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일기/해병들의 이야기

불우한 내 청춘의 클라이막스, 억울한 해병대 이야기

머린코341(mc341) 2015. 11. 6. 23:08

불우한 내 청춘의 클라이막스, 억울한 해병대 이야기 



지난 포스트에서 방영예정인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소개하면서 시대의 폭력과 그로 인한 불화로 어둡기만 했던 내 빛나는 청춘의 시절을 추억해봤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MBC의 에능프로 '진짜사나이 시즌 2' 덕분에 불우한 내 청춘의 시절로 눈길을 돌리며 오랜 시간 걷고 있지요.


제가 해병대 출신이니 해병대 편이 방영되고 있는 진짜사나이를 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물론 지금의 해병대와 제가 겪었던 해병대는 분명 많이 다르리라 짐작하지요.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조건과 환경, 사고가 바뀌었으니 군영도 바뀌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바뀌지 않은 것은, 절대 변할 수 없는 것은 해병으로서의 긍지, 곧 명예일 것입니다.


혹시 또 해병, 저들끼리의 잘난 체니 꼴통해병의 깡다구짓을 미화하는 이야기라 치부하시며 눈쌀을 지푸리실 분들을 위해 제자 먼저 고백하겠습니다.


저 스스로 가장 혐오하고 부끄러워 하는 것이 타군을 무시하며 우리끼리 잘난체 씨부렁 대고 개차반의 성정을 무슨 영웅담인양 떠벌리는 개병들의 짓거리입니다.


또한 시국 사태에서 툭하면 몰려다니며 깽판을 치는, 소위 애국이니 구국이니를 마구 써대는 해병들의 단체를 증오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저 입니다.


가장 빛나야할 청준의 뜨거운 한 때에 해병대를 다녀온 해병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그저 내가 겪은 해병의 시절을 추억하려 할 뿐입니다.

 

광주에 피칠을 한 채 권력을 찬탈한 대머리의 신군부가 포악을 떨치던 80년대의 앞머리에서 저는 해병대에 입대를 했지요.


군바리 정권의 소위 녹화사업에 저항하겠다며 저는 자원을 했고 휴학과 동시에 바로 입대할 수 있는 해병부사관(당시 하사관)을 택했습니다.


동기들과 거의 세 살 이상의 차이가 나는 늦은 입대였기에 모병관의 부사관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인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직업 군인이 아닌 일반 하사, 즉 병과 같은 의무복무기간만을 채우면 되는 무늬만 갈고리였습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게 당시 해병대는 유일하게 30개월의 의무복무기간으로 타군에 비해 3개월 이상 짧았고  자원 병력이었으며 의무복무임에도 불구하고 부사관에 자원할 수 있는 모병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각설하고 휴학과 동시에 저는 진해 교육사령부의 6정문을 들어섰습니다.


1973년 박통의 군부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에 잠재적 위험인자인 해병대를 해체시켜 해군에 편제해 놓은 상태였기에 해병자원들도 진해를 거쳐야했지요.


해병대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그리고 불우한 해군해병의 시절에 저는 해병이 되었던 것이죠.


특전사 출신의 대머리 정권은 아예 해병대를 없애버리기 위해 별 짓을 다 할 때였습니다.


가장 단단한 결속력을 자랑하는 꼴통짓의 대명사 해병전우회의 존재가 그 때만큼 고마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제대 후에야 깨달았지요.


아무튼 우리는 고난의 그 시절을 견뎠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군기는 더욱 엄정하고 정말이지 고달픈 날들 속의 해병대였습니다.

 

해병대 부사관교육, 훈련소에서만 24주 6개월을 훈련생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진해 6주, 그리고 포항에서의 18주... 지옥주니 극기주니 하며 요즘 훈련소 생활의 정점이라 홍보되지만 우린 6개월 하루하루가 극기주였지요.


진해에서는 해군 해경 등 타군에 보여주기 위해 더욱 굴렸고 때렸으며 집어 넣었습니다.


