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4) 入隊式과 創設記念式

머린코341(mc341) 2014. 7. 2. 19:00

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4) 入隊式과 創設記念式


  해군신병교육대에서 선발한 300명의 해병대의 제1기 신병들이 해병대의 창설 기지로 제공될 덕산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3월 28일경이었고, 그들의 입대식이 거행된 날은 4월 1일이었다.


  진해 시가지의 동쪽 마을인 덕산동(德山洞)에 위치한 덕산비행장은 일제 때 진해에 주둔한 일본 해군부대에 건설해 놓은 소형비행장이었는데, 8.15해방 후 약 2년간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항공대가 떠나간 뒤로는 계속 빈 공간, 빈 터로 존재해 왔던 탓으로 약 20만평에 달하는 기지내에는 갈대와 잡초가 창량하게 우거져 있었다. 시멘트로 된 활주로 남쪽에는 뼈대가 앙상한 두 개의 격납고가 쓸쓸하게 서 있었고, 그 격납고 근처에는 길이가 약 20미터 가량 되는 일본식 장옥(長屋) 한 채와 미군들이 가설해 놓은 10여 동의 콘세트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들은 상당부분에 절취를 당하거나 파손이 되어 있어 보수를 하지 않고서는 사용을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사령부에서는 1차로 전입발령을 받은 안창관 소위를 비롯한 약30명의 대원을 비행장으로 보내어 강당과 사무실과 내무실로 쓰여질 건물들을 보수하도록 했다.


  그 동안 가입대 중에 있던 해군 13기 신병들과 함께 기거하며 해병대로 전입한 하사관들로부터 약 1주일간 제식교련과 내무생활 지도를 받아왔던 1기 신병들이 도착하자 사령부에서는 300명의 신병들과 그간에 확보해 놓은 100명의 기간장병으로 필요한 참모부서와 2개중대의 소총중대를 편성하여 4월 1일 신병1기생들의 입대식을 거행한 다음 식목일인 4월 5일에는 해병대의 창설기념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국방부의 사정 때문에 4월 15일에 창설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창설기념식이 거행된 그날 덕산비행장 입구 도로변에는 '海兵隊司令部'라고 쓰여 있는 낯선 입간판이 세워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했는데, 그 입간판의 글씨는 당시의 국방장관 이벙석(李範奭) 장군이 휘필한 것이었다.


  만물이 생동하는 양춘가절에 100명의 기간장병과 신병 300명 등 도합 400명의 적은 인원으로 해병대는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창설기념식에는 국방부장관을 대리한 국방부 제2국장 신태영(申泰英) 소장과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진해특설기지사령장관 및 진해읍의 여러 기관장과 유지 등 많은 하객이 참석하여 역사적인 창설기념식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창설기념식에서 초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식사를 통해 '비록400명의 적은 인원으로 창설식을 갖게 되었지만 장차 국방의 최강부대가 되기 위해 전장병이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 훈련에 정진하고 그 어떤 소임이라 할지라도 능히 이를 감당해 냄으로써 영광된 충무공의 후예로서 국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군대가 될 것을 다짐하자'는 요지의 소신을 피력했는데, 신 사령관의 식사를 경청하고 있던 나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옛 속담이 문득 머리속에 떠올라 해병대의 상서로운 미래가 점쳐 보이는 듯한 느낌을 느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해 둘 특별한 얘기가 있다. 그것은 곧 창설당시의 병력이 지금까지의 알고 있던 380명이 아니라 400명이란 사실이다. 이 말은 사령관과 참모장을 포함한 기간장병들의 수가 80명이 아니라100명이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러한 사실을 규명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에 발족을 보게 된 창설동지회(創設同志會)에서 생존해 있는 회원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어 그 당시의 부서별 중대 소대 분대 및 조별로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전체 기간장병들의 수가 80명이 아니라 100명이란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이 자리를 빌어 비로소 그 숫자를 100명으로 바로잡게 되는 셈인데 그 100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간소하게 치러졌던 그 창설기념식이 끝난 후 격납고 속에서는 탄생일을 자축하는 단란한 오락회가 개최되었다. 오락회에서는 진해읍 유지들이 선물로 가지고 온 음식물들을 나눠먹으면서 노래도 부르고 장기자랑도 하고 덩실덩실 춤도 추었다. 그 흥겨운 자리에서 신 사령관은 '금강산일만이천봉'이란 노래를 부르고, 나는 바로 그 무렵에 유행되기 시작했던 '신라의 달밤'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열화 같은 엥콜 요청에 따라 '남쪽나라 십자성'을 불러 요란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노래에 별로 소질이 없던 내가 그처럼 인기를 끌게 되었던 것은 그 며칠전 해군본부로 출장을 갔을 때 충무로에 있는 레코드 가게마다 요란하게 틀어 놓은 음반소리가 '신라의 달밤'이었고, 또 그 음반소리 못지 않게 신나게들 부르고 있는 젊은이들의 노래소리를 귀동낭으로 듣고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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