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은 사령관님의 회고록 원본인 '국방의 멍에'입니다.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께서 보관해 오신 것을 제주도에 계시는 해병4기 문창해 대선배님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당초 정채호 대선배님에 의해 '국방의 멍에'란 제목으로 원본이 쓰여졌었으나 김성은 사령관님 생전에 책이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가 김성은 사령관님께서 서거하신후 김성은 사령관님의 아드님께서 이 원고를 가지고 가서 다시 편집하여 출간한 것이 바로 제가 그동안 손가락이 아프도록 두들겨 올렸던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였습니다.
책 내용의 상당부분이 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회고록에 대한 선후배님들의 질문을 받다가 어렵게 회고록의 당초 원본를 받아서 처음부터 다시 워드로 쳐서 올리겠습니다.
저에게 회고록 원본의 저작권을 허락해주신 정채호 대선배님과 저에게 회고록 원본을 주신 문창해 대선배님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워드에 익숙하지 못한 관계로 혹시 오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적하여 주시면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은 제4대 해병대사령관님 연혁
성명 : 김성은
생년원일 : 1924년 03월 14일
본적 : 경상남도 창원시 가음정동 671번지
학력
-1942년 03월 : 만주 하얼빈 대도관중학교 졸업(5년제)
-1945년 08월 : 만주 하얼빈 농업대학 3년 수료
군사 학력
-1950년 01월 : 시흥육군 보병학교 수료
-1950년 02월 : 육군 참모학교 수료
-1956년 02월 . 육군대학 졸업(준장)
-1958년 12월 : 국방연구원 졸업(소장)
군사 경력
-1946년 04월 : 해군소위 임관
-1946년 09월 : 해안경비대 목포 기지사령부 부관(중위)
-1947년 05월 : 해안경비대 부산 기지시령부 부사령관(대위)
-1948년 06월 : 해안경비대 묵호 기지사령부 부사령관(소령)
-1948년 08월 : 진해 통제부 교육부장(중령)
-1949년 09월 : 해병패 참모장(중령)
-1949년 10월 : 진주공비 내습 격퇴
-1949년 12월 : 해병대 사령부 제주도 이동
-1950년 07월 : 해병대 김성은 부대장으로 여수 상륙 / 남원 전투 참여, 함양 백암산 전투,진주 전투 / 마산 진동리 전투(1950년 7월31일 ~ 8월 11일)
-1950년 08월 06일 : 진동리 전투 전과로 전 부대 1계급 특진(대령)
-1950년 08월 16일 : 통영 상륙작전 성공
-1950년 08월 25일 : 인천 도착, 해병대와 합류
-1950년 10월 01일 : 북한강 추격작전 전개
-1950년 10월 27일 : 원산으로 이동, 적 패잔병 섬멸을 위해 태백산 작전 수행
-1950년 11월 : 중공군들의 장진호 미 해병 공격
-1950년 12월 : 마전리 전투 / 흥남부두 철수작전 / 해병대 사령부와 연대 분리, 제1연대장 .부임
-1951년 01월 27일 : 백두대간 전투, 강원도 산악지구 전투 위해 영덕 상륙
-1951년 02월 05일 : 주왕산 국립공원 덕산동 계곡 전투
-1951년 02월 07일 : 팔각산과 동대산 점령, 영덕지구 전투 완료
-1951년 02월 15일 : 동해로 이동, 육군 3군단 예하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배속)
-1951년 02월 16일 : 영월로 이동
-1951년 02월 19일 : 영월 3군단(유재흥 소장) 본부 도착 / 봉래산 탈환, 거운리 진출, 마차리 북방 육군 7사단 지원
-1951년 02월 21일 : 속골, 녹전리 전투 승리
-1951년 03월 01일 : 평창면 대화리까지 진격, 정선으로 이동
-1951년 03월 04일 : 고비덕산 전투 승리
-1951년 03월 13일 : 연대 최종 목표인 대관령 차항리 동쪽 진출 / 영월, 정선지구 전투 완료/ 미 9군단 배속(3월 18일 홍천 집결)
-1951년 03월 21일 ~ 4월1일 : 홍천 가리산 전투 승리, 미 해병과 합동작전
-1951년 04월 03일 : 작전지역을 미 2사단 22연대에 인계하고 춘천으로 이동
