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해외 출전<2편> - 연합군의 철군

머린코341(mc341) 2017. 8. 1. 09:58

해외 출전<2편> - 연합군의 철군


  연합군의 철군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참전당사국인 미국과 월맹간에 추진되고 있던 평화협상의 진전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정부가 끝내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협상을 통한 월남문제의 해결을 모색하게 된 것은 첫째는 수십 만의 병력과 우수한 전쟁무기를 갖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승산도 없는 전쟁에 막대한 전비와 희생을 무릅쓰고 있는데 대한 미국 국민의 거센 반전여론 때문이었다.


  미국측의 제의로 첫 회담이 열린 것은 36대 대통령 선거일을 약 반년 정도 앞두고 있던 1968년 5월 10일, 그러니까 당시의 민주당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 셈이었다. 그리하여 일단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게 된 미국은 그 해 6월 베트콩이 사이공에 대한 위력적인 로켓포 공격을 중지하자 케손기지로부터 미 해병대를 철수시키는 등 상호 신뢰구축을 위한 일면의 조치를 취한데 이어 그 해 10월 2일 제24차 파리회담이 개최된 뒤 월맹군은 전면 북폭중지에 상응하는 축전(縮戰)의 성의표시가 있을 때 윌남정부와 민족해방전선기구의 대표를 회담에 참가시키겠다는 존슨 대통령의 일괄타결안을 수락하고 그 해 10월 중순경 월남전선에 투입되어있는 7개 사단의 정규군을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대로 철수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그 후 월남정부의 구성을 위한 총선거등 정치 군사문제의 일괄타결을 위한 닉슨 대통령의 8개항 평화안을 제시했던 미국은 1969년 7월 29일 동남아 5개국을 순방하고 있던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국가들은 자국의 국방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이른바 닉슨독트린을 천명하고 난 뒤 그 해 8월과 9월 2회에 걸쳐 6만 명의 미군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결국 주월미군 전투부대의 완전철수와 월남정부군으로 하여금 월남의 국방을 담당하게 한다는 이른바 '월남전의 월남화계획을 강력히 추진시켜 나갔던 것이며, 1971년 4월까지 4차 철군계획에 따라 15만 명의 미군을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미군의 철수가 본격화되자 호주와 뉴질랜드 태국 등 시토 회원국들도 철군계획을 발표하고 1971년 11월말부터 철군을 개시하게 됨에 따라 한국정부도 1971년 11월 6일 제1차 철군계획을 발표함으로써 1971년 12월 초순을 기해 제1진 철수부대의 철수가 이루어지고 나머지 부대는 그 후(휴전협정이 조인된 후)에 철수를 했다.


  즉 1971년 12월 4일부터 1972년 4월 6일 까지 철수한 7개 제대로 편성된 제1차 철수부대는 해병 제2여단을 비롯 주월한국군사령부 직할대의 일부와 제101군수사령부 예하부대 일부 및 해군수송전대(백구부대)의 일부 병력 등 파월 총 병력의 5분의 1(10,000)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맹호, 백마부대 등 2개 전투사단을 포함한 11개 제대로 편성된 약 3만 7천 명의 나머지 잔류부대의 철수는 1973년 1월 28일 휴전이 성립된 후 2차 철군계획에 따라 1973년 3월 23일까지 철군이 완료되었다.


  한편 참전기간(8년 6개월) 중 캄란으로부터 퀴논에 이르는 중부지역의 약 7,000㎢에 달하는 책임지역과 북부해안 책임지역의 90%이상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한국군은 적 사살 41,462명, 포로 4,633명, 귀순자 2,483명을 획득하고 각종확기 20,972점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둔 반면 15,922명의 인명손실 (전사 3,006명, 부상 8,380면비전투손실 9,735명)을 기록했고, 10년 간에 걸친 전투에서 미군은 45,000명의 전사자와 300,000명 이상의 전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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