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1) 고려 자위단

머린코341(mc341) 2014. 3. 18. 18:38

국방의 멍에 - 1. 입대배경

 
(1) 고려 자위단

 
  평생을 군에서 보낸 내가 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하얼빈 농대를 택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주의 광활함에 대한 매력, 그리고 광활한 만주의 농토에서 부를 이루고자 하셨던 조부님의 꿈을 듣고 살아왔던 나로서는 어쩌면 농대 입학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비옥한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타고 많은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이러한 만주에 대한 나의 꿈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에 더해 전 학년 학비 국가 부담, 전원 기숙사 생활, 교복까지 지급되는 여러 혜택, 졸업하면 만주국의 관리로 채용될 수 있다는 매력 등이 하얼빈 농대를 택한 큰 이유였다.

 


  만주 시절 학교에서는 미국과 영국을 배척했던 일제의 정책으로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대신 러시아어를 배웠는데 이는 일본이 장차 소련 진출을 대비한 인재 양성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학교에는 등하교 시 학생들이 반드시 고개 숙여 참배해야 하는 일본인 의사(義士)의 사당이 있었다. 그는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하얼빈을 지나 심양에 도착하는 러시아 군수열차를 폭파하려다 전사했는데, 일본인들은 그를 순국 정신의 사표(師表)로 높이 추앙하고 있었다. 비록 일제하의 교육이었지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후손들에게 추앙받는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러나 점차 치열해지는 전쟁과 패망을 앞둔 일제의 단말마적 횡포는 하얼빈 농대 시절의 우리 한국 학생에게 항상 큰 부담이었다. 학창시절의 꿈과 낭만도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일제의 무서운 발톱을 어떻게 피해 가느냐가 더 큰 문제였다.

 


  그 우려가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1945년 8월 3학년 때, 결국 학교는 문을 닫았다. 학생들에게는 소련군의 만주 진입에 대비하여 비상동원령이 내려져 소집 시 하얼빈의 일본군 13사단으로 입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8월 5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이어서 소만국경의 극동 소련군이 만주의 일제 관동군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당시 일제 관동군은 100만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부대였다. 노도와 같이 밀려 든 소련군에 관동군들은 총 한번 제대로 쏘아 보지 못하고 항복했고, 소련군들은 만주에 무혈 입성하였다. 미국의 일본 원폭투하 이후 소련군은 즉각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소만국경을 넘어 하얼빈을 점령하였는데, 이 모든 게 일 주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소련군의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는데, 하얼빈으로 진군해 들어오는 소련군의 위용은 정말로 대단했다. 커다란 대포와 탱크 등 엄청난 무기를 앞세우고 하얼빈 시내로 진군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일본군들이 과연 저들과 어떻게 싸우려고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어 하얼빈에는 큰 혼란이 찾아왔다. 왜냐하면 하얼빈이 북만주 일대의 일본인, 한인들이 귀국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하얼빈에 소련군이 아직 진주하지 않았을 때는 그런 대로 평온을 유지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그들의 노골적인 야만성 때문에 한인, 일본인들의 피해는 엄청나게 늘어갔다.

 


  이때 나는 고려 자위단을 조직했다. 이것이 내가 군인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20일, 만주의 대도관 중학 출신을 중심으로 만주 여러 학교 출신 한인 청년들에 의해 고려 자위단이 조직되었다. 무법천지 하의 하얼빈에서 갈수록 심해지는 소련군의 만행으로부터 동포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돕고, 중국 폭도들로부터 동포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우리 청년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자력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고려 자위단을 발족시키며 먼 만주 땅에서 가졌던 흥분과 감격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우리는 태극기를 꺼내 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고, 대한민국 만세를 수도 없이 외쳤다. 또한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고, 그 감격에 서로 부등겨 안고 거리 행진을 하기도 했다.

