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 군벌과 군조직 -5-
경기도 용인의 3군사령부에서는 제3야전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이 손재식 경기도지사 등 행정기관장 및 지역유지들 20여명과 함께 저녁식사로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는 그 곳에서 현 정국의 주도권이 군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행정당국이 일일이 군에 상의하거나 눈치볼 필요 없이 지금까지 준용해온 법규에 따라 소신껏 일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때 그의 부관이 윤성민 육참차장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바꿔주었다.
“참모총장님이 납치되었습니다. 범인은 아직 정확히 모르고 총격전도 있었어요. 우선 병력장악과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해주십시오.”
만찬은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그는 작전참모 한철수 준장과 기획참모 민태구 준장등과 함께 상황실로 가 3군사령부 헌병대장 조명기 대령에게 서울-휴전선간 도로 검문소의 검색 강화를 지시하였다.
이후 윤성민 차장과 다시 전화를 한 후 각 예하부대장의 위치를 파악해보니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이 없었다. 5군단장 최영구와 6군단장 강영식은 정위치에 있었다.
삼청동 총리공관의 공관 경비대장 구정길 중령은 막 김진기 헌병감으로부터의 전화를 끊은 뒤였다. 이후로도 몇 번 전화가 더 왔지만 보안사령관 체포지시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결국 그 사이 총리공관에서 최규하 대통령 직무대행에게 정승화 체포를 재가받으러 간 전두환과 이학봉은 총리공관을 빠져나갔다.
청와대 경호실 상황실장 고명승 대령이 노태우 9사단장으로부터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보다 조금 전이었다.
“지금 보안사령관이 총리공관에 가 계시니 빨리 그곳으로 가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
“예. 알겠습니다.”
고명승은 즉시 101경비단장 최영덕 총경과 55경비대대 부대대장 권중원 소령을 불러냈다. 이들은 청와대 경호의 핵심 병력들 중 하나였다. 이들에게 병력 출동을 지시하자 경복궁 30경비단에서 같이 주둔하고 있던 101경비단 1개 소대와 55경비대대 3개 소대가 총리공관을 향해 출동했다.
통수권자인 대통령 직무대행 최규하, 국방부장관 노재현,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이나 총리공관 경비대장 구정길 모두 모른 채 취한 행동이었다.
원래 총리공관에는 서울시 경찰국 소속 공관경비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10.26 이후 계엄이 선포되고 총장공관이나 육군본부에 9공수 병력이 출동하여 경비하는 등 계엄군 출동에 맞춰 육군본부 헌병감실 소속 헌병 1개 소대로 이루어진 특별 경호대가 추가 파견되어서 총리공관을 경비중이었다. 이들의 지휘관은 구정길 중령이었다.
고명승은 차지철 이후 임명된 청와대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준장에게 만나자고 해 총리공관으로 같이 향했다. 이후 구정길 중령에게 전화가 걸려 와 ‘청와대 경호실 사람들이 만나고자 한다’는 말이 위병소로부터 전해져왔다. 그가 보니 고명승, 정동호, 최영덕, 권중원 그리고 다른 군인 2명이 있었다. 정동호 준장이 말했다.
“보안사령관의 지시다. 이 시간 이후 이곳 경비를 나에게 인계하라.”
구정길 중령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지시였는데다가, 그 지시를 한 정동호 준장이 미심쩍을 수 밖에 없는 말이었다. 먼저 총리공관을 경호하는 자신의 직속상관인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으로부터도 총리공관 경호병력 인수인계란 말은 없었으며, 김진기 준장의 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쪽 또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방금 그의 직속상관인 김진기 헌병감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체포가 가능하냐는 전화를 걸어왔던 차였다. 그런데 보안사령관을 들먹이며 총리공관 경비엄무의 인계를 말하는 정동호 준장의 말은 수상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계엄사령부의 업무변경 지시 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정동호 준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구정길 중령을 무장해제 시킨 후 막사로 가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총리공관의 특별 경호대 병력은 전원 청와대 경호실 병력으로 교체되었다.
최규하 대통령 직무대행이나 신현확 국무총리가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총리공관의 경비병력이 군 통수권자의 명령 없이 강제적으로 교체된 것이었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동에는 제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날 박희도 1공수여단장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부대는 이기룡 1공수 부여단장이 장악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로부터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지만 박희도 1공수여단장과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연락이 된 것은 8시 30분경이었다.
“여단장님, 진돗개 하나입니다.”
이기룡 참모장은 그 이후 취한 조치들을 설명했다.
“그래, 나는 경복궁 30경비단에 있다. 특이사항이 있으면 연락하라.”
이후 박 여단장은 30경비단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9시 경에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 사령관이다. 지금 즉시 전 부대원의 실탄을 전원 회수하고 차량은 9여단으로 보내라.”
“저희 여단은 서울계엄군으로서 임무가 따로 있는데 사령관님의 말씀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전화는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비슷한 내용의 전화가 왔다. 그러자 이기룡 대령은 이번에는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비상사태에서는 계엄사의 지시에 따라 임무를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는데 계엄사의 지시도 없이 무장해제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라며 항의했고 전화가 끊겼다.
이후에도 6회 정도 무장해제와 차량인도에 대한 특전사령부의 지시가 있었으나 이기룡은 모두를 거부했다. 아예 마지막에는 “1공수 여단은 계엄사의 작전배속이 되어있으므로 부당한 요구를 중단해 주기를 바란다.”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1공수여단은 비상 발령시 육본과 국방부로 출동하게 되어 있었고, 출동용 차량 또한 특전사의 차량이 아닌 2군수지원사와 3군수지원사의 소속이었으므로 차량의 9공수 인도는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작전권한 밖이었으며, 1공수는 수경사에 작전배속 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특전사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은 1공수가 주둔지로 원대복귀하였기 때문에(10.26 이후 계엄군으로 출동한 1공수는 3대대만 마포구청에 남겨진 채로 공항동의 주둔지로 복귀하였다) 수경사로의 작전배속이 해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1공수여단 부여단장은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지시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뻘글 집합소] 201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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