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133]술꾼의 친구 '힙 플라스크(Hip Flask)'
1. 루이스 닉슨 대위의 애장품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 속 루이스 닉슨 대위(실존 인물이기도 하다)는 전쟁극에 으레 등장하는 인물 전형 중 하나를 연기한다. 바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유분방한 성격의 주인공 친구'다.
닉슨 대위는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예일대를 다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입대한 엘리트로, 극 클라이막스에서는 정보장교, 작전장교 등 참모 직책을 수행한다.
주어진 캐릭터에 맞게 기행도 많이 펼치는데 특히 술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숨겨 놓고 마시고 대놓고 마시다가 나중에는 독일군 고위 장교 술창고를 찾아내 실컷 마신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던지 그는 영내, 숙소, 기차 등 장소 불문 틈만 나면 어디선가 은빛 나는 작은 통을 꺼내 또 그 안에 든 술을 마신다.
한국에서 이 드라마가 방영된 2004년 나는 후방 어느 부대의 작전장교였다. 닉슨 대위의 품에서 나오는 저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통은 무엇인지, 저런 건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야전 생활 속에서 그런 사소한 호기심은 금방 잊었고 시간은 훌쩍 지났다.
▲ 틈만 나면 술을 꺼내드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속 주요 인물, 루이스 닉슨 대위. /출처= ⓒIMDb
2. 영화 '1987' 속 하정우가 들고 다니는 '힙 플라스크(Hip Flask)'
지난 2017년 영화 '1987'을 보고 있는데 화면 속 한 장면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뭐지…' 하고 있는데 등장인물인 검사 최환의 얼굴 위에 닉슨 대위의 그것이 겹쳤다. 실은 얼굴이 아니라 그 둘이 들고 있는 은빛 나는 작은 통 '힙 플라스크(Hip Flask)'가 겹쳤던 것이다.
극 중 최환은 대학 때 민주화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그 대극에서 활동하는 공안 검사다(역시 실존 인물). 법을 지키는 검사이지만 압류된 양주를 조금씩 빼내 태연히 마시고 다닌다.
힘들게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됐지만 당직실에서 매일같이 짜장면으로 식사를 때우는 신세다. 닉슨 대위가 처한 상황과 맥락이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명문 대학을 다녔지만 지금은 전쟁터에서 바닥을 박박 기고 있다. 부유한 집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았는데 지금은 양주를 몰래 숨겨 놓고 조금씩 몰래 마셔야 한다.
병사로 입대했다가 어렵게 장교가 됐는데 알코올의존증으로 언제 좌천될지 모르는 처지다. 그러니까 힙 플라스크와 그 안에 든 위스키는 위의 두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장치다.
▲ 극 초반부 압류 양주를 힙 플라스크에 따라 마시는 장면. /출처= ⓒCJ엔터테인먼트
▲ 극 중반부 자신의 애장품인 힙 플라스크를 던져 버리면서 "뭐, 소주 먹고 살지 뭐"라고 혼잣말을 내뱉는다. /출처= ⓒCJ엔터테인먼트
3. 힙 플라스크의 유래를 찾아서
힙 플라스크는 '목을 축일 정도의 술을 갖고 다닌다'는 단순하지만 간절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 염원과 발상을 추적하면 중세 이전까지 올라갈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술꾼들은 식물 껍질이나 동물 내장으로 만든 술통을 휴대하고 다녔다. 그러나 술이 상하고 새는 문제가 있었다. 금속이나 유리로 술병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나 비쌌다.
'아무리 비싸다 하더라도 돈 많은 귀족이라면 상관없잖아'라고 생각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 정도로 술을 좋아한다면 왜 목을 축일 정도만 갖고 다니겠는가. 돈 많은 귀족이라면 한 통이든 두 통이든 하인을 시켜 짊어지고 다니면 될 일이었다.
결국 '목을 축일 정도의 술을 개인적으로 휴대해 갖고 다니고 싶다'는 욕망은 평민의 것이었다. 일이 고되고 힘들 때 한 모금, 헛간에서 잠을 청할 때 몸을 데워줄 한 모금이 필요했던 평민 말이다.
평민에게 휴대용 용기 사용이 금전적·사회적으로 허용된 것은 18세기부터였다. 이전에는 비싸서 못 샀고 살 수 있어도 평민에게까지 돌아갈 몫이 없었다. 행여 구할 수 있다고 해도 평민이 귀한 휴대용 용기를 사용하는 것은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로버트 레드퍼드와 니컬러스 케이지의 힙 플라스크는 무엇이 다를까?
