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일기/해병들의 이야기

새벽 1시의 구타, 해병대는 지옥이었다

머린코341(mc341) 2016. 8. 14. 09:37

새벽 1시의 구타, 해병대는 지옥이었다


[내가 겪은 군대 내 폭력 ①] 선임의 '이빨 교육'... 죽을만큼 맞았다


'윤 일병'과 '임 병장' 사건으로 군폭력의 실상이 언론에 폭로됐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군대 내 가혹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민은 경악했다. 군 입대가 얼마 남지 않은 아들을 가진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공포가 자리 잡았다. 군대는 신뢰를 잃었다.


이 소식을 접한 대부분의 군필자들은 "터질 게 터졌다" 싶었을 것이다. 엄격한 내무 생활을 겪어오면서 다들 한 번쯤은 폭력의 피해자였거나 목격자 혹은 가해자였을 것이다.


나 또한 "이제야 터지나" 싶었다. 내 군생활에서 구타행위나 기수열외는 쉽게 자행되는 일이었다. 나 또한 군생활 중 선임병들의 이유 없는 구타에 '하극상'까지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해병대라 그랬는지 구타가 유독 심했다. 유사시 최전방에 투입되어야 하는 보병 부대이기에, 구타는 군 기강과 위계질서를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여겨지며 묵인됐다.


최근 국방부가 밝힌 대응책을 보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내놓은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 같다. 군대에서 폭력을 근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군 생활 때도 '구타 근절을 위한 캠페인'이 자주 열렸지만 간부들의 눈을 피한 폭력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지난 군생활에 겪은 일을 꾸밈없이 그대로 풀어보려 한다. - 기자말


▲ 눈에 띄는 해병대 버스 홍보 문구와 사진을 부착한 해병대 버스가 지난 6월 26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구타금지' 팻말 앞에서 자행된 구타


나는 2007년 포항 오천읍에 있는 해병대 신병 훈련소에 입소해 군 생활을 시작했다. 2009년에 전역한 후 이제는 5년차 예비군이 됐다. 해병대는 구타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적어도 내가 근무한 부대는 그랬다.


허름한 막사 입구에는 해병대 특유의 빨간색 글씨로 쓰인 '구타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얼마나 구타행위가 자행됐으면 '구타금지'를 명시화할까. 군대를 다녀온 대부분의 '군필' 남성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나에게 해병대는 '지옥'같은 곳이었다. 부대에 전입한 후 신병인 나를 위해 교육이 잡혔다. 공식적인 교육이 끝난 뒤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내가 속해있던 소대의 맞선임은 해병대 위계질서, 소위 '이빨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새벽에 나를 창고로 불렀다. 해병대에는 기간 병사들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공유되는 군가, 중대 선임들의 기수, 해병대 5대 정신, 계급별 행동 수칙 등이 있었다.


장교들 몰래 병사들끼리 이를 가르치는 교육을 통칭해 '이빨 교육'이라고 부른다. 보통 맞선임이 '사수'가 되어 신입 병사에게 '이빨 교육'을 한다. 맞선임은 바로 윗 기수의 선임을 일컫는 말이다.


취침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지기 전, 소대 선임인 A 일병이 주변 눈치를 몇 번 보더니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는 조용히 나에게 "새벽 1시에 자신을 깨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요청이나 부탁이 아니었다. 강압적인 말투로 "새벽 1시에 보고하라"는 지시사항을 내린 것이다. 이 말은 "오늘부터 구타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병사들이 생활하는 내무실에 불이 꺼졌다. 오후 10시였다. 소등 후, 나는 부대 전입 첫 날을 맞은 신병의 기합을 보여주기 위해, 천근만근 같았던 잠을 3시간 동안 참아냈다. 그리고 정확히 정각 새벽 1시에 맞은 편 2층 침대에 자고 있던 선임 A를 깨웠다.


"A 해병님, A 해병님. 새벽 1시입니다."


조용히 말을 했지만 기척이 없었다.


