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해외 출전<2편> - 케손 산악기지

머린코341(mc341) 2017. 8. 1. 09:56

해외 출전<2편> - 케손 산악기지


  1970년 2월 청룡부대는 제4대 여단장으로 임명된 이동용(李東用)준장의 취임과 때를 같이 하여 ‘황룡’이라는 새로운 작전명칭 아래 대소 작전을 전개했는데, 특히 황룡8호 작전(여단급) 기간 중인 그해 10월에는 미 해병7연대의 본국 철수에 따르는 전술책임지역의 확장으로 '케손'산악지대로의 기지 이동도 단행했다.


  청룡부대가 미 해병대로부터 인계 받은 그 케손 산악기지는 안남(安南)산맥의 줄기를 타고 침투해 오는 적을 차단하기 위해 구축해 놓은 작전기지였는데 아 해병대가 그곳에 배치된 뒤로는 왼쪽 가슴에 빨간딱지(명찰)가 붙어 있는 따이한 해병대에 대한 기피증 때문인지 침투해 오는 적병의 수가 격감이 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8호 작전 기간 중 아군은 두 차례(10월 하순과 11월말 경)의 큰 물난리를 겪었다. 그 두 차례의 물난리 중 470밀리의 폭우가 쏟아진 10윌 하순경의 물난리 때는 침수현상이 극심하여 대대·중대기지 중 13개 기지는 완전 침수되고, 8개 기지는 80프로이상, 2개 기지는 약 50프로가 침수됨으로써 긴급 대피작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게 했다.


  함께 물난리를 줘고 있던 우군(USMC)부대로부터 지원 받은 8대의 헬기를 이용하여 120회에 걸쳐 단계적으로 대피작전을 진행하던 중 아군은 17명의 인명을 상실했다. 7명은 격류에 휩들려 실종이 되고 10명은 이륙하던 헬기의 충돌사고로 변을 당한 대원들이었다.


  황룡8호 작전이 끝난 후 청룡부대는 11월 1일부터 그 이듬해(1971년) 1월말까지 여단 전술책임지역과 케손산악지대에서 활룡 9호와 10호 및 11호 작전을 전개한데 이어 12월 초순경부터 중순경까지는 10-22호 작전을 전개했는데, 특히 그 10-22호 작전에서 케손산악기지에 배치되어 있던 2대대 6중대(장, 임종린 대위)는 공수돌.격을 감행한 484고지(케손) 북동쪽의 정글지대를 탐색한 끝에 흑색비닐 속에 담아 숨겨 놓은 30문의 122밀리 로켓포 및 포탄 30발을 10여 군데의 숲속에서 발굴해 내는 뜻밖의 전과를 거두었다.


  케손 산악지대에는 특히 멧돼지가 많았다. 그러나 멧돼지가 눈에 띈다고 해서 함부로 총질을 하는 대원들은 없었다. 이심전심 전해지고 있던 전쟁터에서의 금기(터부)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금기시(禁忌視)되고 있던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짐승들을 함부로 잡지 말라. 새옷으로 갈아입지 말라. 싸움터에 나가기 전에 편지를 쓰지 말라. 머리를 깍지 말라. 돈이나 폐물을 탐하지 말라.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금기는 비단 우리나라 군인들 뿐 아니라 다른 외국군인들에 의해서도 미신아닌 미신 같이 지켜지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통성이 있기도 했던 것이다.


  실제로 어떤 미군들은 느르망디상륙작전에서 희생된 첫 전사자의 상처를 살펴 본 결과 독일군의 실탄이 그의 왼쪽 가슴에 달린 포켓 속에 넣어둔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갑의 빨간 동그라미 한복판을 맞힌 것이었다는 이유(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나)에서 그 빨간 행운의 과녁을 즉음의 과녁처럼 터부시한다고 했고, 또 월남군인들의 경우는 우리들과 문화권이 같아서 그런지 금기시하는것들이 우리 한국군인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이러한 터부가 있었는데도 어느 날 케손 산악지대에서는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 즉 고지 아래에 있는 부락으로 수색을 나갔던 2명의 대원이 진지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한마리의 멕돼지를 사살한 것이 화근이 되어 두 사랄 모두가 끔찍한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의 대원은 그들이 사살한 그 멧돼지를 운반해 오기 위해 앞다리와 뒷다리를 칡넝쿨로 묶은 다음 대검으로 자른 생나무를 지짓대로 하여 앞 뒤쪽에서 메고 오다가 적병들이 교묘하게 가설해 놓은 부비트랩을 터뜨리는 바람에 메고 오던 그 멧돼지처럼 참담한 변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한편 황룡11호 작전이 끝난 뒤 청룡부대는 그로부터 8개월 간 11호에서 17호까지의 작전을 계속 수행해 나갔으나 미국의 월남화계획 정책이 연합군의 철군을 촉진시키고 있는 시기였으므로 전국(戰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월남전에서 수행된 마지막 작전들은 1971년 7월 말 제5대 여단장으로 취임한 허홍(許泓) 준장의 지휘 하에 수행된 기룡작전과 용풍작전, 월남공화국 대통령선거보호작전 등이었는데, 대대급 또는 여단급 규모로 수행했던 이러한 작전들은 전국의 소강으로 전과 또한 미미했다.


  그리고 기룡작전이 끝나던 날(10월 10일) 케손 산악지대의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제5대대의 주력부대는 주월한국군의 제1차 철수계획에 따라 그 거점을 윌남군 제1레인저그룹 예하부대(대대)에 인계하고 후방기지로 복귀하게 됨으로써 11월 초순에 발표된 한국정부의 칠군계획에 따르는 청룡부대의 철군준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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