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관 40주년의 회상 (3) 의무대 신세
선배 기수들과는 달리 6개월간의 후보생 훈련기간을 월남전으로 인해 3개월로 단축 시켰기 때문에 그 강도가 매우 높을 수 밖에는 없었다.
나는 대학시절 소위 똥구두라는 군대에서 흘러나온 목짧은 군화를 신고 다녔는데 하루는 그 끈을 잘 동여매지 않고 풀어 헤친채 농구를 하다 그만 발목을 심하게 다쳤던 적이 있었다.
인대가 많이 늘어나 몇년 동안 수시로 침을 맞았고 약도 많이 먹어 몇년전에서야 겨우 가라 앉힌적이 있었는데 그만 그것이 재발이 되더니 얼마나 발목이 많히 부었던지 매고도 남는 긴 워카끈의 양쪽 끝이 겨우 닿을 정도가 되었다.
(후일 월남전에서 좁고 미끈거리는 논두렁을 타고 개활지를 건너다 적의 총소리와 거의 동시에 내 약점인 발목을 삐긋하는 통에 그대로 논에 쳐박혀 집중 사격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의무대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것은 발목의 치료는 물론 내 스스로를 재충전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의무대의 입원실은 해병학교의 써늘한 씨멘트 내무실과는 너무 달랐다.
그야말로 호텔에 투숙한 것이나 진배 없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입원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군과 해병대에서 이미 중위로 진급이 된 친구들이 면회를 오는가하면 여좌동 해군 관사에 있는 고모께서 사식까지 들고 들어 와 위로를 했기 때문에 더욱 빠른 회복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입원실을 관리하는 해군 중사는 수시로 내 옆에 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해 심심치도 않았다.
(월남에서 내가 대전차 지뢰의 폭발로 입원을 했을 때 그는 어떤 전투에 투입이 되어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이 생겨 입원 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특징적인 것은 벌써 파월 후 부상을 입고 귀국을 해 같은 입원실을 쓰는 일병이 한명 있었다.
키는 자그마했고 집은 제주도라고 했는데 그 사연을 들으니 매복을 나가 참호속에서 잠시 졸았는데 갑작스러운 적의 박격포가 부근에 떨어져 그 폭발음에 자신도 모르게 놀라 참호를 뛰쳐 나갔는데 그때 이미 M1 소총은 다리에 걷어 차이면서 자신과 떨어졌고 그런후 정신 없이 어디론가 계속 뛰었다는 것이다.
기진맥진해 어느 강을 따라 갔더니 그곳에는 많은 베트콩들이 대열을 갖추고 있는 것이 보여 다시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잠수를 했다는 것이며 결국은 집중 사격을 당해 다리 한쪽에 관통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채 떠내려 갔는데 나중에사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져 깨어보니 자신은 물가에 있고 쳐다 보이는 사람은 자기 중대장이었다는 얘기를 늘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 동기생 중에는 실무 출신의 우수 하사관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나이 어린 한 실무 출신이 잠시 귀국했던 하교 동기생을 만나고 와서 하는 말이 밤이면 몇명이 조가 되어 산으로 베트콩의 동굴을 찾아가 굴 입구에 난짝 붙어있다가는 동굴에서 나오는 베트콩을 하나씩 주먹으로 때리면 몸이 외소해 쭉 뻗는다나?
그러면 그 녀석들을 들쳐 업고 돌아 오는데 베트콩 한명에 훈장이 하나씩이라 저녁을 먹고나면 훈장을 타러 가자고들 몇명씩 모여 산으로 간다는 말을 했다.
누가 해병대가 아니랄까봐서 그랬는지? 처음에는 그 얘기를 들었던 우리도 그러려니 했지만 나중에사 거짓말 중에서도 너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는 조소를 금치 못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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