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135]밴드 오브 브러더스에서 자주 본 저 모자, 이름이 뭐지?
개리슨 캡(Garrison Cap)
1. 영내에서 착용하는 것이 원칙인 모자, '개리슨 캡(Garrison Cap)'
'개리슨 캡(Garrison Cap·영내 모자)'은 군인이 영내 근무 시에 착용하는 챙 없는 모자다.
우리에겐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2001)'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극 중 제101공수사단 영내 활동 장면에 장병들이 개리슨 캡을 쓰고 다니는 모습이 자주 나왔다.
▲ '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한 장면 /출처= ⓒIMDb
2. 개리슨 캡의 기원
미군이 '개리슨 캡'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다. 그 이전에는 '오버시즈 캡(Overseas Cap·외국 모자)' 혹은 '플라이트 캡(Flight Cap·비행 모자)'이라고 불렀다.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버시즈 캡을 쓰고 있는 미 육군 항공 장병. 자세히 보면 오버시즈 캡의 재질, 디자인이 각양각색이다. /출처= ⓒusmilitariaforum.com
가. '포리지 캡'에서 '오버시즈 캡'으로
'오버시즈 캡'의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4월 미국은 뒤늦게 참전을 결정하고 유럽 대륙으로 미 원정군을 파병했다.
급한 파병 결정, 원정의 제한사항 등으로 인해 무기, 장비, 물자 수송에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서 참전 초기 미군 장병 상당수는 프랑스군의 보급품을 받아썼다.
그중 하나가 챙 없는 작업 모자인 '샤포 드 푸라지(Chapeau de fourrage)'였다. 프랑스군 작업 모자이다. 미군은 이를 영어로 맞게 고쳐 '포리지 캡(Forage Cap)'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단순하고 직관적인 것을 좋아하는 병사들은 그냥 '오버시즈 캡'이라고 했다. 추측하기로는 '포리지'→'포린(foreign·외국의)'→ '오버시즈(overseas·외국의)'로 이어지는 연상을 통해 명칭을 바꿨을 것이다.
▲ 재질과 디자인이 조금씩 다른 오버시즈 캡(=샤포 드 푸라지=포리지 캡)'을 쓰고 있는 미군 장병. /출처= ⓒusmilitariaforum.com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오버시즈 캡은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유는 두 가지였다. 햇빛과 비를 막아주지 못해 비실용적이었고, 군기가 빠져 보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오버시즈 캡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니거나 깔고 앉기 일쑤였다. 쓴다고 해도 제대로 쓰지 않고 대부분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여 머리에 얹고 다녔다.
▲ 미군 병사들은 각자 개성에 맞게 오버시즈 캡을 썼다. /출처= ⓒusmilitariaforum.com
나. '플라이트 캡'에서 '개리슨 캡'으로
복제 규정에 없는 비인가 군수품이었지만 정비병, 취사병처럼 좁은 곳에서 바삐 움직이는 이들은 여전히 오버시즈 캡을 쓰고 다녔다.
'비인가 군수품의 존재를 뻔히 알고도 넘어가느니 아예 복제 규정에 포함시키자.' 이것이 1933년 미 육군 항공(후일 공군으로 독립) 지휘부의 결정이었다. 육군 항공은 이를 '플라이트 캡'으로 명명하면서 다시 한번 '평시 영내에서 조종, 정비 시에만' 착용토록 제한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장병들은 '플라이트 캡' 대신 '개리슨 캡'이란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우선 '플라이트 캡'보다 '개리슨 캡'이란 명칭이 이 모자의 용도, 제한사항(영내에서 작업할 때만 쓰는 모자)을 명확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약간 긴 설명이 필요하다. 미 육군 항공이 개량을 가미해 보급한 모델은 원형인 프랑스군의 '샤포 드 푸라지'보다 스코틀랜드군의 '글렝개리(Glengarry)'에 더 가까웠다. 이를 누군가 알아보았고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을까.
"이건 샤포 드 푸라지도 오버시즈 캡도 아니야. 차라리 글렝개리에 가깝군."
"그러고 보니 글렝개리와 비슷하네. 그럼 이걸 글렝개리 캡이라고 부르자."
"아니. 그러면 이름이 너무 기니까 줄여서 그냥 '개리 캡'이라고 하면 어떨까?"
