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5) 王 司令官의 不名譽 除隊式
1946년 8월말 2개월간의 준하사관 교육대의 필관근무를 마친 나는 9월 1일부로 신설부대인 목포기지사령부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9월 초 같은 날자에 전보발령을 받은 왕홍경(王弘慶) 목포기지사령관과 남상휘, 이경원,박성관, 박원준, 김남조, 박양원(군의관) 등 여러 명의 장교들과 약 70명의 사병들과 함께 목포기지에 배치될 소형 함정(200톤 가량의 잡역선)을 운항하여 목포로 떠났다 그 잡역선은 속력(시속 6놋트 정도)이 워낙 느린데다 빠를 때는 유속(流速)이 약 8놋트까지 나가는 우수영 지역의 조수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목포까지 가는데 2일간의 시간이 걸렸다.
1946년 6월 IS일 해방병단이 조선해안 경비대로 개편되기 전까지는 마산의 미군정 장관으로부터 인수한 몇 척의 소형 일본 해군 함정으로 진해근해와 인천지역에 국한된 연안경비를 해 왔었으나 조선해안경비대로 개편이 된 후에는 미국 해안경비대로부터 고문단이 파견되어 함정도입을 적극 추진하게 됨에 따라 해안경비대에서는 목포, 부산, 그리고 묵호 등지에까지 연안경비를 위한 기지를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나에게 주어졌던 기지사령부의 부관이란 직책은 통칭 부사령관으로 불려지기도 했지만, 부대의 참모장격인 직책이었다. 그러한 직책은 해방병단이 조선해안경비대로 개편될 때 일본군의 편제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겠지만 일본군에서는 부부대장(副部隊長)이란 직책이 띠·로 없고 부관이 부(副)대장격이 되어, 부대의 행정업무 일체를 관장하게 되어 있었다.
기지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던 건물은 관할 미 군정청에서 제공해 준 목포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일본인의 사찰 건물이었다. 사찰의 구조는 4분의3 정도는 사원, 4분의 1 정도는 승방(僧房)으로 돼 있었고, 2층 구조로된 그 승방의 하층에는 식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2층의 승방은 두 개로 나누어져 하나는 왕 사령관이 부인과 함께 거처를 하고 있었고, 미닫이를 사이에 둔 다른 방에는 나를 포함한 4-5명의 독신장교들이 기거를 했다. 또 한사람 통위부로부터 직접 파견된 경리장교 한사람이 있었는데 육군 군복에다 장도(長刀)를 차고 긴 장화를 신은 그 육군장교(중위)는 영내에서 기거하지 않고 외부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부대가 창설된지 약 2주일이 경과된 어느날 밤이었다. 목포 시내에 있는 금강원이란 요정에서는 평소 으시대기를 좋아하던 왕홍경 사령관(부위)이 장난삼아 꺼내 든 자신의 육혈포(六穴砲-권총)로 마주 앉아 농을 주고 받고 있던 기생을 쏜 사건이 발생하여 왕 사령관의 신상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했다. 그 사건의 전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즉 그날 저녁 하정복을 착용한 그 위에 허리에는 흰 지휘도를 차고 권총까지 휴대한 왕 사령관은 유지들과 함께 저녁식사가 있다고 외출을 했는데 취침 준비를 하고 있던 밤 9시 30분경 위병소장이 "부관님 큰일났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위병소에 5-6명의 경찰관이 몰려와 사령관을 찾는다고 했고, 또 약 30분전 사령관이 모자도 쓰지 않고 윗저고리도 걸치지 않은 채 허둥지둥 부대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았으나 그 후 나가는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인가하여 위병소로 나가 보았더니 목포경찰서장과 수사과장이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4-5명의 형사를 데리고 위병소에 와 있었고, 찾아온 용건은 왕홍경 사령관을 체포하러 온 것이라고 했다. 사령관을 체포하러 왔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경찰서장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했더니 금강원에서 술에 만취한 왕 사령관이 육혈포로 함경덕이라는 기생을 쏴서 죽였다고 했다.
그러한 말을 들은 나는 내심 취중에 저지른 사고이긴 하나 사령관이 큰 사고를 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경찰관들을 위병소에 기다리게 해놓고 사령관이 거처하는 곳으로 달려가니, 사령관은 방 안에 있지 않고 부인만 있었는데, 부인의 말에 따르면 20-30분 전 사복으로 갈아입고 서울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부인한테서 그런 말을 들은 나는 직감적인 판단으로 왕 사령관이 막사 뒷편 담장을 뛰어 넘어 서울로 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잠시 전 나를 찾아왔던 위병소장이 약 30분 전 모자도 쓰지 않고 윗저고리도 걸치지 않은 그런 몰골로 허둥지둥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았어도 나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고, 또 평소 왕 사령관이 중국에서 알게 된 유동열(柳東悅) 통위부장이 자기 힘이 되어주고 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나에게 한 적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유동열 통위부장에게 구명운동을 하러 갔을 것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막사(기지사령부 건물) 뒷편 담장쪽을 살펴보았더니 오후에 비가 내린 꼽꼽한 지면에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발자국을 따라 담장까지 가 본 나는 나의 판단이 빗나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포기지 사령관으로 발령받기 전까지 해방병단의 초대 헌병대장으로 근무했던 평안도 출신인 왕홍경 사령관은 자신이 과거 장개석 총통의 중앙군(국민당 정부군을 지칭) 대좌 출신이니 장군 출신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퍼뜨리는 등 으시대기도 잘하고 허풍떨기를 좋아하는 그러한 위인(偉人)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독이 오른 듯한 빨간 코를 지니고 있었는데, 코가 왜 그렇게 빨갛게 되었냐고 물을라치면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울 때 죽은 일본 군인들의 XX를 너무 많이 삶아 먹어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파안대소를 하는 해학성도 지니고 있었다.