 


  고려 자위단의 주요 인사들은 하얼빈 농대 동창과 후배들 약 50~6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억나는 주요 인사인 김동석(金東石)은 내가 숙부님과 함께 먼저 귀국하면서 고려 자위단의 일을 맡았는데 그는 나중에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하얼빈에서 약 3년간 투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육이오 전쟁 직전에 귀국하여 육군에 입대했는데, 육이오 전쟁 때에는 원산에서 북괴군 부사단장을 체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해 함북 지사, 속초 시장, 목포 시장 등을 지냈다.

 


  먼저 귀국한 나와 고려 자위단의 친구와 후배들이 모두 해군을 거쳐 해병대를 창설하게 되었는데 김동석은 늦게 귀국하는 통에 육군에 입대하였던 것이다. 유도로 단련된 다부진 체구를 가진 그는 대북 정보공작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 미 8군에서도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밖에 한예택, 정봉익, 정만진, 김종록, 박철, 박경철, 박성철(작고, 평민당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 경호실장,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 박상철, 백운기, 허승룡, 김중식, 백남표 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가족들도 버리고 남하하여 나와 모든 것을 함께하며 해군으로 갔거나 해병대 창설의 주역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자위단 활동은 모든 것이 자발적이었다. 후견인이나 후원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숙식조차 자신들이 직접 해결해야 했지만 젊은 우리는‘이런 일은 우리밖에 할 수 없다.’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임했다.

 


  하얼빈에서의 하루 하루는 긴장의 연속이었고, 고려 자위단은 하루 빨리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많은 동포들의 운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필요한 열차를 확보하고, 귀환동포들이 우리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고려 자위단이 해야 할 일이었다. 피난민들로부터 돈을 걷어 소련군으로부터 열차를 배정받았는데 그때 고려민단장 한광숙(러시아명 : 한 빠샤)이라는 분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분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찍부터 소련에서 살았기 때문에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재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다. 고려민단 사무총장 오기섭 씨 역시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한 분이었다.

 


  귀국동포들은 확보된 열차로 압록강변 안동(단둥)까지 가서 강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갔다. 나는 12월 귀국할 때까지 두 번의 왕복 호위를 했지만 무사하게 호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후 치안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무법천지 만주에서 열차 수송은 항상 위험이 수반되었다. 그 때문에 자위단장이었던 나는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한광숙 씨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기를 구해 주십시오.”

 


  며칠 후 한광숙 씨가 불러 가 보니 탁자 위에는 일본군 구식 소총 30여 자루가 있었다. 무기를 보자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우리를 보며 한광숙 씨가 말했다.

 


  “이것은 소련군 사령부로부터 발급된 무기 휴대허가증이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꼭 필요해. 소련군이 보증하는 증표니까 잘 관리해.”

  한광숙 씨가 어떻게 무기허가증까지 받아 낼 수 있었는지 우리는 한광숙 씨의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받은 무기허가증은 나중에 중공 팔로군과의 대치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10월쯤부터 봉천에 나타나기 시작한 팔로군들이었다. 이들은 기차를 정지시키고 조사하는 등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었지만 항상 긴장한 가운데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감격에 차 피난민들과 함께 기차 지붕 위에서 애국가를 목 터지게 부르기도 했다.

 