"개리라고만 하면 아무 뜻이 없잖아.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말이야. 차라리 영내(garrison)에서만 쓰라고 했으니까 '개리슨 캡'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군."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플라이트 캡 대신 개리슨 캡이라고 불렀다'는 막연한 설명보다는 낫지 않을까. 말이 나온 김에 스코틀랜드군의 글렝개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다. 스코틀랜드의 챙 없는 양털 모자 '글렝개리'
글렝개리는 양털로 만든 스코틀랜드 전통 모자로서 두껍고 챙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집단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 '글렝개리 국방 용병(Glengarry Fencibles)'이었다.
영국은 18세기 중반부터 스코틀랜드 산악지대를 완전히 평정하기 위해 지역 내 모든 거주민을 쫓아냈다. 이것이 이른바 '고산지대 소개(Highland Clearances)'이다.
이때 쫓겨난 이들 중 '글렝개리 하이랜더(Glengarry Highlanders)'는 호구지책으로 연대 규모의 부대를 만들어 용병 노릇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글렝개리 국방 용병'이라 칭했다.
1792년 혁명 전쟁이 발발하고 그 여파가 유럽 전역에 미치자 글렝개리 하이랜더는 영국의 손이 미쳐 닿지 않는 접경 및 도서 지역에서 진압, 지역 안정, 선점 등의 임무(지금으로 따지면 여건 조성 작전)를 맡았다.
그러다가 1802년 바뀐 영국 정책에 의해 하이랜더들은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는데 그 삶이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새 살길을 찾고자 선택한 것이 캐나다 이주다.
캐나다로 이주한 글렝개리 하이랜더는 자경단을 조직해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는데 이들이 유니폼처럼 착용한 모자가 바로 '글렝개리(모자)'였다.
▲ 19세기 말 글렝개리 국방 용병이 착용했던 글렝개리. /출처= ⓒcollections.tepapa.govt.nz
글렝개리가 유명해진 것은 '1812년 미영전쟁' 때였다. 영국은 캐나다에 위치한 글렝개리 하이랜더를 작전에 투입하고자 했고, 글렝개리 하이랜더는 이 기회를 살려 생존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창설된 것이 '글렝개리 경보병단(Glengarry Light Infantry Fencibles)'이다. 이들은 글렝개리를 쓰고 미군과 수차례 교전을 벌였다.
이후 글렝개리는 스코틀랜드군 역사와 전통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는 왕실 스코틀랜드 연대가 글렝개리를 제식모로 착용해 그 역사와 전통을 잇고 있다.
▲ 2011년 영국 여왕을 사열하고 있는 왕실 스코틀랜드 연대. 글렝개리를 쓰고 있다. /출처= ⓒtheroyalregimentofscotland.org
미군이 챙 없는 양털 모자를 '개리슨 캡'이라고 부른 이유
3. '샤포 드 푸라지'가 '개리슨 캡'이 되기까지
프랑스군으로부터 받은 '샤포 드 푸라지'를 '포리지 캡', 스코틀랜드군의 '글렝개리'에서 착안해 '플라이트 캡'을 '개리슨 캡'이라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군은 남다르게 군사와 관련된 것에 이름을 붙이고 바꾼다.
어찌 보면 이런 현상은 세계 공통이다. 한국군 병사들이 겨울에 입는 보온용 내피를 '방상내피' 대신 '깔깔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개리슨 캡이 전장 속에서 지나온 여정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글렝개리를 끄고 있는 스코틀랜드 군인의 모습(좌). 글렝개리는 지금도 왕실 스코틀랜드 연대 제식 복장으로 유효하다. /출처= ⓒ위키피디아미디어커먼스
4. 제2차 세계대전과 '개리슨 캡'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개리슨 캡'(당시 명칭 '오버시즈 캡')은 가장 인기 있는 쓸 것이었다. 영내 활동에서 이만큼 편한 모자는 없었다. 장병들은 훈련, 작업, 외출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썼으며 야구와 같은 스포츠 경기를 할 때도 썼다.
위기는 있었다. 미군은 비실용적이며 군기가 빠져 보인다는 이유로 착용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전쟁이 발발했고(제2차 세계대전) 개리슨 캡은 다시 '쓸 것의 왕좌'를 차지했다.
미국이 참전을 공식 선언한 1941년부터 육해공군 장병 모두 전투 상황하에서 헬멧을 쓸 때가 아니면 개리슨 캡을 썼다. 물론 장군도 개리슨 캡을 썼다.