-1951년 04월 09일 ~ 22일 : 춘천 화천지구 전투, 중공군과 승부
-1951년 05월 11일 : 홍천에서 김대식 대령과 참모장 임무 교대. 사령부 참모장으로 발령
-1951년 05월 20일 :부산 용두산 해병대 시령부 참모장으로 부임 / 해병의 전투력 강화를 위한 증편 작업
-1951년 06월 04일 ~ 20일 : 해병대 도솔산 전투(연대장 김대식 대령)
-1951년 07월 08일 ~ 10일 : 해병대 대우산 전투
-1951년 11월 01일 : 한국 해병 2연대 증편 논의(미조리함, 연대장 김두찬 중령)
-1951년 11월 30일 ~ 1952년 02월 10일 : 해병대 각종 부속부대 창설(포병 대대, 공병 중대, 의무 중대, 제2연대, 해안 공병 부대) / 해병대 전사 편찬 시작
-1952년 03월 15일 : 진해 해병 교육단장 부임 명령(08월 18일 정식 취임)
-1952년 10월 20일 : 해병 제1전투단장으로 사천강 전투 참여
-1952년 10월 31일 : 중공군 1개 사단을 격파한 사천강 전투 승리
-1953년 05월 07일 : 미 1군단 예비대로 이동 후 휴식
-1953년 06월 28일 ~ 07월 12일 ' 연천지구 전투 승리
-1953년 07월 07일 : 고길훈 전투단장에게 인계, 교육단장 부임
-1953년 07월 27일 : 휴전
-1953년 09월 : 해병 교육단장(준장)
-1956년 02월 : 해병 제1사단장(소장)
-1959년 06월 : 해병대 부사령관(소장) 겸 군사정전위원회 한국군 수석대표
-1960년 06월 : 해병대 제4대 사령관(중장)
-1962년 06월 : 해병대 사령관 이임
경영 경력
-1963년 07월 ~ 1963년 03월 : 인천 대한중공업 주식회사 사장 및 사단법인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
정치 경력
-1963년 03월 ~ 1968년 02월 : 국방부 장관
-1968년 03월 ~ 1970년 : 대통령 안보 특별보좌관
사회단체 경력
-1988년 04월 ~ 1993년 09월 : 해병전우회 중앙회 총재
-1991년 01월 ~ 2007년 05월 :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고문
-1997년 03월 ~ 2007년 05월 : 사단법인 대한민국 해양연맹 고문
-1998년 11월 ~ 2007년 05월 : 미국 국립 한국전쟁기념관 및 도서관 건립 추진 / 위원회 순회대사 겸 고문
-1999년 12월 ~ 2007년 05월 : 사단법인 한국 군사학회 고문
-2004년 03월 ~ 2007년 05월 : 사단법인 해병대 전략연구소 이사장
기타 경력
-국방부장관협의회 의장
-전시 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반대 추진위원회 공동대표(1,000만인 서명운동)
-기독교 지도자협의회 고문
-국민운동본부 고문
상훈
*국내
-1951년 10월 : 태극 무공 훈장
-1952년 07월 : 을지 무공 훈장
-1952년 09월 : 을지 무공 훈
-1952년 12월 : 충무 무공 훈장
-1953년 01월 : 충무 무공 훈장
-1956년 10월 : 무공 포장
-1962년 07월 : 보국 훈장 국선장
-1963년 12월 : 보국훈장 통일장
*국외
-미국 은성 훈장
-미국 지휘관 최고 훈장
-미국 동성 훈장
-미국 공로 훈장 두 개
-대만 최고 훈장
-태국 최고 훈장
-월남 최고 훈장
-말레이시아 최고 훈장
국방의 멍에 - (1) 서문
8.15 직후 하얼빈에서 결성했던 고려 자위단(高麗自衛團)에 관한 얘기로부터 시작한 이 회고록은 25년 후인 70년 6월 5년 동안의 국방장관직에 이어 2년간 봉직했던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직을 마칠 때까지 본인이 조국의 국방을 위해 몸바쳐 왔던 주요한 발자취를 돌이켜 본 것이며, 이 회고록의표제(表題)를 '국방의 멍에'로 정하게 된 까닭은 내 자신이 직접 그 멍에를 지고 살아왔던 격동의 세월과 국방의 중요성을 상징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본인은 해군・해병대의 몇몇 원로인사들과 뜻을 모아 예비역 장병들의 친목 단체인 서해구락부(誓海俱樂部)를 창설하여, 친목단체를 이끌어 나갔으나, 80년 12월 중순경 신군부에 의해 다른 모든 사회단체들과 함께 해체를 당했다. 87년 6.29 선언 이후 그 서해구락부를 재건하려 했으나 예비역 해군측의 사정으로 뜻을 이룰 수가 없어 부득불 해병대만의 예비역 친목단체인 '해병전우회 중앙회'를 결성하여 그 조직체의 운영을 위해 정성껏 봉사를 해왔었다.