"A 해병님, A 해병님. 새벽 1시입니다


또 손으로 흔들어 깨웠다. 그때 별안간 선임이 일어나더니 침대 바깥으로 손을 잽싸게 빼내어 내 목을 후려갈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왜 맞았는지 이유조차 모르니 어안이 벙벙해서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무실에 자고 있던 다른 선임들이 깰까 봐, A 일병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저음으로 깔고 입을 열었다.


"이 새끼야... 선임을 손으로 흔들어 깨우냐?"


A 일병은 자신의 시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새벽 1시 2분이네. 너 내가 몇 시에 깨우라고 했냐?"


또 순식간에 손을 날려 내 목 옆을 가격했다.


"정각에 깨우라고 했지?"라며 나를 폭행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손으로 흔들어 선임을 깨운 것 그리고 정각 1시에 깨웠음에도 1시 2분에야 선임을 일어나게 한 것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이것이 해병대의 '룰'이었다.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온 선임은 내 귀를 자신의 입으로 잡아당기더니 "내가 나간 후 정확히 5분 뒤 창고로 와라"하고 지시를 내렸다. 구타행위에 대한 경고가 많아지자 의심받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선임이 먼저 내무실을 나간 뒤, 5분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 동안 강렬한 두려움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아냈다. 5분 뒤 나는 창고로 갔다.


▲  윤 일병 집단 구타 사망사건과 관련해, 군 헌병대가 윤 일병 사망 5일 뒤인 지난 4월 11일 실시한 현장 검증 사진.  ⓒ 군 수사기록


'사가'의 '사'는 '죽을 사'였다


천천히 문을 열고 창고로 들어갔다. 의자를 딛고 올라선 그 일병 선임은 두꺼운 박스와 테이프로 불빛이 새어나갈 유리 창문을 모조리 봉하고 있었다.


그런 일병 선임의 뒷모습을 보니 구타에 대한 공포심이 급격히 일었다. 잠시 후 내게 벌어질 일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창고에는 '구타금지'라고 쓰인 입간판 두어 개가 바닥에 포개져 있었다. 선임은 작업을 끝내자, 창고의 불을 켜고 제대로 봉합됐는지 잠시 살피더니 내게 걸어왔다.


그는 편안하게 앉으라고 내게 권했다. 자기도 이병 때는 그렇게 맞았다면서, 지옥 같은 군 생활은 다 그런 거라며, 누구나 그렇듯 해병대에 온 사람이라면 겪는 일련의 신고식이라고 사뭇 자상하게 말했다. 그는 시계를 보더니 말을 멈추고 갑자기 노래를 시작했다.


"빠따도... 아구창도... 나홀로 씹어 삼키며..."


조용하게 불렀던 탓에 노래 가사의 음을 찾기가 힘들었다. 짧은 노래가 끝난 뒤, 이 노래는 해병대 '사가' 중 하나라는 설명을 붙였다. '사가'는 정식 군가가 아니라 병사들 사이에서만 불리는 노래다.


군대 밖 '사회'에서 부르던 노래의 음에 나름의 개사를 붙였다. A 일병은 "사제(군용이 아니라 사회에서 만든 제품)할 때 그 사를 쓴 사가인지, 아니면 죽을 사(死)자를 써서 사가인지는 모르겠다"고 부연했다. 그리고 갑자기 선임이 말했다.


"불러봐."


나는 당시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일련의 푸념이라고, 그 연장선에서 선임 혼자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그 노래를 굳이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고 흘러들었기 때문에 그 순간 기억을 되짚어 가사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겨우 한 마디가 기억이 나서 불렀다.


"빠따도..."


새빨갛고 샛노란 불이 번쩍하더니 귀에 이명 현상이 왔다. 일병 선임이 옆 목을 주먹으로 가격한 것이었다.


그제야 '사가'의 '사'가 죽을 '사'자에서 빌려온 것임을 깨달았다. 죽을 만큼 맞고서야 외워졌다.


사가 말고도 구타를 동반한 수많은 '이빨 교육'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날 밤은 꽤나 길었다.


[오마이뉴스]2014.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