  그 중 ‘가을 하늘 공활한데’라는 가사에 이르러 만주의 맑은 가을 하늘을 보면 정말 가사같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란데 그 하늘마저 감격스러웠다. 또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라는 가사에 이르러서는 교교한 달빛 속에 잠들어 있는 만주 벌판을 보면서 해방 조국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렇듯 귀국동포 호송을 위해 오가던 위험한 길도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귀국동포들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실체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군 병사들의 만행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죄수부대로 알려져 있던 그들의 소행은 짐승들 이상의 것이었다. 양쪽 팔에 약탈한 시계를 10여개씩이나 차고 있던 소련군 병사들은 길을 휩쓸고 다니다가 여자들만 눈에 뜨이기만 하면 갑자기 짐승으로 돌변하여 총뿌리를 들이대고 대낮이든 대로변이든 닥치는대로 강간을 했고, 심지어는 일본인 학교나 일본인의 극장 또는 백화점 등에 설치되어 있던 일본인들의 피난민 수용소나 금강 국민학교의 조선인 난민수용소를 찾아와서까지 그런 만행을 자행했는데, 그들의 눈엔 동양인 노파들의 흰 머리가 서양인 여자들의 은발로 비쳐져 호호백발의 노파들까지 수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소만국경과 북만주 일대에서 일본 관동군의 무장해제를 집행했던 소련군은 그 일본군 포로들을 열차편으로 소련본토로 수송하는 한편 심양과 대련 등 남만주 지역과 평양, 사리원, 그리고 신의주등 평안도 지역과 흥남, 청진, 나진 등 함경도 지역에 있는 일본군의 군수공장 시설물을 마구 뜯어가지고 그 군수공장에서 약탈한 대량의 군수물자도 함께 매일 같이 소련 본토로 수송했다. 이 과정에서 남만주와 평안도 지역의 것은 남만주 철도를 이용해서 하얼빈역을 거쳐 운송을 했고, 함경도 지역의 것은 동만주 철도를 이용해서 우라지보스톡과 시베리아 지역으로 운송해 가고 있었다. 한편 수용소가 설치된 금강 국민학교에 남부여대한 조선인 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자위단 단원들은 팔뚝에는 한자(촐)로 '고려자위단'이라고 쓴 완장을 착용하고 손에는 일본 관동군의 창고나 특무대의 지하창고를 털어서 확보한 99식 소총 등을 휴대하고 수용소를 경비했다.

 


  45년 8월 하순경 금강 국민학교에 수용소가 설치된 후 그해 12월 중순경까지 그 수용소에 수용이 된 조선인 피난민들의 수는 수만 명에 달했고, 그 당시 하얼빈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들의 수도 수천 명에 달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약 90%는 안동으로 가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입국하고 나머지 약 10% 정도는 자므즈(佳木斯)와 간도지방을 거쳐 도문에서 선봉, 나진, 청진 쪽으로 입국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10월 하순경 하얼빈역의 소련군 철도 사령부로부터 1차로 10여량의 객차를 배차 받게 되자 자위단에서는 1,500명 정도의 귀국 교포들을 태운 그 열차에 먼저 귀국하는 일부 단원들 외에 소총으로 무장한 2O~3O명의 호송단원을 별도로 승차시켜 안동역까치 다녀오게 하고 일부 단원들로 수용소를 경비했다. 첫번째 호송열차가 안동으로 떠날 때 나 자신이 직접 동행을 해 본 결과 그 열차가 안동까지 가는 동안 석탄과 급수를 공급받기 위해 정차해야만 했는데, 아홉차례나 기관차가 행방불명이 되는 바람에 함흥차사격이 된 그 기관차를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내기 위해 열차에 타고 있던 호송단원들은 그 때마다 호송난민들로부터 일정한 액수의 돈을 거두어 뇌물로 바치느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더욱더 어려운 상황은 장시간 정차해 있는 동안 곤봉이나 농기구 등을 휴대하여 열차를 습격해 오는 비적떼 같은 중국인 폭도들과 여자들을 겁탈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열차에 올라오는 술에 취한 소련군 병사들을 쫓아내느라 자위단원들은 허공에 실탄을 발사하며 대항하는 등 큰 곤욕을 치루었다.

