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12.12사태

12.12 : 군벌과 군조직 -4-

머린코341(mc341) 2020. 3. 15. 11:21

12.12 : 군벌과 군조직 -4-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이 12월 12일 거여동 특전사령부에서 열린 단대장 회의를 주관한 후 문제의 연희동 요정에 갔다 비상으로 특전사령부에 복귀한 것은 12일 오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 시각 그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6시에 퇴근한 후 교육과장 장창규 중령, 교육대장 김형선 중령, 작전과장 겸 상황실장 박중환 중령과 함께 사령부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식당에 들이닥친 것은 교육과 선임하사 최 상사였다.


“실장님, 진돗개 하나입니다.”


식사를 하던 그들은 즉시 부대로 복귀하였다. 한편 그 시각 사령부의 정병주 소장은 한남동에 출동하면서 윤성민 육참차장과의 통화로 이번 총장 납치사건이 보안사의 짓이라는 것을 파악한 장태완 사령관과는 다르게 아직 윤성민 차장등과의 전화 등 사실을 파악할만한 교류 등이 없었기에 어떤 세력이 정승화 총장을 납치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보안부대장 김정룡 대령을 불러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파악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김오랑 소령이 복귀한 것은 12일 오후 8시 30분이 넘은 시각이었다. 같이 복귀한 박중환 중령은 상황실로 가 특전사 작전처장 신우식 대령 등 상황실 장교들과 함께 유/무선 통신망 점검, 지휘관 위치파악 및 각 여단 비상출동 준비태세등을 확인하였다.


문제는 지휘관 위치파악 시 1, 3, 5 공수여단장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 있는 것은 영내근무자이던 제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 뿐이었다.


김오랑 소령은 특전사령관실에서 급히 그의 아내 백영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10.26 이후 처음으로 거는 전화였다.


“여보, 미안해, 오늘 집에 못 들어가게 됐어. 아니, 아마도 오랫동안 못 들어갈지도 몰라, 미안해.”


그는 다급하게 말을 늘어놓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말 뒤편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을 통해 그가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옆에는 군에 관하여 대통령 바로 밑의 서열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부장관 공관이 소재하고 있다. 1979년 12월 12일 당시의 국방장관은 노재현이었다. 1947년 육사 3기로 임관해 6.25 사변때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1군단 포병사령관, 포병학교장, 37사단장, 감찰감, 군수기지사령관, 2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합참의장을 지낸 후 국방장관까지 오른 그가 자신의 옆집에서 총성 수발이 울렸을 때 취한 행동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었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갔다.


먼저 그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담을 넘어 단국대학교 체육관으로 몸을 피했다. 국방부에 연락해 합참 작전국장 이경율 소장을 단국대로 부른 후에는 그의 승용차로(심지어 장관 공관차도 아니었다) 강북의 도로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여의도의 이경율 장군의 집에 가족을 내려놓은 후 그는 21시 10분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총장공관에서 첫 총성이 울린 19시부터 2시간 10분이 지나서야 육군본부 B-2 벙커에 도착하였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한 나라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군 서열을 가지고 있는 국방부장관이 자신을 향해 쏘고 있는 것도 아닌, 옆집에서 들린 총소리를 듣고 놀라 담을 넘어 숨어있다가 자신의 차도 아닌 부하의 차를 타고 서울을 돌다가(심지어 육군본부, 수경사, 보안사의 추적망조차도 따돌릴 정도였다!) 가족만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것이다.


이 모든 행동들이 군사반란의 초기 2시간 10분동안 일어난 일이다. 이때 노재현 장관이 피신을 가지 않았거나 육군본부측과의 최소한의 연락망이라도 유지한 채로 이동했다면 적어도 진압군 측에 조금 더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정론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12.12 당시 보여준 행동은 이것으로 다가 아니었다. 이후로도 더 많은 행동을 보게 될 것이다.


한편 육군본부에서는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이 적극적으로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같이 있던 김진기 헌병감이 그를 도왔다. 그는 총리공관 경비대장인 구정길 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정길은 아직 청와대로 거처를 옮기지 않은 최규하 대통령 직무대행이 머무르고 있는 총리공관의 경비의 책임자였다. 한편 곧 최규하 대통령 직무대행이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일명 ‘체육관 투표’를 거쳐 청와대로 이사를 할 것이었기 때문에 꽤 많은 비서관들이 12일 밤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구 중령, 거기 이상 없나?”

"비상이 걸려서 경계근무를 강화시키고 있는데 아까부터 전두환 장군이 들어가 대통령과 얘기 중입니다. 무슨 중요한 결재를 받으러 왔다고 그러는데요."

"뭐, 전 장군이 거기 가 있단 말이지?"

"구 중령,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오늘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 명령에 따를 수 있겠나?"

"새삼스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헌병감님 명령을 안 따르고 누구 말을 따르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전 장군을 잡아야 할지도 모르네."

"예에…. 아무튼 저는 헌병감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김진기 헌병감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전두환에 대한 체포지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먼저 육군본부 감찰감이던 권익검 소장을 불러 태릉과 남한산성에 주둔해있는 20사단 병력의 동태를 살펴보도록 한 후(10.26 이후 선포된 계엄령에서 계엄군으로 출동한 박준병 사단장의 20사단은 일부는 원대복귀 하였으나 사단본부와 1개 연대는 남한산성의 육군 종합행정학교로, 1개 연대는 태릉 불암산의 제71방위사단에 있었다) 소준열 육군 종합행정학교장에게 박준병 제20보병사단장의 체포를 지시하였다.

 
한편 윤성민 차장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도 전화해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의 체포를 지시했다. 문제는 박준병과 백운택 모두 자신의 부대가 아닌 경복궁의 제30경비단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체포가 이루어질수도 없을지언정 애초에 사단 병력들의 경비가 삼엄해 체포를 시도할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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