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임관 40주년의 회상 (2) 배고픈 나날

머린코341(mc341) 2015. 10. 17. 13:33

임관 40주년의 회상 (2) 배고픈 나날  


3월달인데도 유달리 이 해에는 진눈깨비가 휘몰아 쳤다.


팬티 바람으로 바닷가에 서서 받들어 총을 하고 있으면 그 써늘한 쇳덩어리의 촉감이 뼈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다물 속에서의 제식훈련은 오히려 온기가 느껴져 바깥으로 나가기가 싫을 정도였다.


이런 기합을 받은 후에는 뭐니 뭐니해도 끝이 나면 즉각해야 하는 것이 병기수입(청소)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늦어져도 총이 새빨갛다싶을 정도로 녹이 슬어가기 때문에 구대장들의 재촉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손놀림이 무척 빨라지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곤혹을 치루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다 배는 너무 고팠다. 


Y대 대학원을 다니다 후보생이 된 곰처럼 생긴 친구는 식사 당번때 콩나물이 걸쳐져있는 국통을 들고 오다가 너무 입맛이 당긴 나머지 그 걸쳐진 콩나물을 손으로 걷어 입에 집어 넣다가 구대장에게 걸려 개맞듯이 맞았다.


그리고 2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는 전남 광주 지역에서 입대한 네명의 친구들이 썰물 때를 기다려 해안가를 걸어 탈영을 하기도 했다.


지금 내 추측으로는 몇주 후에는 10 여명 이상이 퇴교를 당했고 그 중에는 콩나물을 걷어 먹었던 친구도 포함이 되었다.


또 탈영을 했던 네명의 친구들은 모두 군법 회의에 회부가 되었던 것을 나중에사 알게 되어 매우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밤이 되면 경화동 뒷산을 바라볼 때가 많았다.


오두막 몇채에서 새어 나오는 빤한 불빛을 보면 저 집에는 지금 먹다 남은 식은 밥이라도 있겠지.. 하는 생각도 가져 보았고 입대하기 얼마전에 결혼을 한 친구집에 초대를 받아갔을 때 그 푸짐한 음식들들을 왜 남겼을까? 하는 후회도 해 보았다.


후보생이 되면 봉급을 타게 되어있었다.


모두가 호주머니에는 돈들이 두둑히 들어 있었으나 돈을 쓸 곳은 전연 없었다.


피엑스도 2주까지는 통 열지를 않는다고했다.


나는 차라리 사병으로나 갔으면 피엑스도 이용을하고 덜 얻어 맞고 이 고생을 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래도 그런 가운데서라도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갔다. 따스한 봄날 대절 버스들은 우리들의 고통스러움은 모른채 꽃놀이패들을 싣고 경화동 대로를 지나 다니기에 바빴다.
 
우리는 추럭을 타고 해병학교의 뒤뜰을 단장할 떼를 떠서 오기 위해 산으로 이동을 했다.


야전삽으로 네모지게 잔디를 떠서 올리니 마치 금방 쪄낸 시루떡 같이 탄력을 받아 출렁 거렸다.


아~ 이것이 시루떡이라면...하는 생각을 몇번이고 해보았다.


우리 구대 몇사람은 작업을 먼저 마치고 집합 할 장소 부근에 가 대기를 하라는 명을 받고 이동을 하던 중 어떤 아주머니가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산길을 지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아주머니 그거 먹는거 아니요?"하고 물었더니 "먹는거는 먹는 거지만 팔거는 아닌데.."하고 는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길을 막고는 "먹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좋으니 좀 먹읍시다. 돈은 값을 많이 쳐줄께요"


하고는 머리에 이고 있는 다라이를 끌어 내리다 싶이했다.
 
그 속의 내용물은 생계란과 된장이었다.


우리는 눈치를 살피면서 산기슭의 푹패인 장소로 아주머니를 모시듯 안내하고는 순식간에 계란을 깨어 삼키고는 된장을 손가락으로 떠서 다시 입안으로 넣었다.


모두가 그 짓을 몇번 반복하고나자 계란은 동이나고 된장은 쑥 줄어 있었다.


돈을 후하게 쳐준 우리는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로 여겼다.


잠도 제대로 재우는 수가 없었다.


중대 간부나 소대 간부를 하지 않더라도 네시간 잠을 자면 매우 양호한 경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령꾼들은 순검이 끝나고나면 철조망을 통과해 빵을 사가지고 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발각이 되어 다음날 반쯤은 죽을 정도로 빳다를 맞는 수도 몇번 있었다.


우리 내무실과 마주보는 내무실의 용사들은 야간 포복을 해 곧잘 빵을 사가지고 잘 들어 왔다.


그러나 그 많은 양을 감추는 것이 항상 문제였고 벌써 눈치 빠른 친구들은 내 사물통 안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군대를 늦게 간데다 이미 해군과 해병대 장교로 있는 친구들이 많아 구대장들이 잘 보살펴주는 입장이라는 것을 은연 중에 앞 내무반의 동기생들이 알아 버려 본의 아니게 나는 내 사물통을 두고 창고료를 받는 임대업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검이 끝나 빵을 돌려줄 때는 한번씩 시비가 붙기도 했다.


나는 항상 우리도 식구가 있는데 넉넉치는 못해도 얼마만킁은 떼어야 될것 아니냐는 주장이고 앞 내무실 친구들은 떼어도 너무 뗀다는 불평들을 했다.


한번은 제식 훈련을하다 잠시 쉬는 시간이었는데 마산이 고향인 친구가 입을 우물거려 사정을 하고는 겨우 건빵 하나를 입에 넣게 되었는데 도저히 아까워서 씹을 수가 없었다.


입안에서 침에 섞여 사르르 녹는 그 맛 ! 


나는 여기에다 설탕물만 한모금 마시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상첨화의 맛이 될 것이라는 것을 머리에 떠올렸다.


이 후로 나는 임관을 하는날 까지 내 내 누워서 머리맡에는 설탕물과 건빵을 두고 배터지게 먹은 후 실컷 잠을 자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