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6) 艦艇 拉北事件
부산기지에서 약 4개월간 근무했던 나는 1947년 5월 하순경 묵호기지사령부의 부관으로 전보되었다. 그 당시 묵호기지에는 사령관 정긍모 소령(후일 제3대 해군참모총장 역임)외에 약 80명의 장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때 나의 계급은 대위로 승진되어 있었다. 묵호기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처음 설치된 주문진 파견대장 근무와 함장교육을 받았다.
1948년 5월에는 묵호기지에 소속된 소해정 301호(통천호)와 소해정 517(고원호)의 납북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았다. 통천호의 경우는 38선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주문진에서 묵호기지로 귀항하는 도중 그 함정에 침투해 있던 수명의 좌익분자들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정장 김원배 소위와 부장 백경천 병조장을 사살하고 다른 대원들을 협박하여 월북한 것이었고, 목포기지로부터 묵호기지로 전속명령을 받고 묵호기지로 운항해 오던 중 납북을 당했던 고원호 역시 같은 수법에 의해납북을 당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특히 묵호기지는 마치 초상난 집처럼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남한에 미 군정이 실시된 후 38선 이남의 해상경비는 미 7함대가 맡아 오다가 30여척의 함정이 도입된 1947년 8월 말경부터 우리 해안경비대에서 그 임무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해안경비대의 능력이 그만큼 향상되자 해안경비대사령부에서는 동년 10월 중순경에 부산항에 제1특무정대를 설치하고, 12월 중순경에는 여수를 근거지로 제2특무정대를 편성하여 동·서해안과 남해지역의 연안경비를 더욱 강화해 왔으나 문제는 창군 때부터 군내부에 침투해 있던 좌익분자들 때문에 그런 사건이 빈발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발생했던 그와 같은 함정납북사건은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일어났었다. 1949년 5월 11일 주문진 근해 해상에서 경비임무를 수행중에 있던 제1특무정대의 기함(소해정 508호) 내에 침투해 있던 이운학 소위(해사 2기) 등 몇및 좌익분자들이 제1특무정대사령관 황윤서 중령과 508호 정장 이기종 소령(해사 1기)을 사살하고 월북을 한 것이었다. 또한 월북한 것은 비단 함정 뿐 아니라 상당수의 군 내부 프락치들이 월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해방병단 교육대의 초대 대장을 지낸 그 강기태 중위와 제3중대장 이청갑 소위도 그 후 월북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창군기에 공산분자들이 군 내부에 침투하기로는 조선경비대(육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조선경비대에서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훨씬 전부터 그 후에 이르기까지 세상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었다. 정부수립 전에 일어난 사건으론 대구 1947년 10·1폭동사건을 들 수 있고 정부수립 후에 발생한 사건으론 1948년 10월 19일 김지회 중위(육사 1기)가 홍순석 중위 등 여수, 순천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 내의 공산프락치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여순폭동사건과 1949년 5월 38선에서 일어났던 8연대 1대대(대대장 강태무 소령)과 2대대(대대장, 표문원 소령)의 월북사건 등 많은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런데 군 내부에 침투한 공산분자들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일으켰던 그와 같은 사건들은 물론 해방과 함께 맞이하게 된 남북 분단의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인 혼란기를 반증하는 것이었지마는 그러한 결과에 대한 책임의 소재를 따진다면 그때 이미 남조선의 적화를 획책하는 가운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포조직을 확대하며 테러와 파괴를 일삼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언론과 사상의 자유, 출판과 결사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된 미국식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군정을 실시한 미 군정청에도 그 책임의 큰 몫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창군기 때부터 미 군정청 당국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경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군과정에서 많은 적색분자들이 침투를 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이 큰 사건을 일으켜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한 함부로 색출을 해 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군정이 종식되기 전까지는 마치 군대조직체란 것이 공산프락치들의 온상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군 내부의 공산프락치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던 그와 같은 사건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장병들의 반공의식이 점차 강화되고 검찰과 군 방첩대의 적극적인 대공작전과 검거선풍으로 점차 그 건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육군에서는 여순사건이 발생했던 1948년 10월 하순경부터 6.25동란기에 이르는 사이에 육군본부 정보국 제3과 주도하에(6.25동란 중 특무대가 창설된 후에는 특무대에서 전담) 단행한 4차에 걸친 숙군작업을 통해 약 800명의 현역장병들과 500여명의 군관계 민간인등 약 1,300여명의 공산분자를 검거하여 군법회의에 송치한 실적을 남겼다.
