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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1951년 겨울, 한반도에 크리스마스는 없었다

머린코341(mc341) 2015. 12. 27. 13:11

[박수찬의 軍] 1951년 겨울, 한반도에 크리스마스는 없었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중인 장병들(자료사진)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평화’의 상징인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분쟁지역에서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며 갈등 대신 화합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를 갖는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여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고,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거닐며 데이트를 즐긴다. 도심에는 선물을 사기 위한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다.

 

언뜻 보면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6.25가 한창이던 1950~1951년 겨울, 한반도에서는 평온한 크리스마스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절망과 고통, 죽음의 공포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 가족과 생이별한 ‘눈물의 크리스마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가수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의 1절은 6.25 당시 생이별의 아픔을 겪은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6·25 전쟁 기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최고의 히트곡 가운데 하나다.

 

당대의 히트곡에 등장할만큼 1951년 1.4 후퇴는 평화와 희망 대신 절망과 아픔, 고통을 안겨준 크리스마스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1950년 10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 주도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해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격했다. 한국군 6사단 선두부대는 압록강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10월 말부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군과 유엔군에 공세를 가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위기를 맞았으나, 중공군은 공격을 멈추고 청천강 북쪽 적유령산맥으로 이동했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이러한 상황에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자”며 11월24일 ‘크리스마스 공세’를 명령했다. 하지만 공세 시작 하루만에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부딪혀 큰 손실을 입고 같은달 30일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서부전선의 미 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해 12월 말 38선 부근으로 후퇴했다. 동부전선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은 중공군에게 퇴로가 차단돼 흥남부두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했다. 미 해병대 역사상 최악의 전투 중 하나로 기억되는 장진호 전투도 이 때 발생했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상황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유엔군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부서진 철교를 넘어 대동강을 건너고, 유엔군 수송선을 타기 위해 며칠 밤낮을 추운 부두에서 기다리는 그 자리에 크리스마스가 있을 곳은 없었다.

 

◆ 1951년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삶과 죽음이 몇 초 만에 엇갈리는 전장은 크리스마스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1951년 12월 25일, 한국군 7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강원도 양구군 1090고지에 중공군이 400여발의 포탄을 집중 발사하면서 ‘24시간의 평화’는 깨졌다.

 

1.4 후퇴 이후 6.25 전쟁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여러 차례의 진격과 후퇴를 겪은 유엔군과 중공군은 더 이상의 전면전을 수행할 의지도, 능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F-4U 전투기의 공습을 지켜보는 미 해병대원들.

 

양측은 ‘지는 전쟁은 피하자’고 판단, 판문점에서 휴전협상에 돌입한다. 몇 주면 휴전협정을 체결할 수 있을 거라 예상됐지만,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문제를 놓고 양측은 1년 가까이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전선 일대의 고지들을 둘러싸고 치열한 국지전이 거듭됐다. 백마고지 전투, 베티고지 전투 등은 당시의 참상을 대표하는 전투로 남아있다.

 

1951년 12월, 중공군은 크리스마스를 이용해 중동부전선 일대의 전황을 뒤집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따라 강원도 양구군 1090고지의 한국군 7사단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핵심 지역인 ‘1090고지’를 한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이를 탈취하기 위해 기습을 감행했다.

 

크리스마스 당일부터 28일까지 중공군 204사단과 한국군 7사단은 현재 ‘크리스마스 고지’라는 별칭이 붙은 1090고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이용해 고지를 포위하고 야간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우리 군은 밤에 일시적으로 밀렸지만 날이 밝자 이를 격퇴했다.
 
겨울을 맞아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산은 국군과 중공군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캐롤과 축복 대신 총성과 포성, 신음소리가 메아리쳤다.

 

4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한국군은 사살 172명, 포로 5명 등의 전과를 거뒀다. 반면 22명이 전사하고 21명이 실종됐으며 10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한 아주머니가 폐허가 된 동네에 주저앉아 있다.

 

크리스마스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은 이듬해 2월, 또 다시 공세에 나섰으나 패퇴했다.

 

‘크리스마스 고지’라는 이름은 얼핏 보면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6.25 당시 우리 군이 현재의 휴전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이름 모를 고지에서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계일보] 2015.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