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6·25사변

귀신을 잡았던 용사들의 전설 [ 6 ] 서해의 요충지를 점령하라

머린코341(mc341) 2014. 3. 20. 11:47

 

귀신을 잡았던 용사들의 전설 [ 6 ]

서해의 요충지를 점령하라

동해안에서 제42중대의 활약이 성공적임이 입증되자 서해안 도서 확보를 위한 작전도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제42중대와 함께 창설 된 독립 제41중대가 이동호(李東湖) 중위의 지휘로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동해안 도서 작전은 전략적으로 소련과 북한과의 연결을 단속하려는 의미가 내포되었던 반면, 서해안 도서 작전은 바다를 이용한 중국과 북한의 접촉을 거부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 이동호 제41중대장은 이후 파월 제3대 청룡부대장(右)이 됩니다 ]

제41중대는 1951년 4월 2일 한강 하구의 교동도(喬桐島) 점령을 시작으로 4월 23일 백령도(白翎島)를 점령하였고 5월 7일에는 진남포를 감제할 수 있는 석도(席島)에 상륙하여 서해 해안을 완전히 봉쇄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의 전략도서 확보작전을 굳이 경중을 따져가면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중공군 때문에 서해안의 중요성이 동해안 보다 컸던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 제41중대는 서행안을 따라 북상하며 주요 도서를 점령하였습니다 ]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개입은 전쟁이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중대 사건이었습니다.  어느덧 전쟁에서 가장 큰 힘을 행사하는 주체가 미군과 중공군이 되면서 성격이 국제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이었지만 이미 여러 나라의 군대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 참전하면서 여차하면 전쟁은 한반도 밖으로 확대될 수 있는 개연성도 충분하였습니다.

 


[ 소련은 은밀히 조종사들을 파견하였지만 공식 참전은 하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당시 소련의 태도는 상당히 소극적이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전쟁 내내 의구심을 가지고 우려하였지만 휴전까지 소련군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은 없었습니다.  물론 일부 전투기조종사 등의 참전이 있었지만 공식적인 소련군 참전은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점은 미군에 의해 소해부대를 출동시켰던 일본의 사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느덧 전쟁은 숨어서 싸우는 이들이 있을 만큼 커졌습니다.

 


[ 기뢰 제거를 위해 파견된 일본 소해정 ]

따라서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서해안의 육로와 서해바다는 전략적으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병력과 물자는 넓은 한만국경을 통해 중국에서 북한으로 공급되고 있었지만 정작 이용할 수 있는 통로는 극히 제한되었습니다.  얼음이 풀리는 봄 이후에는 강을 건너는 자체도 버거웠을 정도였고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지형은 매우 험준하여 설령 도강하여도 육로 교통이 나빠 전선까지 물자 추진이 어려웠습니다.

 


[ 압록강 철교 공습 장면 ]

이처럼 한정된 연결망 중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가장 큰 통로는 서울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경의가도였습니다.  경의가도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침략군이 전통적으로 이용하던 제1침공로이기도 하였을 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진 자연적인 도로였고 당연히 가장 짧게 중국과 최전선을 연결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습에 의해 제일 먼저 차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제한 된 경의가도는 아군의 사정권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

육로가 차단되었다면 해안선을 따라 중공군의 지원이 충분히 가능하여 중국의 주요 지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서해 해안은 그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배는 아무리 작아도 육상의 교통수단보다 많은 량의 보급품을 한 번에 수송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 지역의 육상 운송망이 상당부분 파괴되었고 그것도 유엔군의 공습으로 야간에만 이용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느린 속도는 단점이 되지도 못하였습니다.

 


[ 서해바다와 해안선을 따라 은밀히 운송이 이루어졌습니다 ]

이처럼 서해안의 중요성을 공산군 측도 당연히 잘 알고 있어서 별도의 경계부대를 운용하면서 그들의 생명선을 엄중히 초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아군 입장에서 이러한 주요 통로를 위협하기 위한 목적의 서해안 전략도서 확보 작전은 상당히 중요하였습니다.  때문에 서해안은 북한 입장에서 동해안보다 더욱 중요한 급소였고 이곳에서 활약한 제41중대의 역할은 그만큼 컸습니다. ( 계속 )

 

 

출처 ; [ august 의 軍史世界 ]
        
http://blog.chosun.com/xqon/7315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