살이 트는 영하의 날씨 속에서 진해와 포항의 바닷물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는 담겨져야 했습니다.


김장철 숨을 죽이는 배춧잎처럼, 염장을 당하는 단무지처럼 늘 바닷속에서 동터오는 새벽을 보아야했지요.


살은 갈라지고 몸은 얼어 굳었으며 이만이 따닥따닥 부딪쳐 아직 살아있는 생물임을 증거하는 날들이었습니다.



우린 해병대 시절 공식 군가보다는 우리만의 사가를 더 많이 불렀고, 인식표, 소위 군번줄을 목에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해병의 곤조인지 저항인지 고집인지...


동기들과 하루도 싸우지 않은 적이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지요.


순검(점호) 준비를 하다가, 쓰레기를 버리려 소각장에 갔다가, 교육 중 화장실에서 등등


아무 때고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녀석들은,  저마다 한 동네에서 침 좀 뱉었다는 믿기지 않는 이력을 고래고래 외치며 시도 때도 없이 뒹굴었습니다.


그 무리에 저도 아마 빠질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ㅋㅋ

 

싸움의 이유는 오직 하나, 저만 살겠다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 무거운 IBS(침투용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모래밭을 달릴 때 슬쩍 내 목만 움츠리면 나는 견딜만 하지요.


대신 다른 동기들은 더욱 죽을맛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것이 다른 동기의 눈에 보일 때, 가뜩이나 성에 안차는 넘이 하는 짓에 의심이 들 때... 고민과 궁리는 전혀 없이 그냥 질러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다 못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증오하던 동기란 존재가 그 싸움과 고난의 시간을 통해 서로를 부등켜 안고 우는 때가 옵니다.


비로소 그 때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빨간 명찰의 사니이가 되고 명예로운 해병이 될 준비가 된 것이지요.


해병에게 있어 동기는 그 이후의 삶 속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자 벗이며 우정이란 낱말 속에 목숨까지도 나누려는 한 영혼입니다.


동기가 되어 서로 정을 나누고 짐을 나누어지고 목숨을 서로 나누고자 결의할 때 해병은 명예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진 맨 오른쪽의 내 후임은 아들 면회를 가서 묶었던 연평도 충민회관의 관리장이 되어 있었다. 인연이란 수시로 우리를 이토록 깜짝 놀라게 한다. 


그가 전입 오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전역했으니 그는 우리 중대의 맨 쫄병 하사였던 셈이다.


6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백령도 흑룡부대에서 저는 군대생활을 했지요.


전기도 없는, 경계용 서치라이트가 있는 초소에만 발전기가 운영되던 호롱불 군대에서 어둠과 안개만을 벗 삼아 컴컴한 해병의 시절을 보내야했습니다.


해병대의 곤조인지, 없애라는 국방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오직 해병대만이 병들의 침실과 하침(하사관침실)을 따로 고집했기에 병이고 하사관이고 툭하면 집합에 곡괭이 차루와 M1 목총이 밤부터 새벽까지 포상에서 참호에서 도깨비 방망이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시쳇말로 좆나게 맞았습니다. 굴렀습니다. 털렸습니다. ㅎㅎ

 

그 도저히 이해할 수도, 참을 수도 없는 징벌의 시간을,


어떤 이유로도 용인할 수 없는 그 불의한 폭력과 구타의 시간을, 그렇다면 우리는 왜 견디었던 것일까요?


해병대의 기수문화라는 것, 상승무패의 해병이 걸어온 해병대만의 곤조, 면면히 이어져온 해병대만의 전통과 유산 등등....


아닙니다.


무자비한 해병의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오직 하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체벌 뒤에 숨겨진 인간에 대한 따스함이었습니다.

 

간혹 아닌 인간도 있기야 있지만 무자비한 선임의 폭력이 그저 인간에 대한 증오와 아무에게나 무작위로 행해지는 경우는 저의 해병대에는 결코 없었습니다.


