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2년) - 중공군에게 한이 맺힌 함덕창 중령
52년 10월 2일 밤에 감행된 중공군의 제1차 추기공세 때 사천강 전초지대의 우일선에 배치되어 있던 1대대의 대대장 함덕창 소령, 그는 중공군에게 한이 맺힌 지휘관이었으며 아군의 포진지(105밀리포)가 침묵한 가운데 최전방 전초진지인 36고지와 67고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이런 상황에도 보병대대의 화력만으로 적을 격퇴시켜야 한단말이냐!” 하며 주먹으로 CP 안에 있는 탁자를 내리쳤던 맹수와도 같은 지휘관이었다.
1926년 서울에서 출생. 47년 1월 해안경비대에 입대하여 그 해 6월 소위로 임관했던 그는 해병대가 진해에서 제주도로 이동했을 때 제주경비부 소속 YMS 514정 점장(대위)으로 근무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즉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 지 3일째 되던 날(49.12.31) 그는 장차 해병대의 식구가 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제주도에서 근무하는 해병대 장교 전원(악 30명)을 제주읍에 있는 경회루라는 중국음식점으로 초대하여 자신이 마련한 비용으로 성대한 위로연을 베풀었고, 또 그 다음날 아침에는 그 전날 밤에 마신 술이 덜 깬 데다 불순한 날씨에 풍랑이 너무 사나워 출항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서울로 출장가는 신현준 사령관과 김성은 참모장 일행을 목포항까지 실어다 나르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결과 “갈 수 있다!”며 큰 소리를 쳤던 것과는 달리 거친 풍랑 때문에 슬로우 엔진으로 조타한 배가 계속 중국쪽으로 떠내려 가는 바람에 필사적인 사투를 했는데도 1월 1일 밤에 목포항에 도착해야할 배가 그 다음날 아침에야 가까스로 도착하게 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위기에 직면했던 승무원들은 칠흑 같은 밤에 갑판 위로 올라가 마치 최후의 순간을 맞는 사람들처럼 비장한 목소리로 애국가를 제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함덕창 중령이 해병대로 전입했던 시기는 그가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을 수료한 52년 7월경이었고, 남상휘 중령의 뒤를 이어 1대대장으로 취임했던 그는, 1대대가 연대의 예비대가 되어 하성지구(김포)로 이동해 있을 때 처음으로 (물론 전투단 본부의 결점에 따른 것이었겠지만), 사병들의 사기앙양을 위해 부대본부 인근 지역에 위안소를 개설한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서울지구에 장병 위안소가 생긴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었음) 일본 스모토리(씨름꾼)을 연상케 하는 육중한 체구에 두주를 불사했던 그는 엽총을 가지고 논두렁에 엎으려 날아가는 새를 겨누다 말고 총구를 논바닥에 떨어뜨린 채 드렁드렁 코를 골았다는 일화를 남겼다.
왕년의 1대대장 항덕창 중령이 중공군에게 한이 맺친 까닭은 중공군의 제1차 추가공세때 1대대의 최전방 전초지지인 36고지와 67고지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기 때문이며, 그가 “이런 상황인데도 보병대대의 화력만으로 적을 격퇴시켜야 한단 말이냐!”하며 격분을 해서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 쳤던 것은 해병 제1연대가 장단지구 전선으로 이동한 직후 여러 전초진지와 주저항선 부대에서 지나치게 적의 탐색전에 과민했던 나머지 적은 병력이 기습을 해도 많은 병력으로 과장을 하여 걸핏하면 105밀리포의 지원사격을 요청하는 바람에 지원부대인 미 해병사단에서 전투단장 김석범 대령에게 포탄을 절약할 것을 요청하자 앞으로는 전투단장의 승인이 없는 한 보병대대의 화력만으로 적을 격퇴시키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고, 그러한 지시가 내려져 있는 상태에서, 말하자면 여느 때처럼 소부대의 기습공격인 줄 착각하고 있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그런 변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로서는 문제의 그 지시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54년 여단본부(금촌) 인사참모로 있을 때 함덕창 소령은 그 해 4월 강화도에서 발생한 강화도 육군 특무부대 난입사건에 연루된 독립 14중대장(강화부대장) 석태진 대위가 여단본부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3개월 간의 정직처분을 받게 되자 마치 의인(義人)을 고무하듯 정직처분을 받게 되면 규정에 따라 급료의 3분의 2를 몰수하게 돼 있었는데도 전액을 주겠다고 했고, 서울에 가서 쉬고 오라며 돈이 될 여러 벌의 파카와 쌀 한 가마니씩을 지급해 주었을 뿐 아니라 징직기간이 끝난 후에는 석 대위의 동기생들(해간3기)은 소총중대의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시기에 4.2인치 중박격포중대의 중대장으로 발령 받게 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는데 그의 그런 행위에 대해 과거 그와 교분이 있던 혹자는 의리를 중시하는 그의 ‘야쿠자’기질과 의협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운과 관운 모두를 타고나지 못했던 함덕창 중령은 ‘60년 3월 중령의 계급으로 예편한 뒤 약 10년 간 인천에 있는 모 목재회사와 보루네오의 관련기관과 계약을 맺고 매년 수십 명의 한국인 노무자를 고용하여 보루네오로 가서 목재회사가 필요로 하는 나무의 묘목을 심어 두었다가 십년 후 그 나무들이 일정한 크기로 성장을 하게 되면 계속 벌목을 해서 계약을 체결한 그 목재회사로 운반해 주는 사업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낭만적인 바다의 사나이들처럼 취중에 일본 시인이 쓴 바다와 관련된 시를 암송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친구와 마작과 주색을 가까이 하며 무질서한 생활을 하다가 종내는 비참한 말로를 걸은 특이한 기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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