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4) 準下士官 敎育隊
1946년 6월 1일 해방병단 교육대의 제1기생들이 수료하고 제2기생들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고 있던 7월 초순경 나는, 준하사관교육대의 교관으로 선발되어 약 2개월간 교관으로 근무했다.
해방병단 본부가 위치하고 있던 진해기지에 준하사관 교육대를 설치하게 된 것은 그해 6월 27일 실무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던 준사관(병조장급) 및 하사관들이 손원일 단장에게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과격한 행동으로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군기를 위태롭게 한 일이 있어 병단 본부에서는 그와 같은 하극상사건의 재발 방지와 군기확립을 위해 군의 중간간부들인 준사관 및 하사관들에 대한 특별한 기합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키로 한 것이었다.
준하사관 교육대의 교육기간은 1개월간이었는데, 7월 초부터 8월 말경까지 2차에 걸쳐 실시된 교육기간 중 교육을 받았던 인원은 약 300명 정도였다. 교관으로 선발되어 고생을 한 장교들은 나 외에 일본군 간부후보생 출신인 최용남 소위와 일본 상선학교 출신인 김정주 소위 및 일본학병출신인 최의현 소위 등 4명이었고, 교육대의 대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그 자리를 자청해서 맡은 만군 대위 출신인 신현준(申賢俊) 견습사관이었다.
바로 그 무렵 중국으로부터 귀국하여 견습사관의 계급으로 해방병단의 창군에 동참했던 신현준 견습사관(교육기간중 부위로 임관)이 그 자리를 맡겠다고 자청을 하게 되었던 것은 아무도 그 자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현준 견습사관이 그 자리를 맡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그 왈가닥 패거리들한테 맞아 죽으려고 하느냐", "몽둥이찜질을 당할 일을 왜 자청하고 나서지?"하며 만류를 했으나 만군에서 팔로군과 싸운 실전경험의 소유자였던 신현준 견습사관은 거치른 야생마를 준마로 길러낸다는 신념과 각오로 그 자리를 맡은 것이라고 했다.
준하사관 교육대에서 실시했던 교육의 내용은 정신교육을 비롯한 일반소양교육과 제식교련을 포함한 군사훈련 등이었고, 교재는 주로 일본군의 교범을 번역해서 사용을 했다. 그리고 그 준하사관 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6.27사건과 관련이 없는 김두찬, 고길훈, 남철, 박원준, 한문식, 김남교, 이경원, 민형식씨 등 몇 사람의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견습사관들로 있었으며, 그 당시 피교육 중에 있던 해군사관학교 1기생들과 함께 1947년 1월 참위로 임관했던 그들 가운데 후일 해병대로 전입했던 사람은 제5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김두찬씨, 김두찬 사령관으로 있을 때에 부사령관을 역임했던 고길훈씨, 그리고 준장으로 예편했던 박원준씨 등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비단 나 혼자 만의 추억은 아니겠지만 준하사관 교육대를 생각할 때마다 모기떼의 공습에 시달렸던 쓰라린 추억을 상기하게 된다. 교육대가 위치하고 있던 곳이 공창(工廠) 내의 울창한 숲속이었고, 또 그 시기가 모기떼의 전성기인 7-8월의 한여름철이었으므로 대낮에도 해를 가리는 꾀 큰 목조건물 속에는 주간에도 모기들이 웽웽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고, 일몰 후에는 당직근무를 서고 있는 교관이나 교장에서 취침을 하고 있는 피교육자들에게 동이 틀 무렵까지 지속적인 대량공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어느 누구 한 사람 피부병 환자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특히 잊혀지지 않는 일은 입대한 날로부터 겪었던 일이지만 창군기의 해방병단에서는 식량난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정부도 없는 상태에서 미 군정의 다스림을 받고 있던 그 시절의 남조선 경제사정은 이를데 없이 황폐했다. 가파른 보리고개가 아닌 때라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그러한 시절이었으므로 창군기의 군대사정도 그만큼 핍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장병들은 세끼 중 한끼 정도는 미 군정청에서 지급해 주는 소액의 예산으로 구입한 쌀과 보리로 지은 혼곡밥을 먹고 그 나머지 두끼는 미국으로부터 보내온 구호식량(주로 소맥분)을 가지고 수제비를 끓여 먹었는데 어떤 때는 그 밀가루가 변질되어 수제비를 먹은 대원들이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는 바람에 큰 곤욕들을 치른 적도 있었다. 변질된 밀가루가 있었던 것은 장기간의 해상운송 도중 선체의 창고 속에 습기가 차고 파도와 비바람이 새어 들어 그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또한 해방병단 수송부에는 병단 창설요원의 한 사람인 백석봉씨의 개인 소유물인 일산 쓰리쿼터 고물트럭 한대가 있어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었는데 특히 보급과에서는 그 고물차를 이용해서 전라북도 고창, 군산, 목포 등지와 진해 인근 지방으로 식량과 부식 등을 조달하기 위해 번질나게 내왕하고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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