죽도록 때리고 빼앗고 굴리고 깠지만 그것은 엄정한 군기진작의 일부였고 이해 안 될 그 처사가 입영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우리만의 군영문화였습니다.


훈련소의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선임들의 폭력과 체벌을 어느새 우리 스스로 용인이 되는 때가 오지요.


내가 후임이 생겨서가 아니라 선임이 받아서 물려주는 해병정신이 내 가슴에 새겨질 때 우린 해병에 됩니다.


그때에야 진정한 해병으로 거듭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 전해지는 것이지요.



그토록 무참한 폭력을 휘두르던 선임이 후임의 첫휴가를 어떻게 보내주는 지 아십니까?


후임의 첫휴가가 가까워지면, 적어도 2 달 전부터 그 졸병의 사수는 부대내 가장 상태가 좋은 군복을 골라 매일 빨고 다림질을 손수하며 주름과 각을 잡습니다.


심지어는 물빠짐까지 체크하며 가장 보기 좋은 상태의 색감이 날 때까지 빨고 다리고 주름을 잡지요.


이윽고 휴가의 전날에 우리의 상징인 앵커를 상의 주머니에 다림질로 붙여 넣으면서 첫휴가의 날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줍니다.


십시일반 모은 휴가비가 전해지는 것도 그날 밤이지요.


저 꼴통새끼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후임들은 다들 당혹해 합니다. ㅎㅎ


그게 해병의 정신에 면면히 흐르는 해병혼인 것입니다.

 

상승부패, 절대불굴의 전통과 패기는 오직 그 '해병혼'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해병대만 훈련이 빡세다 말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더 깡다구가 있다고도 사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신체적 조건이 뛰어난 면도 살펴보면 그 넘이 그 넘 입니다.


그런데 왜 해병대는 그토록 질기게 또한 지독하게 스스로를 하나로 묶으며 군복을 벗어던진 세상에서까지 근성, 아니 곤조를 피우며 지랄?을 할까요?

 

바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우리의 결의 속에 해병혼은 다 담겨 있지요.


나의 불우한 해병시절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옆 길로 샜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이지요.


얼만큼 맞고 불우하고 불합리한 지옥을 견디어야 했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가장 빛나야할 청춘의 한복판에서 나는 비록 제복을 입고 해병대란 곳에 갇혀야 했을망정 그 영어의 세월 속에서 남자의 명예를 배웠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가장 든든한 벗이자 평생의 인연인 동기를 얻었다는, 결코 잃기만한 시간은 아니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 자랑스런 '해병'을 팔며 거리에 나서는 꼬라지 슬픈 개병 선배들에 분노가 차오릅니다.


어느 편이고 간에 시국의 현장에서 아무 때고 성스러운 우리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전우회 등등 애국을 빙자한 개병단체에 울분이 터질듯 합니다.


5.16 군사쿠데타 때 한강인도교를 맨 앞서 넘은 것도 김포의 청룡부대였고, 6.25 한국동란 당시 서울을 수복한 부대 역시 해병대였으며, 박통의 외화벌이로 최초로 월남땅에 상륙한 전투부대도 청룡여단이었습니다.

 

5.16의 쿠테타 당시 박통이 가진 수도권의 전투력은 해병대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그런 박통이 유신 총통을 자임히면서 저지른 배신이 바로 해병대의 해체였지요.


정권을 잡을 당시 가장 선두의 충견들이 그 후에는 가장 위험한 불순세력으로 몰려 제거 당하는 토사구팽의 사례는 모든 역사에서 동일합니다.


박통의 쿠테타 때 가장 실질적인 전투력으로 구테타의 주축이었던 육사 5기가 반혁명에 몰려 김종필의 8기들에게 숙청 당한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요.


그럼에도 정권 혹은 권력의 충견으로 꼬리를 흔들다 못해 컹컹 짖고 있는 색바랜 빨간 명찰들을 보면 불쌍하기 그지 없습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편제 및 상징은 모태가 된 미해병대의 것과 거의 닮아 있지요./가장 강한 군대 미해병대의 20세기 유일한 파트너가 우리 해병대였습니다.