한편 그 당시 목포기지에는 권총이 몇 정 있었으나 실탄은 공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령관이 그러한 사고를 내게 된 것은 바로 그 무렵 목포항에 기착했던 미 해군 구축함에 실습항해를 위해 탑승해 있던 해군사관학교 1기생들로부터 얻어 놓은 실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진해에서 목표까지 실습항해를 했던 그 해사 1기생들은 미 구축함이 목포항에 기착한지 이틀 후 실습을 마치고 하선하여 열차편으로 진해로 내려갔었다.
왕 사령관이 막사 뒤쪽 담장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일단 막사로 돌아왔던 나는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입장이 몹시 난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때 경찰서로부터 보고를 받고 막사에 들린 미 군정청의 췌슬라 고문(미 육군대위. 그는 목포경찰서의 고문을 겸하고 있었다.)이 왕 사령관을 찾는 바람에 나는 부득불 왕 사령관을 추적하여 부대로 데려오기 위해 경찰서에서 보유하고 있는 짐실게가 달린 오토바이에 2명의 위병을 태워 가지고 광주(光州) 방면으로 떠났다. 이미 10시가 지난 이후여서 서울행 열차나 광주행 시외버스도 없었으므로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도보로 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짐작했던 대로 목포에서 약 20리 가량 떨어진 인적도 없고 지나가는 차량도 없는 굴곡진 산모퉁이 도로변에서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를 피하기 위해 길 옆 숲속으로 몸을 숨기는 왕 사령관을 어렵잖게 발견하여 유동열 통위부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가야만 되겠다고 하는 그를 취중에 저지른 사고인데 췌슬라 고문에게 빌 생각을 해야지 무단 근무지 이탈죄로 처벌을 받아서야 되겠냐며 간곡히 설득을 한 끝에 가까스로 그를 오토바이의 됫짐실게에 태워 함께 부대로 돌아왔다.
부대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췌슬라 고문은 왕 사령관을 목포경찰서로 연행하여 유치장에 수감을 했으나 그때 나는 장교들로부터 기생 함경덕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얘기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링겔을 맞고 있다는 말을 듣고 불행중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길로 부대 근처에 있는 병윈으로 가 보았더니 과연 그 기생은 살아있었으나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고, 공중에 매달린채 맹물같은 물방울이 환자의 한쪽 팔뚝에 꽃혀 있는 굵직한 바늘 윗쪽으로 연결된 가느다란 고무줄로 또닥또닥 떨어뜨리고 있는 난생 처음보는 링겔병이란 것도 목격했다.
왕 사령관이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나는 간흑 궁금해 할 소식도 전해 주고 의복과 담배 등도 차입해 줄 겸 고약한 똥, 오줌냄새가 나는 유치장을 방문하곤 했다.
