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2) 結綠秘話
1949년 2월 1일부로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이 된 신현준 중령은 여순사건 때 해군통제부특설기지 참모장으로서 해군에서 편성했던 그 임시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육군에서 전개 중에 있던 최종일의 반란군 소탕작전에 참가했던 분이었고, 또 작전을 마친 후 결과보고서를 작성할 때 그 결론부분에 수륵양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특수임무부대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신현준 사령관이 사령관으로 임명된 직후의 일이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부인(成蕙龍 여사)을 동반해서 나의 관사(동문밖 2호관사)를 찾아와서 너무나 어렵고 중요한 책무를 맡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해병대의 참모장으로서 나와 함께 해병대의 창설에 동참해 주지 않겠냐며 정중하게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귄유를 받게 되었던 나는 황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으나 그러한 청이 선뜻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군에 입대할 당시 육군소위의 임관장을 받았다가 해군에 몸을 담게 되었던 나로서는 지상전투를 하는 전투부대로 간다는 것이 마치 생소한 육군으로서 되돌아 가는듯한 느낌이 든데다가 해병대에 대한 사전지식도 부족했고, 또 해군내의 보잘것 없는 작은 신설부대로 가서 무슨 장래성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로서는 그러한 청을 함부로 거절해 버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준하사관 교육대의 교관근무를 할 때 그 교육대의 교육주임(교육대장)으로 계셨던 분이었고, 또한 그러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그 후 그가 진해 특설기지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취임했을 때는 묵호경비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를 해군본부에 상신하여 특설기지사령부의 교육부장으로 발탁 기용해 주는 등 나를 위해 각별한 은혜를 베풀어 준 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해 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정을 느끼기 마련인데 그 당시의 나에게는 8.15직후 하얼빈에서 동포들의 보호와 호송을 위해 조직했던 고려자위단이라는 것이 인연의 매체가 되어 나를 육군소위로 임관시켜 준 바 있던 육군창군원로 정일권씨나 나를 창군기의 간부요원으로 이끌어 준 손원일 해방병단장 같은 분들 못지 않게 고맙게 여기고 있던 분이 곧 신현준 사령관이었다.
그래서 나는 보다 유능한 사람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나 같이 부족함이 많은 사람에게 그러한 중책을 맡기시려 하느냐면서 당시 해군사관학교의 육전대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인 김동하(金東河)소령과 강태민(姜泰敏) 소령을 천거하듯 거명하면서 나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모면하려 했으나 어떤 이유 때문인진 모르나 그 두 사람에 대한얘기는 일체 입에 담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거명했던 그 김동하 소령과 강태민 소령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신경(新京)군관학교 동기생들이었다.
그런데 신 사령관이 나의 관사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는 그런 식으로나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발뺌할 수 있었으나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유현덕의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를 연상케 하듯 두 번째에 이어 연거푸 세 번째의 방문을 받았을 때는 어쩌면 인정이 지극한 맏형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존경스러운 스승같은 분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그 신 사령관의 어진 덕에 감복을 했던 나머지 덥썩 그의 손을 잡으면서 "사령관님의 뜻을 받들어 저도 해병이 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야 말았고, 또 "기왕에 뜻을 모으게 되었으니 해병대를 천하무적의 강군으로 만들어 보자"는 말도 했다.
한데 그때 신 사령관이 왜 굳이 나 한 사람을 택하려 했는지 그 당시의 나로서는 그 분의 심중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러나 먼 훗날(1981년)에 발간된 해병실록 '德山에서 越南까지'(鄭采浩 著) 상권 33면에 나를 참모장으로 영입할 때 신 사령관이 나를 평한 말을 인용해서 '비록 체구는 왜소한 사람이었지만 담대(膽大)하고 화술과 지략에 능한 비범한 인재'라고 적어 놓은 대목이 있는 것을 보고 우연히 함께 근무했던 그 2개월 간의 준하사관교육대 시절을 통해 과분하게도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게 된 모양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울러 그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신현준 사령관의 이력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해 두고자 한다.
1915년 경북 금릉군 능소면에서 태어났던 신현준 사령관은 소시적에 부모를 따라 건너갔던 만주땅에서 성장하여 신경(新京) 군관학교의 전신인 봉천육군훈련대를 나온 후 만군 소위로 임관, 8.15 직전까지 대위의 계급으로 만군 보병 8사단 6중대장으로 근무를 했고, 현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게 되자 귀국직전까지 북경에서 광복군(光復軍)에 가담하여 광복군의 대대장 근무를 하다가 그 이듬해(1946년) 조국의 창군에 동참하기 위해 귀국했었다.
그리하여 1946년 6월 해안경비대에 입대했던 그는 진해특설기지사령관의 부관, 인천기지 및 부산기지사령관, 특설기지참모장 등의 요직을 거쳐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이 된 분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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