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1) 海兵隊의 創設背景
묵호기지사령부에서 약 1년간 근무했던 나는 1948년 6월 30일 부로 소령의 계급으로 특설기지사령부의 교육부장으로 전임되었다. 진해에 설치되어 있던 그 특설기지사령부는 군정법령 제80호에 의해 조선해안경비대(해방병단의 후신)가 통위부로 편입된 1946년 가을 해안경비대 총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한 후 해군의 요람인 진해기지를 해군의 주요 항구이며, 해군의 교육기지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그 당시 특설기지교육과의 산하에는 신병교육대를 비롯해서 함정훈련대, 기관고등교육대, 항해학교, 통신학교, 기관학교, 공작학교, 주계(主計)학교, 위생학교 등이 있었고, 특설기지사령관은 김성삼(金省三)대령이었으나 7월 하순경 김성삼 대령이 해안경비대 참모총장으로 전보됨에 따라 해사(海士)대학교(해군사관학교의 전신) 교장 김일병(金一秉) 대령이 특설기지사령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군정이 종식됨에 따라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해군으로 재발족하게 됨으로써 그 위상을 드높히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 2월 초순경 나는, 나를 특설기지사령부의 교육과장으로 천거해 준 특설기지사령부 참모장 신현준 중령이 그해 1949년 2월 1일 부로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부대편성에 착수할 때 신 사령관의 간곡한 권유로 신편될 해병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그때 나의 계급은 중령으로 승진되어 있었다.
1949년 창설된 해병대는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했던 여순사건(麗順事件)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특수부대이다. 여순사건은 그 당시 여수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 내에 침투 조직되어 있는 김지회(金智會) 중위와 홍순석 중위, 지창수 상사 등 남로당 프락치의 간부급 주모자를 비롯한 40여 명의 주동자들이 14연대 내의 1개 대대병력이 제주도의 한라산 공비토벌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는 날을 기해 일으켰던 반란사건이며, 그 당시 순천(順天)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중대로 선임중대장 홍순석 중위의 주동과 호응하에 연쇄적인 폭동을 일으킴으로써 당시의 신문들이 보도했듯이 그 반란군 병사들과 그들에 동조한 불순세력(민간인들)에 의해 학살을 당한 관민의 수가 무려 1,200여명에 달하였고, 또한 그에 앞서 출동부대 장병들을 나팔로 집합시킬때 사살된 장교들의 수가 20여명에 달했다.
한편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육군에서는 당시 광주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포함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한 끝에 사건 발생 4일째가 되던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일단 그 사건의 불씨를 끈 다음 지리산으로 도주한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기 위한 소탕전을 벌였는데, 그때 해군에서는 사건발생 당일 여수항에 정박해 있다가 그러한 사태를 맨 먼저 해군본부에 타전하고 육군의 초기 진압작전을 지원했던 소해정 302호(정장 孔正植 대위)를 비롯해서 충무공호, 305, 506, 515, 304, 505함 등으로 임시함대를 편성하여 그 진압작전을 해상에서 지원할 계획을 세웠으나 임시 항대의 편성지연으로 27일 육군부대가 여수를 탈환할 때 비로소 진압작전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 임시함대도 애당초 사령관으로 발령이 난 이상규 소령이 지휘하지 않고 교체발령이 난 신현준 중령(통제부 참모장)이 지휘 했다.
그런데 27일에 이루어졌던 최종일의 여수시 탈환전에는 부산에서 항만청 LST에 탑승하여 출동한 육군5연대의 1개 대대병력도 참가를 했는데, 임시함대를 편성할 때 해군공창부두에서 적재한 그 37밀리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소해정 302호의 호송하에 여수 앞바다에 당도했던 그 육군부대(부대장, 김종원 중령-일명 백두산호랑이)는 여수항에 상륙을 하려했으나 여수항의 바로 턱 밑에 뻗어 있는 돌산(突山)과 여수 해변에서 저지사격을 가하는 반란군의 치열한 사격 때문에 상륙을 하지 못하고 순천지구로부터 여수를 공격해 온 육군부대가 여수를 탈환할 때까지 작전의 미숙으로 고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신현준 중령이 지휘한 해군의 임시함대는 해상으로 도주하는 소수의 반란군을 분쇄할 수 있었을 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 임시함대를 지휘했던 신현준 중령은 상부에 제출할 결과보고서를 작성할 때, 우리 해군에 수륙양면작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가 있었더라면 해군의 기여도는 훨씬 컸을 것이라는 판단을 근거로 한 특수부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건의문을 첨부하게 되었는데, 결국 해군수뇌부에서는 그 여순사건을 계기로 우리 해군에 육전대나 해전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부대가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가정적인 판단과 삼면환해(三面環海)의 조국 강토를 지켜 나갈 우리 해군의 현실과 미래를 위해 그 특수부대의 필요성이 절감(切感)됨에 따라 마침내 그 특수부대(해병대)의 창설을 서두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국군조직법에는 해병대에 관한 아무런 규정이 없었고 또 정부 수립 후의 그 시대적인 어려움 등으로 인해 해병대라는 신설부대를 창설한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군의 창군원로인 손원일 참모총장을 위시한 해군 수뇌부 참모들의 끈덕진 집념으로 그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여기에서 해양의 선각자로 알려져 있던 손원일 제독과 당시의 내무장관 신성모씨(6.25때 국방장관 역임)에 관한 얘기도 아울러 언급해 두고자 한다.
