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52년) - 1대대의 기습소대장 김영하 소령
해병제1인대가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서부전선(장단지구)으로 이동한 뒤 주저 항선에 배치된 각 대대와 예비대대에서는 적정 탐색과 포로획득을 위한 야간기습전을 “오늘은 누가 가나?”하는 말이 나 돌았을 정도로 빈번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그 기습전은 성공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실패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한편 기습대를 지휘한 소대장들 중에는 용감한 소대장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1대대의 ‘기습소대장‘이란 별명이 붙어 있던 김영하(金永夏․해간7기)소위처럼 담대하고 용감한 소대장은 드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병제연대가 장단지구로 이동한 바로 그 해 (52년) 7월 중순경 작전지역의 우일선에 배치된 1대대에서는 공격소대와 지원소대로 편성된 기습대를 적진으로 진입시켰고, 작전의 지휘는 155고대 임시지휘소에 위치한 대대장(남상휘 중령)이 했다.
그 날 밤 기습대는 물이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사천강을 무사히 건너가긴 했으나 적진으로 접근해 가는 도중 그 길목에 잠복 중인 적병들에게 발각되어 진출로를 달리한 양대 소대의 유선이 모두 절단되고 적의 포위망 속에 들어가는 바람에 155고지 중턱에 위치한 대대의 임시CP에서는 기습대와의 유선통신이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기습대의 무전기마저 침묵을 지키고 있어 대대장을 비롯한 참모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무전기의 안테나 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밤 따라 푸른 탐조등 불빛이 허공을 비치고 있는 판문점 바로 오른편쪽 미 해병5연대 지역(아군대대의 우인접부대)에서는 때마침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총 포성이 요란했는데, 약 10분 간에 걸친 그 우군부대와 중공군 간의 공방전이 끝난 직후 무서운 적막감 속에 갑자기 무전기(SCR536)의 안테나에 와 닿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원소대장 임 소위의 목소리였고 그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대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 지원소대가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지원부대를 보내주십시오. 대 대대장님...”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처했으면 저럴 수까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는 목소리였다.
지원소대장의 읍소(泣訴)에 대해 대대자 남 중령은 일부러(적이 도청할 것으로 생각하고) 지원부대를 즉시 보낼테니 안심하고 대처하라는 나용의 응답을 보냈는데, 그로부터 2~3분쯤 지난 후 이번에는 공격소대장 김영하 소위의 목소리가 안테나의 끝을 조용히 노크하듯 와 닿았는데, 귓전에다 속삭이듯 도란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침착하고 차분해서 듣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착 가라앉게 해 주었다.
그는 지원소대 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도 지원병력을 보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포위를 당한 상태이지만 사주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돌파구를 열어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말하자면 지휘관으로서의 명확한 상황판단과 임기응변의 적절한 행동방식을 차근차근 조용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용감하고 담대(膽大)한 지휘관이 아닐 수 없었다.
67고지에 대한 2차 역습전 때 공격 소대장이었던 김영하 소위는 그가 비호(飛虎)와 같이 적진으로 뛰어 들었을 때 호 속에서 뛰쳐나온 2명의 중공군 가운데 한 놈은 착검한 칼빈소총의 대검으로 척살하고 한 놈은 그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번개 같이 해치웠는데, 비록 날벼락 같은 적군의 탄막 사격으로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지만 그의 용감한 전투행위를 155고지(도라산)OP에서 쌍안경을 통해 지켜보고 있던 미 해병1사단의 부사단장(대령)으로부터 그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들었다.
즉 철수를 한 역습대가 트럭을 타고 집결지인 1대대 후방CP에 도착했을 때였다. 지프를 타고 먼저 그 곳에 도착하여 짐짓 김 소위를 기다리고 있던 부사단장은 김 소위에게 악수를 청하며 “귀관처럼 용감한 사람은 본 적이 없소”라고 했다. 그 당시 1대대 인사부관으로 있었던 필자는 바로 그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말을 들었었다.
67고지에 대한 6차에 걸친 역습전이 무위로 끝나고, 또한 좌일선 대대의 전초진지인 87고지마저 피탈을 당하자 전투단(10월 1일부로 연대에서 전투단으로 승격)본부에서는 막심한 피해를 입은 1대대를 김포로 이동시키고 김포에 있던 3대대를 장단으로 이동시켰는데, 1대대가 김포로 이동하여 재정비를 하고 있을 때 1대대장 함덕창(咸德昌) 소령은 1대대의 기습소대 로서 용맹을 떨친 김영하 소위를 대대 S-2로 임명했으나, 대대 정보장교가 되어 김포-․강화지구에 대한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그는 불운하게도 지프차가 뒤집히는 교통사고로 입원을 한 뒤 68년 8월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했다.
한편 예편 후 김영하 소령(1927년 황해도 신계에서 출생)은 ‘83년도에 설립된 가족병원(원장 오광섭박사가 김영하씨의 생질)인 의료법인 대남병원(부산 사상구 소재)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500개의 병상을 갖춘 대남병원은 국내 최대의 정신신경과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왕년의 기습소대장 김영하 이사장은 다음과 같은 두 토막의 보은비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첫 번째 비화는 1944년 그가 봉천(奉天) 동광중학교 4학년 때 일본군의 군수공장에서 근로봉사를 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노역을 강요당하고 있던 2명의 미군포로에게 몰래 도시락을 제공한 그 인연으로 8․15 후 귀국을 결심한 가족들이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을 때 용케도 그를 찾아온 그 미군들이 봉천역에 배치된 소련군에게로 가서 7장의 기차표를 구해 주더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비화는 9.28 수복 직전인 50년 9월 26일경 을지로 7가 우체국 지하실에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숨어 살고 있을 때 느닷없이 들이닥친 빨간 완장을 착용한 청년들에게 동생과 함께 끌려갔던 그는 남산 처형장으로 이송되기 직전 뜻밖에도 그 현장에 나타난 을지로 7가 우체국 직원(권운옥씨)의 선처로 극적으로 풀려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권씨가 김 이사장 형제의 목숨을 구해 준 까닭은 우체국에서 자취생활을 한 그 권씨를 김 이사장의 모친이 친아들처럼 여기며 온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김영하 이사장은 “남에게 덕을 베풀면 반드시 갚음이 따른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93년 을숙도에서 해병전우회의 전국대회를 개최할 때 그 대회의 대회장으로 추대되어 물심양면으로 큰 역할을 한 공포로 전우회 중앙회 회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던 김영하 이사장은, 그 후 해병대 참전 기념사업에서 장단지구의 전몰장병 추모비 건립을 추진할 시에도 상당액의 성금을 갹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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