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따까리 시절 (2).... 끝
형제 같았던 우리 네사람(조대위/임대위/정대위/ 구중위 본인)은 해간 26기 조 선배의 불평으로 여관에서 개인의 하숙집으로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예전에는 꽤 잘 살았을 것같은 낡은 한옥집이 고색을 담고있을 정도였는데 대문을 들어서자 덩그렇게 있는 입구방에는 이미 헌병학교의 교수부에 있는 육군 중위가 세를 들어 잠만 자는 하숙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음 주일 그 방을 비울 것이라는 말에 탐을 내기는 했어도 벌써 인원이 네명이라 방 두개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아래채에 있는 방 두개를 쓰기로 했다.
주인 마님은 50대 초반이나 되어 보이는 홀로댁이었고 자식들은 모두 객지로 나가 그 큰 집을 일하는 사람과 단 둘이서 사는 입장이라 하숙을 치게 된 그런 가정이었다.
날씨는 깊은 가을이 찾아 와 새벽녘이나 저녁나절이면 약간은 으시시한 기분이 들곤 했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 와 솔로 구두를 문지르고 있는 나를 보고 역시 해간 26기인 임 선배님이
"야, 이제 졸업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졸업 후 우리가 서로 또 헤어져야 할것 아니야?"하고는 말을 붙였다.
"뭐 그거야 할 수 없지만 우선 사령부에 얘기를 잘해서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네요"
"야, 너 사령부에 누구 빽있어?"
"아니 빽없이 헌병학교에 교육 오는 사람도 있소?"
"그래 넌 누구야?"
"사령관님있잖소"
"햐~ 이 시끼봐라. 그래 어떻게 되는데..."
임 선배는 방문을 약간씩 열어 놓고 우리 대화를 듣고있던 나머지 두 선배들을 번갈아보며 놀랜 표정을 지어보였다.
순간 모두가 내 대답을 듣고 싶어 약간은 긴장들을 하는 것 같이 느껴져 나는 더욱 장난끼가 발동을 했다.
"우리 집안 아니오!" 하고는 힘을 주어 말했더니 이번에는 임 선배가 표정을 달리하는 것 같았다.
"그래 어떻게 되는데?"
나는 내 뺄 채비를 하고는
"모두 단군의 자손이니까 한 집안이지 뭐..."
"저눔 시끼 너 일루 안와!"
"내 잡아보~시오" 대문간까지 달아난 나에게 내 구두 한짝이 날라왔다.
"너 이시끼 오늘 저녁은 다 먹었다"
가끔은 나로부터 엉뚱한 짓을 당하거나 이불을 깔아 놓은 방안에서 내 아래에 깔려 신음을 해야했던 나보다 다섯살이나 연상인 임 선배님은 마치 터울이 지지 않는 친형제처럼 서로가 장난이 심한 사이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조선배와 정 선배는 우스워 죽겠다고 나딩굴었다.
저녁에는 반찬에 메뚜기 볶음이 나왔다.
나는 어릴때 생각이 나 좋아라고 입에 집어 넣기가 바쁜데 조 선배님은 위장이 별로 안좋은데다 입맛이 까다로워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젓가락으로 메뚜기 몇마리를 그릇 바깥으로 한번 탁 팅기고는 "아니 이것도 반찬으로 내놓냐?"하고는 불평을 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조 선배님이 자기 방으로 모두 집합을 시켰다.
사실 나도 졸업 후에는 어떻게 배치가 될지 의문이 많았고 그 보다는 말이 위탁교육이지 장교일 경우 해병대에서 예산을 들여가며 교육을 시켰는데 그 성적이 3분의 1 이상에 들지 못하면 낙제로 평가해서 그 병과에서는 탈락이 되게 되어있었던 것이 우리 모두의 걱정거리였던 것이다.
또 당시는 우리 해병대의 헌병장교들 거의 대부분이 헌병학교의 교육을 거치지 않고 아무나 직책을 맡았던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 네 사람을 범죄수사 과정의 교육을 받게 했으므로 해병대로써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 일만 제대로 해결이 된다면 대위일 경우는 작은 지역의 헌병대장이나 큰 부대의 과장의 직책을 맡을 수 있게 되고 나처럼 중위일 경우는 작은 부대의 과장이 되게 되어 있었다.
이윽고 조 선배님이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정 대위는 몰라도 모두가 3분의 1 이내에 든다는 보장은 없어... 그러니까 성적을 이제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는것이고 헌병학교의 교무 행정의 실무책임자가 상사라는데 헌병학교에서 해병대로 보내는 공문에만 성적 순위를 3분의 1 이내로 조정해 보내 달라고하면 될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고있어"
"그래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그 친구를 만나보지 뭐" 동기인 임 선배가 말을 거들었다.
"그럼 혹시 비용이 들면 우리가 각자 내야지요" 나는 따까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군대생활을 많이 한 선배들이 역시 요령이 있는 사람들이구나 싶은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돈을 내는 일밖에는 없다고 여겨 나온 말이었다.
"야, 그런거는 들때 들더라도 아직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단호하게 말을 했던 조 선배님은 결국 다음날 동기생인 임 선배님을 하숙 집에 그대로 둔채 혼자서 실무책임자를 만나 담판을 하고 왔는데 내용인즉슨 차 한잔만 하고 양해를 구하고는 그냥 돌아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결론을 얻고 와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평소 헌병학교에 있던 육군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해병대에게 잘 해줄까 하고 마치 연구를 하는 사람들 같이 느껴질 정도로 친절 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후일 헌병감실에서 그 서류를 뒤져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얼른 보았는데 우리끼리의 성적 순위를 계급이 낮다고 그랬는지 나를 4명 중 맨 꼴찌로 넣어 놓아 혼자서 웃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사령부에서나 헌병감실에서 판단을 할 때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장교들이 되었고 교육을 마치고 헌병감실의 차감께 신고를 했을 때는 여러명이 위탁교육을 갔는데도 모두가 전에 없는 우수한 성적들을 거두었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나는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역시 군대는 짬밥이야!"라는 사병들이 흔히 쓰는 말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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