 

해외의 언론들이 먼저 알아보고 전설을 만들어준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 '신화를 남긴 해병'의 낱말 속에는 누구도 범하지 못할 자랑스런 해병의 명예가 서려 있지요.


그 해병의 이름으로 정권의 주구가 된 해병단체들을 준엄히 꾸짖습니다.


누가 당신들의 투견짓에 우리의 이름을 빌려주었나요?


나는 결코 위대한 해병의 명예와 자랑스런 전통을 당신들이 함부로 쓰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선후배 전우의 대부분도 그럴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뜨겁고 빛나야할 청춘의 한복판에서 박박 기고 구르며, 혹독한 선임들의 온갖 폭력을 견디며. 오직 어둠과 안개밖에 벗할 것이 없던 백령도의 외로움을 참아내며 지킨 것은 내 부모 내 형제의 세상, 오직 내 조국의 안녕과 안위였습니다.


결코 대머리의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내 아이를 다시 해병대에 입대시키며 내가 입대할 때보다 더욱 불안한 긴장과 애틋한 감정에 마음 아팠던 것도 바로 조국에 대한 사랑일 뿐이었습니다.


그 자식의 입소하던 포항의 교육사령부에서 해군으로부터 (예산 인사 무기체계획득 등) 독립한 '대한민국 해병대'가 저는 얼마나 가슴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내 아이가 나처럼 반쪽짜리 해병이 아닌 진정한 마린이 될 날들을 상상하며 아비의 어쩔 수 없는 불안을 견딜 수 있었지요.




내 후배인 그 아이가 자랑스런 해병으로 연평도에서 북한의 포격도발을 응징하며 싸워준 것만으로도 저는 제 아이가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제가 그의 영정에 향초를 피우지 않도록 살아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그는 내게 할 효도를 이미 다 했다 생각하지요.


오늘 진짜사나이 해병대편을 보면서 저는 아득한 백령도의 해안이 떠올랐습니다.


그 어두운 해안을 선임들의 술보급을 위해 매일 달려야했던 탈영의 밤과, 그 술로 얼큰해진 선임들로부터 죽을 만큼 얻어터져야 했던 그 날들의 포상과, 죽도록 얻어터진 후 동기를 부둥켜안고 울어야 했던 참호 속의 시간이 그럼에도 그리운 것은 어인 까닭일까요?


무참할망정 그래도 그 때는 청춘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지요.

 

남자에게 있어 군대는 어느 누구든 어떤 이유이자 계기이고 또한 의미이며 전환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제 자식에게 말해주었듯이, 훈련소의 날들만큼만 부모를 생각하면 효자 아닌 이가 없을 것이지요.


군인으로서의 시간과 다짐을 제대 후 3개월 혹은 반 년만 유지할 수 있으면 못할 일이, 이루지 못할 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군대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공간이자 시간이 머무르는 장소입니다.

 


어쩌면 기억의 일부는, 삶의 한 때는 그 곳에 영원히 파묻혀 있는 지도 모릅니다.


위장복의 무늬처럼 그 시간과 공간의 일부가 되어 그곳에 남아 있거나 전사하여 묻혀 있을 지도 모르지요.


군인과 사람의 비유처럼, 한 때 사람이 아니었던 특별한 기억과 경험은 불우한 가운데에서도 행복한 꿈을 꾸게 하기도 합니다.


그 시절이 행복할 수 있는 까닭은 한 때나마 자신과의 싸움을, 나태한 스스로를 결판 내기 위해 몸부림친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지금도 그 부조리하고 불의한 폭력의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짐작하지요.

 

다시 그 시절로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나의 무참하고 혹독한 시간을 견디게 해준 친구야, 동기야!

나의 명예였던 눈부신 그날들의 전우야!


[이목블로그] 2015.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