그리고 육군에 침투한 공산분자들의 핵심적인 인물이 뿌리박고 있었던 곳은 사관학교였다. 경비사관학교의 교수부장(조경건 소령)을 비롯하여 구대장, 생도대장 등의 핵심인물이 사관생도들에 대한 개별면담과 접촉을 통해 은밀히 포섭공작을 벌인 끝에 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1, 2, 3기 생도들 중에서 80여명이 공산프락치에 가입을 했고, 그들 가운데 김지회 중위와 홍순석 중위 등 1기 출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사건이 곧 제1차 숙군을 단행케 했던 여수, 순천지구의 폭동사건이었다.
한편 해군의 경우도 해군사관학교에 교수 안항도를 비롯해서 교관 안상문, 김무조 등 남로당계의 지성적인 핵심인물이 침투하여 사관생도들에 대한 포섭공작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들에 의해 포섭을 당했던 생도들은 주로 2기생들이었고, 그 전에 수료했던 1기생과 3기생들 중에는 그런 생도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47년 2월 7일에 입교하여 1948년 If월 IS일에 수료(임관)했던 48명의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 중에서 교수나 교관들에 의해 포섭을 당했던 생도들은 전체인원의 약 절반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들이 검거가 된것은 1949년 5월에 발생했던 제1특무정대의 기함 508호의 월북사건이 있은 후 이른바 '해상인민군'이란 비밀조직체를 조직하고 있던 이항표가 검거됨으로써 그것이 숙군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그 조직체의 다른 핵심멤버들과 함께 일망타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해상인민군'이란 비밀조직체를 조직한 이항표를 검거하게 된 그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비화가 있었다. 즉. 제1특무정대의기함 508호의 납북사건이 발생했을 때 군산경비부에 소속되어 있던 이항표(당시의 계급 중위)는 그가 조직하고 있던 그 '해상인민군'의 조직강령과 조직체의 명단을 가지고 그가 그 조직체의 중앙위원장으로 추대한 당시의 해군본부 행정관 허승룡 중위의 자택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허승룡 중위는 과거 해방병단 교육대의 소대장(제1중대) 근무를 할 때부터 그의 사상을 경계해 왔던 일을 상기하면서 자기를 그 무시무시한 조직체의 중앙위원장으로 추대해 놓은 그 조직체의 강령과 명단을 훝어 보고 가슴이 털컥 내려 않는 충격을 받았으나 한편으론 드디어 이항표를 검거할 기회가 왔구나 싶어 짐짓 태연한 척하여 동조를 하듯 그 강령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 가운데 그 조직체에 대원들들 가입시킬때는 기가입자 5명의 추천을 받아서 가입을 시킨다는 조항과 가입자들로부터 비밀경비를 염출한다는 조항을 그대로 둘 경우 3개월도 못가서 들통이 날것이란 의견을 제시하여 그로 하여금 그 두개의 조항을 삭제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충무로에 있는 어느 여관에서 그런 말을 주고 받은 허승룡 중위는 왕년의 1소대장 이향표 중위와 헤어질 때 의도하는 바가 있어 자신이 그 비밀조직체의 중앙위원장이니 이항표가 가지고 있는 그 조직체의 강령과 명단을 한 부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이항표는 각 경비부를 한 바퀴 둘러보고 군산으로 내려갈 때 주겠다고 하기에 허승룡 중위는 그 문서를 손에 넣지 못한 채 그 다음날 아침 해군본부 정보국장 김청한 중령을 찾아가서 제보를 하게 되었고, 제보를 받은 김청한 국장은 즉시 손원일 총장에게 보고하여 이항표에 대한 감시 명령이 내려졌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수일 후 묵호경비부 작전과장 윤영준 대위를 만나기 위해 묵호로 갔던 이항표는 그가 믿고 있던 왕년의 2소대장 윤영준 대위에게 그가 제시한 그 '해상인민군'의 조직강령과 조직체의 명단을 빼앗기게 됨으로써 그 비밀문서가 해군본부에 제출되어 마침내 