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41기 원명복

청룡3대대 11중대 3소대 전투이야기 - 참전수기 10편(마직막편)

머린코341(mc341) 2015. 10. 23. 20:17

청룡3대대 11중대 3소대 전투이야기 - 참전수기 10편(마직막편)


(고노이강을 진입하는 용맹스려운 청룡의 모습)


⑺ 11중대 부 중대장

  
베리아 작전을 끝내고, 1970.11월10일경, 11중대는 다낭 휴양지에 3박4일 일정

으로 가게 됐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잠시나마 즐거웠든 휴양지

에서의 생활은 기억에서 살아있는 듯하다.


우리소대는 선임하사와 분대장 1명을 포함, 1/3병력은 기지방어를 위하여 남겨

두어야했다. 그래서, 중대 2/3 병력이 들뜬 기분으로 트럭에 몸을 싣고, 처음으로

가보는 다낭휴양지로 출발했다.


출발전 중대장의 지시로 알약(?) 3알씩을 소대장 책임하에 강제적으로 먹게 했다.

다낭 해안에 위치한 휴양소는 대체로 깨끗하였으며, 3박4일간 주로 오락과 체육

활동, 휴식을 하였고, 3일차에는 구룹별 다낭 외출도 허락 되었다.


외출은 사전 교육시킨대로, 한국사람이 운영하여 보안이 보장된,

코리아하우스 식당, 옐로우하우스 사우나 있는 근처로 제한하였다.

 

1970. 11월 중순경, 다낭 휴양지에서 복귀하자마자, 청룡부대 각 중대 1명씩의 소대장

들이 푸캇산이 있는 근처 맹호 30연대 3대대11중대(일명 돌산중대)에 견학 차,헬기로

30연대 본부를 경유하여 당일로 다녀오고, 바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김정문 중위에게

 11중대3소대의 막중한 임무를 인계 하고, 화기소대장의 직책을 하지 않은 채,

 바로 부중대장의 임무를 맡게 됐다.


(중대작전을 나가며..대대상황실과 연락하는 소장장과 통신병..그리고 뒤이여 중대원들)

 

1971년 12월 중순경, 정길남 중위(동기생)가 부임하여, 2소대장에 정길남 중위가

보직되고, 1971년 2월 초순, 한상희 대위와 이윤호 대위(해간33기)가 중대장 보직

교대되면서, 화기소대장에 신호일 중위(동기생), 1소대장에 최진홍 중위가 보직됐다.


1971년 4월 하순 황룡 14-2호(4,23 - 5,3) 작전으로 중대장과 2/3 병력이 QUE SON

작전지역으로 이동하고, 1/3병력으로 11일간 중대기지 방어임무를 수행하였다.


5월에는 여단 모범소대장으로 뽑혀, 다낭 비행장에서 C-53 수송기 타고 3박 4일간

사이공 관광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고, 맹호부대 및 백마부대 모범 소대장들과

같이 이세호 주월사령관 공관에서 다과회와 군불 포함 포상금 30불도 받았다.


청룡부대는 나 혼자라서 외롭기도 하였지만, 푸캇산이 있는 비행장에서 탑승한

맹호부대 수색중대 소대장이 3일간 동행하여, 주월사에서 지정해 주는 경화호텔에

숙소를 잡고, 사이공 소재 코리아하우스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4일 중 둘째 날은 둘이서 시내 공원(쫀락)도 구경하고. 남주와 맥주도 마시고

저녁이 되어, 간 크게도 Tan Son Nhut 공항 근처 민가여관에서 잠을 잤다.


실탄 5발이 장전된 권총을 믿고, 또한 방에 비치된 방명록에 맹호, 백마, 청룡부대

용사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고, 2-3명의 알고있는 선배의 이름도 보였기 때문이다.

돌아올때는 Tan Son Nhut 공항에서 C-53 수송기를 이용하여 다낭공항으로 귀대하였다..



