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6·25사변

호국보훈의 달 기획 6ㆍ25전쟁 11대 전투 <7> 9·28 서울수복

머린코341(mc341) 2014. 6. 20. 06:03

파죽지세 진격… 90일 만에 중앙청 태극기 게양 (국방일보, 2014.06.19)

 

호국보훈의 달 기획 6ㆍ25전쟁 11대 전투 <7> 9·28 서울수복

한국 해병대 제1대대 연희동→북아현동제2대대는 청파동→남대문 거쳐 진격

 

 
1950년 9월 26일 제6중대 시청 점령 당시 美 대통령 ‘숨은 공훈’ 해병대에 표창

 

중앙청으로 진입하는 한국 해병대원들. 해병대 제공
 

 

# 한미 해병대 한강 넘어 서울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한미 해병대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는 등 파죽지세를 이어 갔다. 그리고 21일 한강 도하에 성공했다. 이날 오전 8시께 행주로 도하한 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연합해 최전선을 담당했다. 적은 끝까지 서울을 고수하기 위해 약 2개 연대 병력을 수색~서울 간 도로 일대에 집결,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작전에 임했다.

 

그중에서도 수도 서울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104고지는 작전상 요지였기에 적의 저항이 완강했다. 이처럼 중요한 작전을 한국 해병대가 담당한 이유는 그간의 공적과 전투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21일 새벽 0시 30분쯤 공격에 돌입했으며 적 1개 대대를 물리치고 수색을 점령, 104고지를 향한 공격을 개시했다. 북가좌리로부터 진격한 제1대대는 적의 결사적인 저항을 분쇄하고 21일 오후 6시 30분쯤 고지를 정복했다.

 

22일 새벽 4시께 104고지에서 도주한 적 패잔병 600여 명이 역습을 감행했지만 제1대대는 3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이를 격퇴했다. 제1대대는 이후 104고지를 방어하며 차후 작전인 연희동 고지 공격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연희동 고지는 적이 서울을 방어하는 최종 외곽선이었다. 적은 원래 104고지를 최후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한국 해병대의 빠른 진출로 104고지를 빼앗기자 황급히 병력을 끌어 모아 연희동 고지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형성했다.

 

22일 오전 7시 20분 제1대대는 연희동 고지 점령을 위해 공격에 나섰지만 적의 맹렬한 반격에 고전했다. 제1대대는 결국 큰 피해를 입고 104고지로 철수, 미 해병대 제5연대에 임무를 인계했다. 미 해병대 제5연대는 한국 해병대와의 치열한 교전으로 전투력이 약화된 적을 격파하고 24일 연희동 고지를 점령했다.

 

이때 연희동 고지에 오른 미 해병대는 연락단절로 행방이 묘연했던 한국 해병대 제1대대 제3중대 이봉출 대위와 부하들이 연희동 고지 일부를 점령했음을 발견했다. 미 해병대는 한국 해병대를 자신들과 생사를 같이하며 연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부대라고 격찬했다.

 

2012년 9월 28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서울수복 62주년 행사에서 해병대원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이헌구 기자
 

# 시가지전 승리…29일 감격의 환도식

 

22일 서울을 동남방에서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적의 외곽 방어선을 돌파한 유엔군과 한국 해병대는 25일부터 본격적인 시가지 전투에 돌입했다.

 

연희동 고지를 확보한 미 해병대 제5연대 2대대는 수색지구에 남아 있는 잔적을 소탕하고 한국 해병대 제1대대와 연합해 북아현동 일대로 돌입할 태세를 갖췄다. 또 미 해병대 제1연대는 마포 방면에서 한강을 도하해 아현동으로 진격했으며,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미 해병대 제1연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했다.

 

25일 지상·공중 포격으로 여건을 조성한 연합군과 한국 해병대는 야간을 기해 시가지 전투를 개시했다. 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북아현동을 장악하고 전진하던 중 서대문 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고전을 거듭하던 제1대대는 26일 오후 3시께 저항선을 뚫고 한성중학교로 돌진했고, 제5대대도 뒤를 따랐다.

 

한편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마포국민학교에 본부를 두고 부근 일대를 수색하며 청파동으로 향했다. 청파동 일대에서 적 패잔병 소탕작전을 벌인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서울역과 남대문을 지나 교전에 교전을 거듭한 끝에 격파하고 시청 앞에서 적과 대치했다.

 

당시 심포학 중위가 지휘하는 제6중대 박정모 소대장은 서울이 함락된 날로부터 90일 만인 9월 26일 오후 3시 30분쯤 시청에 내걸린 적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다음날인 27일에는 대대장의 허락을 받은 후 일조 염병부, 견수 최국방 등과 함께 중앙청으로 전진해 오전 6시 10분 인공기를 끌어내리고 태극기를 하늘 높이 게양했다.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동국대학교와 미아리를 잇는 선까지 진출했으며, 제1대대는 북아현동~서대문~종로 이북을 담당했다. 제5대대는 서울시 북쪽 교외 북악산 일대를 담당, 27일까지 시내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마침내 28일 오후 3시 8분쯤 한국 해병대 제1대대와 미 해병대 제5연대는 서울의 최종 목표였던 중앙청 구내 진입에 성공했다. 이로써 이날 저녁을 기해 서울시는 아군이 완전히 탈환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 등은 29일 오전 전 국민이 갈망하던 환도식을 거행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 인계를 선언했으며, 이 대통령은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세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라는 요지의 표창장을 한국 해병대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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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일보, 윤병노 기자 trylover@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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