한편 사령관이 유고가 되자 해안경비대사령부에서는 김장훈(金長勳)중위를 후임사령관으로 발령했는데 부인과 함께 목포에 도착한 김장훈 사령관은 보급관 민 모 소위의 주선으로 일제 때 목포 유지로 행세했다는 차보륜씨의 적산가옥(敵産家屋) 2층을 세로 얻어 살림을 했고, 그 집1층에는 차보륜씨가 거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장훈 사령관이 이사를 한 직후 나는 차보륜씨의 초대를 받아 차씨 집에서 저녁식사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차보륜씨가 한 말에 따르면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청년운동을 하고 있는 김대중(金大中)이란 사람이 자기 사위라고 했으나 그를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신임 사령관이 부임한 지 약 1개월이 경과된 후 왕홍경 사령관은 통위부로부터 내려진 불명예제대 발령을 받고 너무나 모욕적인 미국식 불명예제대를 했다. 췌슬라 고문의 지휘하에 치러졌던 그 미국식 불명예 제대식은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그날 사령부 뜰 정면 중앙에는 췌슬라 고문이 그려놓은 도면에 따라 췌슬라 고문과 김장훈 사령관이 서 있었고, 그 앞 좌우편에 장교들과 사병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산뜻한 하정복을 입은 왕 사령관이 2명의 위병에게 양쪽 팔을 잡힌 채 췌슬라 고문과 신임 사령관이 서 있는 앞으로 걸어와 정면을 향해 서게 되자 군사영어학교 출신인 이경원 소위가 영문으로 된 유동열 통위부장 명의의 불명예제대 선언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낭독을 했고,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췌슬라 고문은 왕 사령관 앞으로 성큼 다가가 정모를 벗기고 견장을 잡아 뗀 후에 정복 윗저고리에 달려 있는 단추를 위로부터 하나 하나 잡아 뗐다. 그리고 그 절차가 끝나자 이번에는 신임 사령관이 걸어 나가 단추가 죄다 떨어진 그 상의를 벗겨서 지면에 놓아 두고 제자리로 돌아왔고, 신임사령관이 그 일을 마치자 왕 사령관을 식장으로 연행해 왔던 그 2명의 위병이 바지와 군화를 차례로 벗긴 다음 런닝셔쓰와 팬티만을 걸친 맨발의 왕 사령관을 양팔을 잡고 위병소 바깥으로 내 보내는 것으로 식을 끝마쳤고, 일단 위병소 바깥으로 나간 왕 사령관을 위병소에 갖다 놓은 자신의 평복을 입고 영영 부대를 떠났던 것인데, 시종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미국사람들은 왜 저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내쫓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왕 사령관에 대한 연민의 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한데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6.25동란을 맞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왕년의 그 왕 사령관을 만나본 적이 없었으나, 1951년 5월 내가 해병대사령부 참모장으로 부임한 뒤 용두산 사령부로 나를 찾아온 김창남으로 개명한 육군소령의 계급장을 달로 있는 그 왕년의 왕홍경 사령관과 뜻밖의 재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한 말에 따르면 미국식 불명예 제대를 당한 후 깊은 반성을 하면서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했고, 6.25동란이 발발한 후 용케도 개명한 그 이름으로 복직을 하여 육군에서 복무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내가 목포기지사령부에서 근무했던 기간은 약 6개월 간이었고, 그 다음 보직은 부산기지사령부의 부관이었다.
그 당시 부산기지사령부는 인적도 드물고 민가도 없는 부산항 제4부두의 낡은 목조 창고 건물을 이용하고 있었으므로 목포 시내에 위치하고 있던 목포기지사령부의 막사에 비해 환경적인 조건이 너무나 열악한 편이었다. 그 건물의 규모는 길이가 20-30미터, 폭이 약 15미터 가량되고 바닥은 시멘트로 돼 있었는데 그 건물 일부에 칸막이로 만들어진 작은 공간의 사령관실과 사무실이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사병들의 내무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내가 부임할 당시의 사령관은 박진동 소령이었지만 얼마되지 않아 계병호 소령으로 교체가 되었었다. 그런데 그 부산기지의 해변가에는 6.25때의 판잣집을 연상케 하는 옥외변소 하나가 있어 사령관 이하 전 장병이 그 변소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그 변소가 부산기지의 명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 구조물이 반은 지면에 얹혀 있고 반은 해상에 떠 있는 형태로 돼 있어 바람이 거세게 불면 바다로 떨어지던 대·소변 등의 배설물이 역상승(逆上昇)을 하여 사정없이 엉덩이를 더럽히는가 하면 대변을 닦은 휴지가 변소 천장으로 날아 다니는 등 용변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곤욕을 치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부에 아무런 칸막이도 없었지만 규모가 워낙 작아 이용할 사람이 많은 시각에는 남자들의 경우는 부득불 기지내에 부설되어 있는 철로와 창고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서 용변을 볼 수 있었지만 남자들처럼 그럴 수도 없었던 홍일점의 타이피스트 아가씨의 경우는 그곳에서 약 10리 가량 떨어진 초량(草梁)까치 가서 용변을 볼 수도 없는 일이어서 많지도 않은 급료를 타기 위해 매일 같이 도시락도 싸들고 오지 않고 또 물도 한모금 마시지 않았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산기지의 명물이었던 옥외변소는 건물이 바다로 굴러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건물의 양쪽 기둥과 기둥 앞에 박힌 두 개의 말뚝 사이에 굵은 철사줄이 변소건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당직사령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자정무렵 거센 바람소리속에 들린 '쿵'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보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 변소가 없었기에 그 현장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니 말뚝과 기둥을 묶어 매어 놓은 철사줄이 끊겨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혹 누군가가 용변을 보다가 변을 당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랫쪽을 향해서 "어-이, 빠진 사람 누가 없나?" 하고 소리쳐 보았으나 철석이는 파도소리가 들릴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마음은 놓이는 듯 했으나 철저한 점검을 해 보기 위해 비상을 걸어 인원수를 확인해 본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나는 출근시간이 되어 나를 찾아온 미군 고문관이 "어제 퇴근시간까지 저 곳에 서 있던 빌딩이 어디로 가버렸지요?"하고 묻는 말이 어찌나 여유있고 유모어스러웠던지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간밤에 돌풍이 납치해간 모양"이라고 대꾸했더니 그는 자기도 그런줄 알았다고 말하면서 즉시 빌딩을 재건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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