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3) 募兵秘話

머린코341(mc341) 2014. 7. 2. 18:57

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3) 募兵秘話


  내가 해병대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임명된 날짜는 1949년 3월 1일이었다. 그 동안 신현준 사령관은 진해특설기지사령부 내에 마련된 임시집무실에서 전속부관으로 임명된 민용식 소위에게 지시하여 해군본부와 협조해서 부대편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행정적인 업무를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해군본부에서는 신 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부대 창설에 필요한 약 100명의 기간장병들을 확보하기 위해 예하 각 부대에 공문을 시달하여 해병대로 전출할 희망자를 모집하고 있는 중이였고, 역시 신 사령관이 요청한 300명의 신병은 때마침 가입대 중인 약 1,200명의 해군13기 신병들 중에서 희망자를 선발하여 확보할 계획이었다.


  해병대의 초석이 될 제1기 신병들을 확보했던 시기는 그해(1949년) 3월 하순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당일 아침 그 사이에 해병대로 전입했던 안창관(安昌寬), 김낙천(金洛泉) 소위와 강복구(姜福求)중사 등 3명의 선발요원들이 해군신병교육대로 갈 때 나는 이런 당부를 했다. 즉 한 가닥씩 할만한 똘똘하고 주먹이 큰 건장한 녀석들을 뽑아오라고 했다.


  1775년 창설을 보게 되었던 미 합중국 해병대는 창설 당시 주막집 주인 출신인 멀랜 중대장이 이끄는 모병공작대가 각 도시로 북을 치며 돌아다니면서 천하에 악명높은 깡패나 왈가닥 패거리를 설득 포섭하여 그들에게 철저한 정신교육과 강한 훈련을 실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통과 역사에 빛나는 미 합중국 해병대의 주춧돌이 되게 했다지만 그 당시 우리들에게 주어진 여건으로서는 고작 그 정도의 방법밖에 허용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나한테서 그러한 주문을 받은 그 세 사람의 선발요원들도 이심전심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면서 특히 안 소위는 자기처럼 눈에 광채가 나고 똘똘하게 생긴 자를 뽑는데 유념하고 김 소위와 강 중사는 힘께나 쓸만한 키가 건장하고 믿음직스럽거나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주먹이 큼직한 자들을 뽑겠다고들 했다.


  그리하여 가입대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으로 직행했던 그 3명의 모병관들은 그러한 심사기준에 따라 엄선을 한 끝에 해병이 되겠다고 지원한 약 700명의 지원자들 중에서 1차로 330명을 뽑아낸 다음 구술시험을 거쳐 30명을 떨어뜨림으로써 300명을 확보했다.


  그 당시의 해군 신병교육대장은 후일 제7대 해병대사령관이 된 강기천(姜起千) 소령이었으며 강기천 교육대장도 적극 협조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선발과정에서 특히 기합의 대명사로 불리운 일본 해군 출신인 강복구 중사는 "해병대란 일본 해군의 육전대와 같은 군대이며 적전상륙을 감행할 경우 100명중 99명의 희생자가 날 수도 있다"라는 무시무시한 말과 "사나이중의 사나이, 군인 중의 군인들이 모이는 곳에 해병대"라고 역설하여 700여명의 지원자를 쏟아져 나오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준하사관교육대의 교육대장을 역임한 신현준 중령이 사령관으로 취임을 하고 해방병단교육대의 제1중대장과 준하사관교육대의 교관으로 있었던 내가 참모장으로 임명이 되어 부대편성을 서두르게 되자 인맥이라는 것이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건지 그때까지 해방병단과 해안경비대의 간부들로 성장해 있던 하얼빈 출신 장교들 가운데 고려자위단의 단원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인원이 속속 해병대로 전입했다. 윤영준, 김용국, 채택현, 백남포, 김종식, 한예택, 안창관, 정만진, 정봉익, 김한수, 박성철, 정세웅, 김창욱, 임일경, 신영철씨 등이 곧 그들이었고, 그후 계속 해군에 머물러 있었던 하얼빈 출신 장교들은 김정한, 박경철, 박상철, 허승용, 백인기씨 등이었다. 그래서 후일 해병대와 해군에서는 장령(將領)급 장교가 된 하얼빈 출신 장교들의 인맥을 가리켜 '하얼빈그룹'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일본 해군출신자들의 경우는 누가 권유를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해병대로 전입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4월 초로 예정하고 있던 창설식을 거행할 때까지 약 100명의 기간장병을 확보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일로 해서 해군내의 일부 단위부대에서는 적지 않은 부작용이 빚어져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 실제로"야! 너도 넘어가나?"하는 유행어가 전파되고 있던 그 무렵 목포경비부사령부에서는 약 50명의 장교와 하사관 가운데 단 한 명의 병과장교로서 총무작전 경비 등의 주요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김재주(金載珠) 대위가 15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해병대로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여순사건 이후 가뜩이나 적은 인원으로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신경을 쓰고 있던 정긍모 사령관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이놈들 가려면 다 가란 말이야!"하며 노발대발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또한 어떤 단위부대에서는 해병대로 가겠다는 희망자가 계속 늘어나자 지휘관의 명령이라면서 일단 전속발령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놔 주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한동안 해군본부 인사국장실로 가서 발령이 난 사람들의 명단을 일일이 확인한 다음 일단 발령이 난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명령이 취소되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확보한 숫자가 100명의 기간요원(基幹要員)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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