그리고 성우회(星友會)의 운영과 발전을 위해서도 미력이나마 다해 진력해 왔다. 또한 17년 전 심장질환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전까지는 신앙간증을 하기 위해 틈틈이 경향 각지에 있는 여러 교회를 순방한 적도 있었다.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은 후진들에게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가 안보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이 회고록을 남기게 되었다.
조국 광복후 우리가 겪었던 일들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6.25전쟁 때에 겪었던 눈물겨운 수난과 항전(抗戰)이었으며, 수난의 역사속에서 우리는 비록 회지막급(回之莫及)한 일이긴 했지마는 국방(國防)과 국력(國力)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우리 국민들에게는 공산 침략군을 응징하기 위해 내한했던 16개 유엔 회원국의 군대와 5개 의료지원국의 요원들이 마치 붉은 악마의 무리들을 무찌르기 위해 하늘나라로부터 파견되어 온 천사의 군대와도 같은 느낌이 들었었는데, 결과적으로 휴전으로 마무리 된 3년간의 이념전쟁(理念戰爭)은 한· 미 양국이 상호방위조약(相互防衛條約)의 체결에 합의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방위전략을 집단안보(集團安保)라는 체제 속에 유지하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으며, 그와 같은 방위체제를 구축하게 됨으로써 우리 나라는 후일 월남 공화국과 미국 정부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약 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월하여 공산 침략에 직면해 있는 월남 정부의 군사적인 평정사업(平定事業)과 전쟁 복구사업을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국방부 장관 재임기간 중에 단행이 되었던 국군의 월남 파병은 물론 6.25전쟁 때 우리가 자유우방국가로부터 입었던 막중한 은혜에 보답한다는 명분도 작용을 했고, 또 국력의 해외 진출이라는 정치사적(政治史的) 의의와 경제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파병을 단행한 국가 정책의 기본목적은 어디까지나 한· 미 상호방위조약에 입각한 집단안보의 구현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은 곧 우리 정부가 의도했던 바와 같이 우리의 국방력을 더욱 튼튼하게 다지고 우리의 경제력과 국력을 더욱 강화하고 신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었다.
일찍이 이 지구상에 부침(浮沈)했던 허다한 국가들의 역사가 입증하듯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었고, 전젱은 지금도 이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이 되고 있다. 물론 한반도의 경우는 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남한에 대한 적화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은밀히 핵무기의 개발을 추진하는 등 오로지 전쟁준비에만 광분하고 있으므로 우리들로서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했던 지난날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나 민족의 숙원인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국가 안보의 절대적인 관건이 될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정부나 국민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되리라고 믿는다.
한국전쟁의 현대사적 의미에서 본인은 2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첫째는 "노근리 사건"에 대한 소견으로서 전장이란 국가의 존망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단 군사목표로 선정된 지역이나 표적에 대한 공격은 무차별적인 것이다. 전쟁이후 평화시의 시각에서 전쟁 당시 군사목표 공격에 대한 판단을 하여 시시비비를 가린다면 그러한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말 무의미한 일이며, 국력만을 낭비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둘째는 우리 해병대가 50세 장년으로 훌륭하게 성장하여 전 세계적으로도 막강한 군대로 변모되었다. 오늘의 우리 해병대는 한국전쟁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해병대의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지원에 힘입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편 이 자리를 빌어 본인은 특히 지난날의 구국전선에서 나와 함께 전투를 하던 중 호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전우들과 자유민(自由民)의 전우로서 참전했던 월남전선에서 애석하게도 희생을 당한 장병들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빌며, 또한 본인이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신심도 굳지 못한 때가 많았고, 또 부덕(不德)하고 부족함이 많았던 나에게 전쟁터에 있을 때나 군복을 벗고 공직생활을 할 때나 늘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셨고, 지극하신 사랑과 관용으로 70평생을 대과없이 영위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국운(國運)이 날로 육성하여 조국의 미래에 무한한 영광이 개척되기를 축원하며, 아울러 이 회고록을 펴 냄에 있어 여러모로 많은 협조를 해 주신 鄭采浩 동지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면서 서문에 대하는 바이다.
1999년
金聖恩 識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4대사령관 김성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4) 準下士官 敎育隊 (0) | 2014.03.22 |
---|---|
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3) 해방병단 제1중대장 (0) | 2014.03.22 |
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2) 入隊 (0) | 2014.03.18 |
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1) 고려 자위단 (0) | 2014.03.18 |
어렵게 구입한 김성은 4대 사령관님 회고록 (0) | 2014.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