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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머린코341(mc341) 2014. 3. 19. 08:57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중앙일보, 2014.03.18)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기자는 존 미어샤이머(66) 시카고대 교수를 두 번 인터뷰했다. 한스 모겐소의 뒤를 잇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대가로 통하는 인물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현실 직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국제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데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개입돼선 안 된다는 충고다. 둘째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 바꿔 생각하기다. 그래서일까. 그의 답변은 통념을 깨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며칠 전 글에서도 비슷한 걸 느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관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미어샤이머는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면대응은 ‘큰 실수(big mistake)’라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지정학적 문제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국제법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외면한 잘못된 정책이란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입장에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강공(强攻)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푸틴의 강수(强手)에 맞대응하기보다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전략적 이익을 인정해주고, 우크라이나를 동·서 진영의 중립적 완충지대로 유지하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란 충고다. 위기 상황에서 득세하기 마련인 명분론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우크라이나의 핵 문제를 언급한 부분이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물려받은 핵무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재래식 무기의 우위를 앞세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침공이나 크림반도 합병에 대처할 수단이 없다”고 지적했다.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푸틴의 무력 개입에 우크라이나가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대륙간탄도탄(ICBM)급 전략핵미사일 176기를 포함해 약 1000개의 핵탄두가 배치돼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폐쇄된 4기의 원자로를 제외하고도 12기의 원자로를 가동하는 핵 강국이었다. 미증유의 핵 재앙으로 인한 엄청난 희생과 방대한 핵 시설과 인력을 고려하면 우크라이나는 핵무기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핵 보유에 부담을 느낀 우크라이나는 미국·러시아·영국 등 5대 핵보유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 핵무기를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5대 핵보유국들은 94년 ‘안전보장에 관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존을 존중하고, 무력 위협과 핵무기 사용, 경제적 압박을 통한 정치 개입을 금지하기로 약속했다. 각서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모든 핵탄두와 운반수단을 열차에 실어 러시아로 보내 해체하는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법적 구속력을 지닌 조약문이 아니라 정치적 약속을 담은 빈 종잇조각에 불과함이 이번 사태로 드러났다.

 

 미어샤이머는 2011년 인터뷰에서 “내가 김정일의 안보보좌관이라도 핵은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주의 이론에 비추어 북한의 핵 보유는 자명한 선택이란 것이다. 남북한을 30여 차례나 왕래한 글린 포드 전 유럽의회 의원도 지난주 인터뷰에서 “평양의 입장에서 핵 무장과 경제발전의 병진노선은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북한은 핵의 진가를 새삼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북핵 문제의 해결책이 안 보이면서 급변사태나 통일이 유일한 해법이란 시각이 서울과 워싱턴에 확산되는 분위기다. 느닷없는 ‘통일 대박론’은 북한 핵에 대한 좌절감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미어샤이머는 체제 전복이나 흡수통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절대 중국이 원할 리 없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도 북한의 핵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북한 국방위원회는 14일 성명을 통해 핵 억제력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가 있을 수 있다고 위협했다. 4차 핵실험이나 장거리 로켓 발사를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지금은 북한이 가진 핵탄두 수가 한 자리에 머물고 있지만 그게 두 자리가 된다면 북한 핵의 방정식은 완전히 차원이 달라진다. 어느 날 북한이 50~6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날이 온다면? 악몽을 피하려면 북한의 핵 활동을 현 수준에서라도 동결할 수 있도록 딜을 해야 한다. ‘전략적 인내’는 해법이 아님이 드러났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북한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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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중앙일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bmbm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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