일망타진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일거에 검거가 된 그 핵심 좌익분자들이 정확히 몇 명이나 되었는진 잘 알진 못하고 있으나 제일 먼저 검거가 된 이항표는 허승룡씨가 해군사관학교 갑판고등군사반에 입교해 있을 때인 1949년 늦가을 어느 날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해군신병교육대의 사격장이 있는 그 산기슭에서 층살형에 처해졌고, 헌병대의 영창이 협소하여 진해 해군보급창창고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고 있던 나머지 인원 가운데 일부 인원(10여명)은 담요를 찢어서 만든 로프를 이용해서 그 창고의 천정을 뚫고 탈출하여 마산방면으로 도주하다가 마진터널을 차단한 군 추격대에 의해 대부분이 사살되고 체포가 된 일부 인원과 보급창 창고에 수감되어 있던 잔류 수감자들은 군법회의를 거쳐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있다가 6.25동란이 일어나 전원 처형이 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후일 제주경비부사령관과 해군본부헌병감 및 감찰감 등을 역임하고 대령계급으로 예편된 허승룡씨(당년 73세)의 증언에 EK르면 이항표가 진해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이항표와도 잘 알고 허승룡씨와도 잘 아는 차병엽 하사관(당시 진해헌병대근무)이 허승룡씨 앞으로 보내 온 편지를 읽어보니 이항표가 차병엽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허승룡 때문에 당한 것 같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했는데 그러한 일 때문에 허승룡씨는 그가 해사 고등군사반에 입교해 있을 때 처형이 된 이항표의 처형장에 나가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소해정 통천호와 고원호 및 제1특무정대의 기함 508호의 납북사건과 소해정 302호(정장 공정식 대위)의 납북 미수사건 등은 해군전사에 기록이 되어 있으나 이항표에 의해 조직이 되었던 '해상인민군' 사건에 관한 얘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 해군전사나 한국군 전사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수록되지 않고 있다. 육군사에도 여수사건을 계기로 단행한 그 4차에 걸친 그 어마어마한 숙군기록을 수록하지 않고 있는데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남기려면 그러한 사실(史實)을 기록에 남기는 것이 좋을 텐데 어째서 떳떳하게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내가 이 지면을 통해 '해상인민군'사건과 관련된 얘기를 이 정도의 내용으로나마 엮어서 남기게 된 까닭은 역사의 교훈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며, 언젠가 함께 계룡대(鷄龍臺)를 방문하던 날 해군총장을 역임한 나와 친숙한 몇 분의 인사들도 나에게 이런 주문을 한 적이 있었다. 즉 해병대의 역대 사령관들중에는 한 사람도 타계한 분이 없지만 해군총장을 지낸 원로급 인사들은 거의 작고를 하여 회고록을 남길만한 사람이 없으니 만약에 내가 회고록을 집필할 경우에는 해상인민군사건에 관한 얘기도 함께 기록에 남겨 달라는 그러한 주문이었다.
그리고 1949년 전 해방병단교육대의 제1중대장을 역임했던 나에게 있어서는 그 사건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 3명의 소대장 가운데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 있딘 소대장 한 사람은 어마어마한 비밀조직체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해군을 전복하려 했고, 반공정신에 투철했던 고려자위단 단원출신인 나머지 소대장 2명은 그 사건을 척결한 주역으로 등장을 했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새삼해 보게 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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