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2) 入隊
마지막 호송열차를 타고 귀국한 나를 비롯한 약 20명의 단원들이 서울에 도착했던 것은 1945년 12월 하순경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단원들은 수표정에 있는 광복군 지회의 숙소에서 기거를 하며 일부는 먼저 귀국한 단원들의 주선으로 이승만 박사가 거처하는 돈암장(敦岩莊)으로 가서 경비를 맡기도 했고, 일부는 김구 선생이 거처하는 경교장(京橋莊)으로 가서 경비를 서는 등 저마다 어렵게들 식생활을 해결하며 군에 입대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원들이 의지했던 수표정의 광복군 지회는 중국으로 부터 귀국한 독립운동가인 채택용씨(당시 50세)가 개설해 놓은 것이었는데 후일 해병대의 고급장교가 된 채택현씨의 친형이었으며, 6.25전쟁 때 함경남도 도지사로 활약한 바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광복군 지회에는 만주에서 먼저 귀국하여 해방병단창설에 동참하게 된 만군 대위 출신의 권상복씨(당시 30대)가 찾아와 해방병단에서 단원들을 모집하고 있으니 뜻이 있는 사람은 입대를 하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약 절반 가량의 단원들이 입대를 했었다.
일본군이 패전하기 직전까지 소· 만 국경지대의 우스리강변에 기지를 둔 만주 강산군(江山軍)의 대위로 근무했던 권상목(權相穆)씨는 만주 명문가의 규수와 결혼을 하게 되어 만군의 추천으로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문무겸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또 뒤에 언급이 되겠지만 '해상인민군 사건'을 척결하는데 있어 수훈적인 역할을 한 허승룡씨(예비역 대령)와는 가정적으로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46년 1월 17일 해방병단병학교(해군사관학교의 전신)가 설립되었을 때 중위의 계급으로 근무를 했던 권상목씨는 그해 4월 하순경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대련(大連)으로 갔다가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한편 삼촌과 함께 귀국을 했던 나는 삼촌께서 청량리에 거처를 마련하게 됨에 따라 삼촌댁에서 기거를 하며 간혹 수표정의 광복군 지회로 가서 단원들의 동태도 살피고 창군과 관련된 궁금한 소식을 전해듣곤 했다. 미처 언급을 하지 못했지만 삼촌과 내가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은 8.15 직후 하얼빈에 침투한 연안(延安) 독립동맹의 공작요원들이 나를 찾아와 권총을 들이대며 고려자위단을 독립동맹의 산하단체인 조선인 의용군에 편입하라고 협박하는 등 장차의 사상적 문제에 어려움을 예측하였기 때문이며, 그런 정세판단을 한 삼촌께서는 팔려고 내 놓아도 아무도 사려 들지 않는 부동산을 그대로 버려 두고 그냥 귀국을 했었다.
당시 서울 시가지의 요소 요소에는 '광복군'이니 '조선임시군사위원회', '학병동맹', '조선군사준비대', '육해공군 출신 동지회' 등 수많은 사설군사단체의 간판이 내걸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러한 간판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장차 군의 간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수표정의 광복군 지회에서 뜻밖에도 정일권씨의 부탁을 받고 나를 찾아 온 대도관중학교의 1년 후배인 최경남씨(후일 육군경리감 역임)를 따라 태능으로 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정일귄씨는 반갑게 맞이하며 나를 그가 편성중에 있는 제2중대의 소대장으로 기용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감격을 하면서 귀국하는 교포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 고려자위단을 결성했던 일과 동계관산역에서 우연히 나의 힘이 되어 준 그 기연(奇緣)이 나에게 이런 행운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946년 1월 15일에 공포된 군정법령 제28호에 의하여 창설을 보게 된 남조선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에서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도에 1개 연대씩(총 9개연대)을 창설하게 돼 있었는데 바로 그 무렵 태능에서는 서울에 창설할 제1연대를 창설하기 위해 그 초석과 같은 기간부대가 될 제1중대와 제2중대를 편성하고 있었던 것이며, 1중대는 채병덕(蔡秉德)씨가, 2중대는 정일권씨가 각각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한데 정일권씨로부터 그러한 청을 받게 된 나는 졸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기쁨을 느끼면서, 정일권씨가 고려자위단의 활동을 어떻게 보았기에 나에게 이런 감투를 주려고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즉석에서 응락을 했다. 단김에 쇠뿔을 뽑으려는 듯이 정일권씨는 그 길로 나를 군정청의 국방사령부가 있는 구 총독부 건물로 데리고 가서 국방사령부의 고문으로 있는 이응준(李應俊)씨와 상담을 한 후에 국방사령부의 미군정청 책임자인 프라이즈 대령에게 요청하여 그 즉석에서 육군소위의 임관증을 받게 해 주는 것이었다. 나로저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벼락감투를 쓴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임관장을 받아들고 있던 나는 바로 그때 그 사무실에 불쑥 나타난 전형적인 마도로스 타입의 풍채가 좋은 신사 방문객이 임관장을 받아들고 있는 나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아 손원일 단장 어서 오시오"하고 인사를 건네는 이응준 고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즉 오늘(2월 15일) 해방병단에서 모집한 700명의 신병을 인솔해서 진해로 내려간다고 말한 그(손원일 해방병단장)는 마치 농담을 하듯 "아 고문님, 우리 해방병단에도 좋은 인재 주어야지요. 저분 우리 해방병단에 보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는 것을 직감하곤 그 말에 강한 인력을 느꼈다. 불현듯이 치밀어 오른 고향생각과 해군에 대한 동경심 같은 것이 나의 마음을 왈칵 끌어 당긴 것이었다. 다음 순간, 저분이 해군을 창설하는 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던 나는 공손히 통성명을 한 다음 "진해 얘기를 하시니 고항생각도 나고 해군과 인연을 맺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만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고 했더니 그는 "보아하니 조선경비대 소위의 임관장을 받은 분 같은데 그만한 예우를 해 드려야죠" 하기에 그 즉석에서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나는 말할 수 없이 미안한 생각이 든 정일권씨에게 죄송하다는 말과 후일 꼭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말을 하여 임관장을 돌려드리고선 그 길로 프라이즈 국방사령관과 이응준 고문에게 하직인사를 나눈 손원일 단장과 함께 서울역으로 가서 풀렡홈에 도열해 있는 700명의 신병들을 인솔하여 그날 오후 3시경 진해로 출발했다.