일제 때 남경(南京) 중앙대학 항해학과를 졸업한 후 구라파지구에서 항해술을 경험하다가 해방이 되자 상해에서 귀국하여 해방병단을 창설하게 되었던 손원일 제독과 상해 오송(吳松)상선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에서 선장생활을 한 이력의 소유자인 신성모(申性摸)씨는 귀국 후 비록 길은 다른 길을 걷고 있었지만 일제 때 해외에서 지내왔던 마음과 같은 꿈, 즉 우리도 언젠가 해방을 맞게 되면 조국의 튼튼한 국방을 위해 특히 태평양전쟁 때 온 세계에 그 용명을 떨친 역사와 전통 오랜 미국 해병대와 같은 특수부대를 갖기를 희망했던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심전심 노력을 했다는 그러한 얘기이다.
애당초 해군본부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안을 구상했었다. 즉 상륙전을 주임무로 하는 전투부대를 만든다는 적극적인 안과 해군기지 경비부대를 발족시키자는 소극적인 안이 곧 그것이었는데 실제로 해군참모총장을 거쳐 삼군참모종장에게 제출된 안은 1개 대대 이상의 병력과 장비로 그 두 가지 임무를 다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은 육군과 같은 성격의 해군 전투부대는 굳이 창설할 필요가 없다고 한 삼군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당시 채병덕 소장은 육군참모총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군본부에서는 해군기지 경비의 명목으로 작성된 해군본부참모부장 김성삼(金省三) 대령의 수정안을 제출하여 채병덕 총장의 결재를 받은 다음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의 재가를 득하게 되었는데 최초의 안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작성된 전문(全文) 6조로 된 그 수정안은 다음과 같이 작성되어 있었다.
제1조 :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제2조 :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육상전투에 임하는 동시에 주둔지역의 경비임무를 수행한다.
제3조 : 해병대에 사령관을 둔다. 사령관은 해군참모총장에 소속하여 소속부대를 지휘 통솔한다.
제4조 : 해병대의 편성 및 배치는 해군참모총장이 정한다.
제5조 : 통제부 경비부 소재지에 있는 해병대는 특별한 규정 지시 또는 명령이 없는 한 당해 사령관 또는 사령관의 지휘 통솔을 받는다.
제6조 : 사령관은 해군참모총장의 인가를 얻어 본령(本令)에 규정한 이외의 사항에 관하여 해병대 규정을 정할 수 있다.
부칙 : 본령은 공포된 날로부터 시행된다.
전문 6조로 된 이 안은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공포되었는데, 그 후 이 해병대령은 6.25동란 중인 1952년 8월 16일 대통령령 제672호에 의거 전문 16조로 개정되었으며, 그 개정된 법령의 제2조에는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며 필요에 따라 일반 지상전투에 종사할 수 있다'는 문맥으로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위주로 하는 부대임을 명문화 해 놓고 있다.
다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그 채병덕 총장의 결재에 얽힌 비화이다. 초대 사령관 신현준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1949년 2월 그러니까 신현준 대령이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된 그해 2월 어느날 정부 당국에서는 각 군의 연대장급 단위부대장 회의를 소집하여 공비토벌 문제를 토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해병대사령관 자격으로 해군장교복 차림으로 그 회의에 참석했던 신 사령관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채병덕 총장은 측근에게 '저 사람이 누구지?'하고 물어본 다음 그가 해병대사령관이라고 말하자 '내가 결재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해병대가 창설될 수 있단 말인가?‘하며 격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채 총장은 해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문제의 그 결재서류를 취급한 장교가 누군지를 물어 보고 즉시 그 서류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참모부장 김성삼 대령이 서류를 가지고 가서 보여 드렸더니 분명히 자신의 싸인이 돼 있는 것을 확인한 채 총장은 문득 뇌를 스치는 느낌이 있었던지 고추 먹은 소리로 ‘이렇게 중요한 안건을 브리핑도 한번 하지 않고 잡동사니 서류 속에 함께 집어넣어 결재를 받다니...'하며 인상을 찌푸렸다고 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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