▲ 개리슨 캡을 쓴 장군들. 좌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 미 제34대통령을 역임하는 아이젠하워 장군,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클라크 장군 /출처= ⓒ위키피디아미디어커먼스
1944년부터는 미국 보이스카우트 대원도 개리슨 캡을 썼다. 보이스카우트 정신, 조직, 복장이 군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보이스카우트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직후 공식적으로 지지를 선언하고 정부의 전쟁 정책에 적극 협조했는데 이때 미국 전쟁부 장관은 보이스카우트의 군복 착용을 허가했다.
미국에서는 1916년부터 민간인이 군복 혹은 군복과 유사한 디자인의 의상을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 보이 스카웃의 복장 변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좌측에서 세 번째), 이후(좌측에서 네 번째)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출처= ⓒreedsms.com/boy-scouts
▲ 보이 스카웃 포스터. 모두 개리슨 캡을 쓰고 있다. /출처= ⓒreedsms.com/boy-scouts
5. 개리슨 캡과 한국군
한국군도 개리슨 캡을 쓴다. '개리슨 모'라고 부르며 현재 공군, 해군, 해병대가 쓰고 있다. 이들이 개리슨 캡을 도입한 이유는 편리성과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편하지도 않고 이미지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
▲ 한국 공군(좌)과 해군(우)의 개리슨 캡 /출처= ⓒ국방일보
2014년 해병대가 올리브색 개리슨 캡을 복제 규정에 넣는다고 했을 때 논란이 일었다.
해병대 업무 담당자는 '(기존 팔각모는) 실내 근무 시 착용하거나 보관할 때 불편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팔각모는 디자인이나 색깔이 다소 시대에 뒤처진다는 지적이 있었다'(중앙일보 2014년 12월 1일자)고 했지만, 정작 해병대 장병(예비역을 포함한)은 그런 의견이나 지적의 출처가 어디냐며 의아해했다.
더불어 "변덕쟁이처럼 왜 자꾸 바꾸냐? 해병대 역사와 전통을 우습게 보는 거냐" "복지에 쓸 돈은 없고 모자 바꿀 돈은 있냐"는 비판도 있었다.
▲ 해병대 전투복에 팔각모 착용 모습(좌)과 근무복에 개리슨 캡(우) 착용 모습 /출처= ⓒ해병닷컴
유사한 논란이 육군에서도 있었다. 2011년에 '기존의 전투모 대신 베레(모)를 채택한다'고 발표했을 때, 그리고 2019년에 다시 '지금의 베레 대신 전투모로 회귀한다'고 했을 때다. 마찬가지로 의견 수렴을 제대로 하라, 그만 좀 바꿔라, 병사 복지에 더 신경 써라 등의 비판이 나왔다.
한국 육군 베레와 해병대 개리슨 캡 도입은 운용 환경을 잘못 분석해 나온 실패라는 구체적 지적도 있다. 한국의 기후 특성상 챙이 없는 개리슨 캡과 베레는 오히려 불편하다. 해가 뜨면 햇빛을 가리지 못하고, 비가 오면 비를 바람 불면 바람을 막아주지 못한다.
또한 비판자들은 해병대와 육군이 주장한 이미지 개선도 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했다. 삐딱하게 쓴 개리슨 캡과 베레만큼 군기 빠져 보이는 것이 또 있을까.
쓰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거리에 나가보면 많은 장병들이 베레를 벗은 채 시내를 활보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길(술집, PC방)에서 군인 모자 주웠음'이라는 게시물이 떠다닌다.
▲ 분실한 베레를 찾아가라는 웃픈 사연이 종종 SNS에 올라온다. /출처= ⓒ페이스북페이지
프랑스군에서 시작된 이래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미군 복제의 일부로 기능하는 개리슨 캡 이야기는 흥미로우며 미군의 역사와 정체성 일부를 구성한다. 미군에 개리슨 캡은 전장 환경에 맞는 모자를 찾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개리슨 캡에는 유래, 이야기, 역사가 없다. 논란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한국군 정체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한국군의 개리슨 캡은 미군이 찾아낸 결과물을 모방한 것이어서 사용자들이 납득할 만한 인과관계, 담론이 없기 때문이다.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매일경제] 20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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