⑻ 귀국선


귀국하는 귀국자...GMC 관품상자와 귀국자들을 실고 여단본부을 떠나는 귀국자의 모습...

 
6월에 중대는 일상적 근무로 한번의 상황도 없이 조용했고, 고국 위문단이 중대

현지까지 와서 중대 용사들을 위문해 주었다.


드디어, 1971년 7월10일경 기다리고 기다리든 경비중대로 명령이 났다.


화기소대장인 신호일 중위에게 부중대장 직책을 인계하고, 중대 보급추진 헬기로

알파장에 도착하여 경비중대로 갔었다.


경비중대에서 귀국 행정정리와 귀국박스 검열 등 절차를 거친 후 여단 연병장에서

귀국신고를 마치고, 고국으로 가는 귀국선에 승선함으로써, 나의 6진 11제대 파월

전쟁 story는 끝이 납니다.


(전방중대을 찾아가..위문공연 중...무대아래 장병들은 그늘을 위해 당시 작전지역에서 구할수 있는 항공조명탄 낙화산으로 천막을 대신한 모습이..월남전 아니고서야.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⑼ 참전수기를 마치면서

 

1960년대의 월남참전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외파병이었으며, 국가 경제

발전의 기초와 조국 근대화 도약의 동력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월남참전을 결정한 당시의 상황은 미·소 양대 진영의 냉전체제가 계속되고 있었고.

국내사정은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혁명으로

이룩한 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여 불안정 하였으며, 경제 개발계획을 추진하여 산업을 발전시키고,

 실업자를 해소하여 가난을 극복하여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의 결심과 미국의 국내사정에 따라 한국군 파병이 결정되었고,

자유의 십자군으로서의 막중한 사명감과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대한민국 20대의

 수 많은 젊은이들이 이국의 전쟁터에 가라고 해서 갔고, 싸우라고 해서 싸웠고, 철수

하라고 해서 철수했습니다. 마치 소, 개, 닭이 싸움장에 들어가듯이......

 

오직 조국의 명령으로 머나먼 이국땅 뜨거운 베트남 전선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

에서 울부짖기도 하고, 전우의 처참하고도 참담한 장면을 보고 피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 하기도 하며, 또 적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하여서는 안될 못된 짓을 하여야만 했던

그 20대의 수 많은 젊은이들이 어느새 고희가 되었습니다.


내 조국이 가야할 길의 중심에 서 있었던 너와 내가 이미 지나버린 40년 세월이기에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나 버렸습니다.


더 잊혀지기 전에 ~ 더 없어지기 전에 그 피땀어린 현장을 영원히 저장 보전 하고저 하며,

그 때의 눈물어린 기억들를 회상하면서, 당시 청룡 3대대 11중대 3소대 전우들에게 고마움의

표현을 여기 나의 회고록에 기록으로 남깁니다.

 

“나의 전우들이여 고마웠습니다”라고

미지막으로. 두 번의 기습공격과 한 번의 조우로 인한 접전, 베리아 대홍수 대피작전,

그리고 여러번의 소대 수색/정찰 및 야간매복 작전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전사상자없이 4개월 동안의 월남 전투 소대장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분대 단독 야간매복 작전에서 부비츄랩 폭발로 전사한 김명수 분대장에게

 삼가 명복을 빌며, 또한 함께 심한 부상으로 마음고생 하신

 이윤길(?)상병에게 위로의 말씀 올립니다. 너무 늦었습니만.....


*** 

 


월남전쟁 이야기는...여기서 줄이며 그때 산화한 전우들에게

명복을 빌며.. 지금도 부상으로 또는 고엽제로 고생하는

전우들의 쾌유도 빕니다..


그리고

그동안 집필하신 원명복 청룡3대대11중대3소대 소대장님도

수고했으며 감사합니다  늘건강하시고..

이곳 호이안청룡으로 자주 들려 주세요.

대필-청룡:호이안박,


     

그동안 읽어주신..전우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