그 700명의 신병들은 2월 초 서울, 목포, 그리고 군산 지구에서 모집한 신병들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하얼빈에서 귀국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던 상당수의 고려자위단 단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전체 단원의 약 절반가량이 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그처럼 많은 인원이 해방병단에 입대하게 되었던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그 권상목씨의 권유와 해군헌병대의 전신인 SP대(해안 순찰대)의 초대 대장을 지낸 황운서씨(일본관동군 군속출신) 등의 진로 개척에 동참을 한 결과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고려자위단에 관한 그 뒷 얘기는 나를 비롯한 20여 명의 잔류단원들과 귀국을 희망한 1,000여 명의 교포 난민들이 수용소를 떠난 후 현지 하얼빈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함께 떠나지 못한 김동석(金東石), 황동규(黃東圭), 박철씨 등 몇몇 단원들이 그 난민수용소를 시설이 보다 편리한 유정(柳町)의 폐쇄된 유곽건물로 옮겨 수용소를 찾아드는 난민들을 보호해 왔다.
그 이듬해 1946년 4월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하얼빈에 진주한 팔로군(八路軍)에 체포되어 약 1년간 감옥에 수감되어 세뇌교육을 받은 후 석방되어 북한으로 가 있다가 각자 개별적인 행동으로 월남했다고 하는데 내가 떠난 후 자위단의 단장을 맡고 있던 김동석씨는 육사 8기로 임관하여 6.25동란기를 전후해서 육군 방첩대(HIB)의 단위부대장으로서 맹활약을 했고, 일본 학병 출신인 황동규씨는 해간(海幹) 4기, 박철씨는 해군 하사관으로 입대하여 모든 단원들이 그러한 길을 걸었듯이 조국의 국난 극복과 국토방위를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언급해 둘 얘기가 있는데, 이는 그것은 곧 6.25때 북한측 휴전협상 대표로 활약한 바 있었고, 그 후 소련으로 망명했던 이상조(李尙朝) 장군(소장)이 1993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동석씨에게 했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이다.
일본군이 패전한 후 연안(延安)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제3지대장으로서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지구를 관할하고 있었던 이상조(당시의 假名은 金澤明)는 그 당시 하얼빈지구에서 활약을 하고 있던 제3지대의 부하대원들이 조선인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여 난민들을 보호해 주고 귀국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안동까지 열차로 호송해주고 있는 고려자위단 단원들을 어떠한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모조리 쓸어 없애 버리겠다고 했을 때, 지대장 이상조씨는 그 자위단 단원들의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나머지 자기 부하대원들의 그러한 행동을 제지시켰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진해로 내려가던 그날, 열차를 타고 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었겠지만, 나는 미군들의 야전식량인 C레이숀이란 것을 난생 처음 먹어보았다. 미 군정청에서 공급해 준 C레이숀 박스 안에는 각종 깡통조림과 맛이 짭짤한 비스켓을 비롯해서 날 것을 그대로 썰어서 먹다가 짠맛에 질겁을 한 베이컨도 있었고, 야전장에서 마실 물을 소독할 때 사용하게 돼 있는 알약으로 된 염소 등 별 희한한 것들이 다 있었는데 미군들이 먹는 그 영양분있는 식품들을 이게 웬떡이냐며 정신없이 과식했던 사람들 가운데 특히 원산 출신의 백기조씨(후일 부산경비부사령관 역임)는 그 염소 타불렛을 소화제로 착각하고 과다하게 복용했던 나머지 배탈과 위장병이 나서 큰 곤욕을 치렀던 일화도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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