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창설기-모병비화
그런데 백지와 같은 무의 상태에서 부대편성에 착수하게 된 신현준 사령관은 제일먼저 자신을 보좌해 줄 가장 핵심적인 존재가 될 참모장으로 자신이 내정하고 있던 통제부 교육부장 김성은 중령을 영입하려 했으나 본인이 선뜻 응하지 않고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마치 삼고초려의 고사를 연상케 하듯 휴일을 이용, 부인(함혜룡씨)을 동반하여 3차례나 김중령의 관사(도만동)를 방문하여 간청한 끝에 가까스로 응락을 받아 내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 사령관이 그러한 고역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를 참모장으로 영입하려 했던 것은 6.27사건이 일어난 직후 준.하사관들의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설치했던 그 준.하사관 특별교육대의 교육주임으로 근무하는 동안 그 교육대의 교관으로 근무한 그의 사람됨과 능력을 좋게 평가했고, 또 그 후 통제부 참모장과 교육부장으로 같이 근무하며 그에 대한 보다 깊은 신뢰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체구는 왜소해도 담이 크고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 말은 신현준 장군이 후일 그 준.하사관 특별교육대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남긴 김성은 소위에 대한 인물평으로 전해지고 있다.
1946년 2월 하얼빈으로 부터 귀국한 뒤 태능에서 육군 제2중대를 편성하고 있던 정일권씨에 의해 그 중대의 소대장 요원으로 발탁되어 통위부에서 육군소위로 임관장을 받아 든 바로 그 자리에서 해방병단의 간부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때마침 그 자리에 나타난 손원일 단장(당시 계급 준장)에게 스카웃되어 그 길로 육군소위 임관장을 반환하고 진해로 내려가 해방병단(해안경비대의 전신)에 입대하여 소위로 임관했던 김성은 소위는 그 후 일취월장하듯 승진을 거듭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고급장교로 성장했다.
하얼빈 대도관중학교와 하얼빈 농과대학(중퇴) 출신인 그는 담력과 지략뿐 아니라 명석한 두뇌에 능한 언변, 그리고 친화력과 포용력을 함께 갖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신현준 사령관으로부터 처음 그러한 권유를 받았을 때 김 중령은 자신을 비하시키며 정중하게 거절하는 한편으로 그 당시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김동하 소령과 또 다른 영관급 장교 한 사람을 추천했으나 신 사령관은 묵묵부답이었다. 김 중령이 신 사령관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후일 그가 실토한 바 있듯 잘 알지도 못하는 신편부대로 가서 고생을 하기도 싫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까닭은 장래성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 사령관의 권유를 받아들였던 것은 김성은 장군 자신이 증언한 바 있듯 신 사령관의 인격과 지성에 감동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손을 잡게 된 그 두 분(8년 연차)은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큰 공헌을 했다.
해병대사령부에서 책정한 부대편성 인원은 약 100명의 기간장병과 300명의 1기 신병을 합친 약 400명이었으며, 그 인원은 외부에서 모집하지 않고 전적으로 해군 내에서 모집하여 확보하게 되어 있었다.
약 100명의 기간장병은 사령부의 각 부서와 1기생 교육대의 분대장급 이상의 간부요원으로 충당할 인원이었는데 그 기간장병의 확보를 위해 해군본부 인사국에서는 예하 각 부대에 공문을 시달하여 해병대로 전출할 희망자를 모집했고, 신현준 사령관과 김성은 참모장도 직접 간접 의중의 인물들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신 사령관이 부산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 부산기지 의무실장(병조장)으로 있다가 특교대(2차)를 나와 부산기지 보급관으로 있던 홍정표 소위는 "육전대를 창설한다."고 말한 신 사령관의 전화연락을 받고 기꺼이 동참을 했고, 신병교육대의 중대장 요원으로 발령을 받은 고길훈 대위(군사영어학교 출신)는 신 사령관이 인천기지 사령관으로 있을 때 함께 근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령부 병기관으로 임명된 김낙천 소위(특교 1차)와 헌병대장 정광호 수위(특교 1차), 1중대 선임장교로 임명된 정중철 수위(특교 1차) 및 1중대 선임장교로 임명된 안창관 소위(특교 1차)등은 참모장 김성은 중령과 더불어 이른바 하얼빈 그룹의 인맥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병기간 중 목포경비사령부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즉 단 한 명의 병과장교로서 총무, 작전, 경비 등의 주요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김재주 대위(일본해군 지원병2기)는 결재서류에 사인을 받을 때 "먼저 가 있으라"고 한 참모장 남상휘 소령(일본군 소년비행학교 출신)의 격려 하에 해병대로 넘어 가려고 하자 평소 그를 따르고 있던 10여 명의 대원들이 함께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몹시 화가 난 정긍모 사령관이 "이놈들 갈려면 가! 