1.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
그렇다면 우리가 '힙 플라스크'라고 부를 만한 최초의 제품은 언제 등장했을까. 현재까지는 1800년대 중반으로 추측된다. 아마 1850년을 전후한 시기에 판매용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래 사진 속 유물은 1890년대 호주에서 사용하던 힙 플라스크다. 제품 아이디어가 흥미롭다. 주석으로 만들면 튼튼한데 맛이 변하고, 유리로 만들면 맛은 그대로이나 쉽게 깨지니 둘의 장점을 하나로 모았다. 보는 것처럼 유리 용기 아래쪽을 주석으로 씌워서 말이다. 위쪽은 가죽으로 덮었다.
▲ 1890년 경 실제 사용되던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 안쪽 용기는 유리, 아래 덮개는 주석이며, 위쪽은 가죽으로 마무리했다. /출처= ⓒcollection.maas.museum
아래 사진 속 힙 플라스크는 1866년에 특허를 얻은 제품이다.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라고 불렀다. 남북전쟁 당시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단부 주석 덮개는 컵으로 쓸 수 있도록 밑면을 평평하게 디자인했다.
▲ 남북전쟁기에 사용된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 /출처= ⓒworthpoint.com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는 오늘날까지도 그 디자인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영화 '스파이 게임(2001)'에서 이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가 인상적인 장치로 등장한다.
영화 속 로버트 레드퍼드(뮤어 역)는 임무가 최우선인 CIA 고참이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선발하고 교육시킨 CIA 신참 브래드 피트(비숍 역)에게 생일 선물을 받는다. 임무지에서 사온 것이라며 비숍이 내놓은 것은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다.
시간이 지나 뮤어는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는데,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비숍이 죽을 위험에 처한다. CIA 작전 절차대로라면 비숍은 죽어야 한다. 뮤어도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뮤어는 그답지 않게 고민을 거듭한다. 뮤어의 손에는 비숍이 선물했던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가 들려 있다. 결국 뮤어는 조직의 규정, 자신의 원칙을 깨고 비숍을 돕기로 한다.
▲ 영화 '스파이 게임'에서 레드포드가 가죽 덮개 힙 플라스크를 선물 받는 장면 /출처= ⓒIMDb
2. 스테인리스 스틸 힙 플라스크
영화 '스파이 게임'처럼 힙 플라스크를 인상적 장치로 사용한 영화가 또 있다. 니컬러스 케이지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다.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슈(세라 역)와 남주인공 니컬러스 케이지(벤 역)는 각각 인기 없는 창녀와 실패한 영화 작가로 인생의 막장에 와 있다. 벤은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사랑을 느낀 세라는 어느 날 힙 플라스크를 벤에게 선물한다.
▲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세라가 벤에게 스테인레스 스틸 힙 플라스크를 선물하는 장면 /출처= ⓒIMDb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 나오는 힙 플라스크는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이다. 우리가 '힙 플라스크' 하면 흔히 떠올리는 바로 그 외형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힙 플라스크는 개인의 주류 취급을 금지한 1920년대 미국에서 고안하고 유행했다는 항간의 설이 있다.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다.
1900년대 초반에 이미 힙 플라스크를 테마로 하는 다양한 특허가 나왔으니 1920년대에 고안했다는 말은 틀리다.
1920년대에 취급 금지된 술의 샘플을 몰래 전달하기 위한 용기로, 모임에 다만 몇 모금의 술이라도 들고 가기 위한 목적으로 힙 플라스크가 널리 사용됐으니(술통이나 술병을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이때 유행한 것은 맞는다.
1920년 워싱턴 헤럴드 기사에 다음과 같은 묘사가 등장한다. "파티가 시작되면 열 개의 플라스크가 나온다. 엉덩이 쪽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어 다들 마시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그래 이게 자유 국가지."
이 기사의 표현에서 '힙 플라스크'라는 명칭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헐렁한 티셔츠에 작업복 바지 하나 달랑 입고 일하는 노동자가 어디에 플라스크를 넣어 휴대했겠는가. 바로 바지 뒤춤 엉덩이(hip) 쪽 주머니다. 그래서 '힙 플라스크'라 부른 것이다.
'힙 플라스크'에는 다른 별칭도 있다. 바로 '키드니 플라스크(Kidney Flask)'다(kidney의 뜻은 신장). 이것은 중의적 명칭인데 우선 플라스크 외형이 위에서 보면 신장과 비슷하다. 그리고 들고 다닐 정도로 술을 마시면 신장이 상한다는 뜻도 있다.
▲ 우리 몸 속 신장의 모습(좌), 힙 플라스크를 위에서 촬영한 모습(우) /출처= ⓒ프리픽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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