리 지역에서는 그로부터 약 2개월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거의 매일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나는 잠에서 깬 후 세수를 하고는 유선 전화로 각 초소마다 점검을 했다. 되도록이면 낮에는 쓸데없이 움직이지 말고 낮잠을 자 두도록 하는 것이 야음을 노리는 적에 대한 대비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초소 점검을 마친 후 나는 다시 내 벙커로부터 5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관망대 위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얼마나 더웠던지 고작 잠에서 깨어 점검을 마친 후 겨우 관망대 위로 올라 왔는데도 벌써 런닝셔쓰에는 땀이 젖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대원이 건네주는 쌍안경으로 전방을 주시했다.덩그런 관망대로부터 한 눈에 훤히 들어오는 것은 동서로 뻗은 큰 늪이었다. 우기 철에는 큰 강물이 되어 용트림을 하듯 지나갈 것을 생각하니 늪 건너 우거진 숲과는 잘 어울릴 경관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던 중 관망대 아래쪽에서 전령이 나를 부르고 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내 눈길이 뛰어 오는 전령과 마주치자

전령은 "소대장님. 여단본부(청룡부대 본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하고 관망대 위를 쳐다보며 외치듯 말을 했다.

"누구야?"

"동기생이라고만 합니다."


나는 누구든 간에 동기생이라는 말에 반가움이 앞서 땀이 나든 말든 빠른 걸음으로 내 벙커로 찾아들었다.


"나 구 중위야!" 수화기를 들자말자 외치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응, 나 김 광수야" 말끝이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야. 너 언제 도착했어? 그리고 동기생은 누구 누구가 왔어?" 상대방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내 말만 잇고 있었다.

"응 어제 도착했는데 황 00 중위와 강 00 중위와 같이 왔어"

"니 그라모 지금 당장 그 친구들 데리고 일루 와. 통신대대를 지나 무조건 숲이 우거져있는 여단 북동쪽 끝 외곽으로만 오면 우리 소대원들을 만날 수 있을끼다"

"비무장인데..."

"야! 니 죽으모 내가 책임진다. 명색이 해병 청룡부대 울안인데 적이 어데있노?. 또 그라고 내가 지키고 있는데"

"하여튼 큰 소리는 여전하구먼..."

"야, 풍 없는 영웅이 어데 있노? 내가 백령도에서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우리는 서로가 깔깔대고 웃었다.

김 광수중위와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어도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부산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것을 시작으로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은 다르지만 해병학교의 기수도 같았고 임관 후 초임지도 같은 백령도에다 같은 중대에서 근무를 했다.


이제 그것도 모자라 청룡부대에서까지 와서 만나게 되었으니 아주 늙어 노인대학에서만 서로 만나게 되면 대학이 각각인것도 커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해병중위 김광수. 그는 서글 서글한 눈을 가졌고 오 똑 솟은 콧날 그리고 항상 웃음을 머금은 입이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었다. 더구나 몸매마저 날렵해 초등학교 때는 나와 함께 기계체조 선수후보로 뽑혔다가 나는 시원치 않아 탈락이 되고 그는 우리학교의 선수로 뽑혀 시합에 나갔던 적도 있었다.


서로 통화를 한지도 30여분이나 지났다.


관망대 아래 그늘에서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잇는 나를 향해 "손들어!"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온 것을 알아차리고는 팔을 벌리면서

"야, 보급품들이 왔구나"하고는 김 중위,황 중위 그리고 강 중위를 차례로 얼싸안고 반가움을 나누었다.


우리는 그때 마 악 도착하는 소대장 요원들을 보급품이라 불렀다.


그 당시 한동안은 사령부의 방침으로 소위는 경험이 부족할 것이라는 염려로 대부분의 소대장들을 중위로 채웠는데 원래 중위의 수가 많이 부족한데다 사상자들이 곧잘 생겨 소대장 한 사람이 비게 되면 소대장을 끝낼 시기가 와도 한국에서 보충 병력이 오기까지는 계속 오늘 어떻게 될지 내일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소대장 직책을 한 달이나 더 해야만 했던 판국이라 새로 부임하는 소대장 요원들이 더욱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것은 마치 기다리던 보급품과도 같다는 뜻으로 누가 지어 낸 비어였다.


"야, 너거는 전쟁 다 끝났는데 인제 사 뭐 할라꼬 왔노? 말도 말아라. 나는

구정공세 사흘 전에 도착해서 피 묻은 전임 소대장 장구를 그것도 한 밤 중에 챙겨 입고 그 날부터 두 달 동안을 하루도 안 빼고 전투를 안했나"


나는 마치 장보러 온 촌놈들을 어르듯 쉬지 않고 그 간에 있었던 일들을 게그를 섞어가며 열심히 얘기를 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황 중위가 "내가 보니까 자넨 여기서 씨레이션만 까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모두가 깔깔 거렸다.


"이봐라, 여기 여단 외곽 지키는 건 그동안 수고 했다고 주는 뽀나스 아이가. 내가 2개 분대를 데리고 여기 온지 5일째 되는 데 우리도 5일쯤 후에는 도로 중대로 돌아가 또 작전에 투입 될 거 앙이가"


잠자코 웃기만 하던 김 중위가 또 한마디를 거들었다.


"야~ 여태까지 쭉 듣고 보이 월남전은 구 중위 혼자서 다 친 거 같네.."


이번에는 모두가 눈물이 나올 정도로 허리를 잡고 한참을 웃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는

"내 너거들 겁을 너무 준거 같은데 실제 어려운 때는 다 지나갔다. 인자는 걱정 안해도 될끼다"


나는 마치 전쟁을 마무리하는 말처럼 위로삼아 얘기를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김 중위는 물론 지금 내 앞에 있는 동기생들이 너무 험한 지역으로 배치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깡통 맥주를 기울여가며 이런 저런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떠들었지만 결국은 아쉬움을 남긴 채 서로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돌아가는 동기생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내 마음 한 구석에 아직도 살아있는 내 전쟁의 경험을 되새겨 보았다.


적에게 쫓겨 사방이 보이지 않는 사탕수수밭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일, 지뢰밭 한가운데 서서 전율을 느끼며 석고처럼 운신을 할 수 없었던 일, 저격수가 나를 향해 쏜 총알이 내 왼팔 옆으로 비켜 지나갔던 일 그리고 수륙양용차를 타고 가다 대전차 지뢰가 폭발해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일 등 적어도 이러한 일들이 총총히 돌아가고 있는 내 동기생들에게는 귀국하는 날까지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해보았다.


그 후 나는 5개월이나 더 전투중대에서 소대장을 해야만 했고 그 기간 동안 청룡부대가 하는 모든 작전에 투입되어 더욱 어려운 전투를 해야만 했다.


한편 김광수 중위 역시 운 없게도 가장 험난한 지역에 배치를 받아 소대장을 하는 동안 내 내 악전고투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와 김광수 중위는 이미 죽었어야 했었던 목숨들이 다시 태어나 두 번을 살고 있다는데 그 뜻을 두고 있으며 지난 일들은 영광의 젊은 시절로 되새기기로 마음 먹은지 오래다.


1971년 2월 같은 날 해병 대위였던 나와 김 광수군은 정들었던 해병대를 떠나게 되었고 그 후 나는 내가 바라던 외국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 그리고 김 광수군은 늦게나마 행정고시에 합격을 해 현재 인천항만청장으로 각각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이 글은 1996년 7월 당시 초등학교 동기생 회보에 실었던 글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