나 혼자서 경비부를 지킬 테니 다 가란 말이야!" 하며 울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김재주 대위는 신병교육대의 2중대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이 밖에 사령부에서 확보한 약 100명의 기간장병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15명의 특별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조선해양청년단(민족청년단 계열) 소속이었던 그들은 그 해(1949년) 1월 1일 국방장관을 겸하고 있던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민족청년단 총재)의 추천서를 가지고 진해로 내려와 3등병조(하사)의 계급을 부여받고 해군항해학교 특수과에 입교하여 30여 명의 다른 기간요원들과 함께 3개월 간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서울에서 진해로 내려올 땐 해군본부로 부터 항해학교 특수과를 수료하게 되면 소위로 임관시켜 주겠다는 언질을 받았으나 그 약속과는 달리 때마침 창설을 보게 된 해병대로 전입, 전원 신병교육대(1,2중대)의 분대장으로 임명되어 일기당천의 강병 육성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그 후 전원 간부후보생(1~4기)으로 임관하여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 했다. 김동윤 김연상 김익태 박경렬 박병호 박영복 염태복 이동호 이서근 이원경 최상엽 최일대(이상 일본 해군지원병 1기) 김창원 이일용(이상 해군지원병 2기) 김재혁(이상 해군지원병4기) 등이 곧 그들이며, 이들 중 김연상 이동호 염태복씨 등 3인은 장군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영관장교로 예편했다.
다음은 신병 모집에 얽힌 비화이다. 가입대 상태로 있던 해군13기 신병(약 1200명) 중에서 모집하게 돼 있던 300명의 1기 신병 모집을 위해 사령부에서는 김낙천, 안창관 소위와 강복구 1등병조(중사)를 모병관으로 선임하여 그 일을 추진시켰는데, 3명의 모병관 중 강복구 1조는 3월 17일경 해군13기 신병들이 수용되어 있는 장소(위생학교 강당)로 가서 모병선전 강연을 통해 약 330명을 모집하여 구두심문을 맡은 김낙천 소위와 안창관 소위에게 넘겼고, 그 두 사람의 구두심문관은 그들 중 30명을 떨어뜨려 300명을 확정했다.
그런데 모병을 위해 위생학교 강당으로 갈 때 "한 가락씩 할만한 자들을 골라야 해" 라고 한 김성은 참모장의 지시를 받은 강복구 1조(일본 해군 출신)는 다음과 같은 모병비화를 남겼다. 즉 해군본부 정보대에서 근무하다가 해병대로 전입했던 그는 그를 초대면한 신병들에게 서릿발 같이 무서운 사람이란 인상을 주었다. 그 이유는 검은 색안경에 칼날같이 주름잡힌 군복(전투복), 반짝 반짝 광채가 나는 반 장군화를 신은 그런 외모에다 그가 취한 일거수 일투족이 당장 부러질 것만 같은 기합이 강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뭇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드디어 검은 안경을 벗은 강1조는 표범의 눈을 닮은 자신의 표한한 눈빛을 투사하여 간략하게 찾아온 목적을 설명한 다음 단도직입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즉, "해병대란 일본 해군의 육전대와 같은 부대이며 적진상륙을 감행할 경우 100명 중 99명의 희생자가 날 수도 있다“ 고 전재하고는 "국가 민족을 위해 사나이답게 목숨을 바칠 각오가 서 있지 않은 사람은 해병대의 대원이 될 수 없다" 고 했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그 말이 떨어지자 얼어붙은 장내는 더욱 조용했고 가입대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의 얼굴에는 그 어떤 결심의 빛이 서리는가 싶더니만 서로 얼굴을 돌리며 눈치들을 살폈고, 귓속말로 옆사람과 무슨 말을 소곤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간파한 강1등조는 해병대를 지원할 사람은 휴식시간에 강당 옆 광장에 집합하라고 했는데, 10여 분 후 그 광장에 집합한 인원수는 놀랍게도 700명을 넘었다. 그리하여 강1조는 그들 중에서 한 가락씩 할만하게 생긴 똘똘하고 덩치도 크고 주먹도 큰 330명을 뽑아 구두시험관에게 넘겼는데, 임무를 완수한 강1조가 "이상으로 선발을 마친다"고 하자 그 현장에서는 "모병관님, 저도 뽑아 주십시오" "저도..." 하고 간청을 하기도 했고, "왜 나는 뽑아 주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었입니까?" 하며 항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1기 신병의 모병관으로 그와 같은 화제를 남긴 강복구 하사관은 해병대의 '기합의 대명사' 또는 '기합의 대부' 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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