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전<2편> - 보도전쟁의 투사들
한국군의 월남 파병기간 중 청룡부대(해병제2여단) 정훈참모실에서 근무했던 모든 보도요원들과 주윌한국군사령부 보도실에서 근무했던 해병대의 보도장교들은 지옥같은 전선을 누비며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던 외국인 특파원들의 보도전쟁 못지않게 치열한 보도전쟁을 벌었다.
그들은 모두가 불같이 뜨거운 애군정신과 사명감을 지닌 요원들이었으며, 그들이 노력한 만큼 전과는 정확하고 신속하게 보도가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장병들의 사기는 고무되고 모군의 명예는 선양되었다.
그 보도요원들이 남긴 이야기를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특히 청룡부대의 초대정훈참모로서 보도업무의 기틀을 훌륭하게 닦았고, 투이호아 방송국에 '청룡의 시간'을 할애받아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했던 박영욱 대위를 비롯해서 어렵게 부대를 방문케 한 J일보사의 대학동창생 기자(H기자)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러있게 하기 위해 포경 수술이라는 기발찬 아이디어를 짜내었던 정훈참모실 공보장교 권혁조 중위와 까두산 전투 때 달아나고 있는 베트콩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고지 위에 당도한 헬기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 내리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리고 명령을 무시하고 오로지 사진만 찍으러 다니다가 끝내는 소총소대로 쫓겨나기까지 한 ‘사진도깨비’라는 별명을 지닌 카메라맨 류재정 중사. 1일 1건 주의식 기사 작성을 위해 불철주야 골몰한 속기술에도 능했던 공보하사관 김지현 중사. 철모를 벗은 상태로 마치 작별을 고하기라도 하듯이 한쪽 팔을 높히 쳐들어 보이고 있던 이인호 대위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하여 다낭시에 전시해 놓은 그 사진을 본 김종필 의원으로부터 200불의 격려금을 받아 카메라 한 대를 구입했던 카메라맨 김제업 상병. 그리고 월남산 배추와 고추 마늘로 불과 이틀만에(날씨가 더워) 김치를 담아 그것을 미끼로 하여 기자 유치작전을 수행하게 했던 정훈참모실 영사병 이강호 일병. 짜빈동 전투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전과 보도를 위해 혈전아닌 혈전을 치렀던 2대 정출참모 박경석 소령과 공보장교 정기인 중위, 그들은 모두가 그 보도 전쟁터의 전설적인 인물들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보도업무의 심장부인 주월한국군사령부 보도실에는 실장(육군 대령)을 포함한 5명의 보도장교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심장부는 그 4명 중의 한 사람인 해병대의 정훈장교에 의해 장악이 된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육군에서는 영어를 잘 할 줄 알아야 보도업무가 잘 될 것으로 판단하고 정혼장교 대신 보도업무에 대한 경험과 능력이 없는 통역장교 3명을 (실장 외) 배치했는데, 그러한 판단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시켰던 것으로 분석이 되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보도실에서 작성하는 보도기사와 각종 포고문과 사령관의 훈지 및 축사 등은 해병대 장교가 쓰기 마련이었고, 3명의 통역장교들은 그 내용을 번역하는 번역관 노릇과 메신저 역할만을 하다 보니 사령관의 총애도 해병대 장교가 받게 되고 보도 실적면에서도 역부족한 결과를 초래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월사 보도실에 해병대 장교로서 제일 먼저 근무했던 임춘하씨(해간 18기. 당시계급 소령)는 '빨간명찰'에 이런 비화를 공개했다.
즉 어느 날 자기를 찾아온 맹호사단의 정훈참모와 보좌관이 "같은 정훈장교들끼린데 우리 사정도 좀 봐 주시지요."하며 통사정을 하기에 "그 동안 당신네들은 어떻게 해왔오"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밤을 새며 작성한 아이템과 사진을 주월사 보도실을 통하지 않고 직접 중앙(서울) 8대 일간지와 지방신문사에까지 보낸다고 하더라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각 신문사에서 사이공에 주재하는 자기네신문사의 특파원들이 보낸 기사와 당신네들이 보낸 기사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듯 물었더니 그제서야 그 비결을 깨우친 듯 회심의 미소를 짓더라는 것.
임춘하 소령의 뒤를 이은 정인성 대위는 주월사의 첫 번째 사진화보를 편집했고, 샌들백(선물꾸러미)을 마련하여 협조적인 외국인기자에게 사은의 정을 베푼 장교로 기억되고 있는 김태문 대위는 주월사 보도실에서 정기적인 전과 보도를 할 때 맹호, 백마, 청용 순(가.나.다 순)으로 해 오던 것을 전과 위주로 나열해서 하도록 건의하여 채택이 됨으로써 전과 보도에 고무적인 전기를 가져 오게 했다.
그리고 이창대 대위의 경우는 얼마나 사명감에 투철했던지 청룡부대의 전과 보도를 보다 신속하게 반영시키기 위해 심야를 이용해서 서울의 일간신문사에 날마다 전화를 걸었다고 하니 모두가 해병혼의 화신과 같은 보도전쟁의 투사들이 아닐 수 없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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