 


  따라서 그런 일 때문에 하얼빈역에서 장춘(신경), 심양(봉천), 동계관산(東鷄冠山)역 등을 거쳐 압록강변의 안동(단동)역까지 가는 데 불과 ○시간 정도이면 갈수 있는 것을 무려 약 3일 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12월 중순경에 이루어졌던 그 해의 마지막 피난민 열차 호송때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즉 이른 아침 열차가 동계관산역에 도착할 즈음 피난민들을 습격하기 위해 몰려 온 수백 명의 중국인 폭도들을 실탄을 발사하여 격퇴시키기는 했으나 그 총소리에 놀랐던지 그 역사에 배치되어 있던 자칭 빨로(팔로군)라고 칭하는 100여 명의 군인들이 역 구내에 진입한 열차를 에워싸고 당장에라도 요절을 낼 듯이 총뿌리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곧이어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거치른 말투로 "누가 총을 쐈어!" "책임자 이리 나와"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나는 지난 10월 첫 호송임무를 수행할 땐 분명히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또 동계관산 이전의 역들에는 아직까지 그대로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어째서 이 동계관산역에는 저런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얼빈 주둔 소련군사령부로부터 발급받은 무기소지허가증을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 들고 그 자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아가 그 문서를 내밀고 처분을 기다렸다. 그 자는 잠시 문서를 훌어보더니만 나의 신분과 실탄을 발사한 사유 등을 꼬치꼬치 물어본 다음 다소 부드러운 말투로 "총기는 압수하겠으니 그렇게 아시오!" 하고서는 나를 연행하여 역구내에 있는 그들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내가 연행되어 간 그 사무실에는 책임자로 보이는 다소 몸집이 큰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다. 나를 연행해 간 자로부터 총기소지허가증을 건네 받으면서 간략한 보고를 받은 그는 그 문서를 눈여겨 보더니만 점잖은 말투로 고려자위단의 결성목적과 그간의 활동실적 등에 관해 차근차근 물어 본 다음 그 사이에 사무실 한 구석에 갖다 놓은 총기를 거들떠보며 "압수된 총기는 이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돌아갈 때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전에 출현했던 그 폭도들 얘기를 재차 꺼내며 총기가 없이는 안전을 도모할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는 안동역까지 가는 데는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을 해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인 폭도를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던 나로서는 총기가 없이는 무사히 임무를 수행할 것 같지가 않아 처지가 난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때 불쑥 그 자리에 나타나 큰 힘이 되어 준 (비록 총기는 되찾지 못했지만) 까만 중국인 옷을 입은 약 3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청년 한 사람이있었다.

 


  그는 유창한 중국말로 나를 심문하고 있는 책임자에게 다가와 단원들의 입장을 두둔하며 압수한 총기를 되돌려 달라는 요청을 한 다음 나에게로 "고생이 많소"하고 위로의 말을 했다. 그리고 "총기를 되돌려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니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출발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청년의 말을 듣고 있던 책임자는 이해가 가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여전히 "총기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돌아갈 때 찾아가시오"하곤 보관증 한 장을 써 주기에 나는 그 보관증을 챙겨 넣곤 그 사무실을 나왔다.

 


  내가 서울에 도착한 후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 때 협객(俠客)처럼 불쑥 나타나 힘이 되어 준 청년은 그러한 기연으로 훗날 나와 깊은 인간관계를 맺게 된 만군 대위 출신의 정일권(丁一權)씨였다. 그 후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일본이 패망한 직후 만군장교라는 신분이 탄로나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수감이 된 정일권씨는 소련군이 포로들을 소련본토로 이송할 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열차가 하얼빈 근처의 고향톤 역에 정차해 있는 동안 역 근처에 있는 황량한 옥수수 밭으로 필사적인 탈주를결행, 그를 사살하려는 소련군 기관총의 빗발치는 탄우속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부지하여 하얼빈으로 잠입해 있다가 그날 그 마지막 교포수송열차에 몰래 숨어들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한편 그러한 일을 겪으며 다행히도 안동역까지 무사히 교포들을 호송했던 단원들과 나는 하차한 교포들과 함께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다. 그 뒤는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대부분의 교포들은 평양을 거쳐 개성에 이르기까지는 열차나 도보에 의존했고, 개성에서 38선을 넘어 올 때는 돈을 받고 산길을 안내해 주는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아 별다른 사고없이 38선을 넘어 올 수가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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