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6·25사변

귀신을 잡았던 용사들의 전설 [ 8 ] 적의 심장에 칼을 겨누다

머린코341(mc341) 2014. 7. 27. 12:51

귀신을 잡았던 용사들의 전설 [ 8 ]


적의 심장에 칼을 겨누다


백령도는 1945년 38도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었을 당시부터 대한민국 관할이었습니다.  따라서 원래 살던 주민들은 물론 1.4후퇴 당시에 배를 타고 황해도에서 넘어 온 수많은 피난민들은 북한 정권에 대해 반감이 심하여 해병대가 이곳을 점령하자마자 쉽게 민심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8천여 주민 중 자원한 300여 명을 선발하여 방어에 투입하였을 정도였습니다.

 

[ 해병대는 백령도를 확실하게 확보하였습니다 ]

이처럼 멀리 떨어졌음에도 백령도는 민사작전 없이도 안전하게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백령도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황해도 끝 돌출부에 있는 섬으로 옹진반도 일대를 관측하는 지점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더불어 현재의 DMZ 일대에서 대치 중인 전선과 너무 멀어 백령도에 주둔한 소수의 아군이 군사적으로 커다란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 당시 북한은 서해 5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

사실 서쪽으로 툭 튀어나온 황해도 돌출부에 전선을 구축하기에는 상당히 제한이 많습니다.  만일 이곳 일대를 점령하면 전선 배후의 북괴군을 위협할 수 있지만 그 만큼 후속 보급이 어려웠고 전선도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구월산 유격대 같은 소규모 유격전을 제외하고 아군도 굳이 이곳을 점령할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북한도 아군이 백령도를 발판으로 내륙으로 진공할 것이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 황해도 돌출부는 피아 모두 전략적으로 전선을 구축하기 어려운 위치입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섬에 집념을 보였고 그렇게 확보한 백령도는 현재 북한을 옥죄는 최고의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북한은 우리가 NLL선포 시 방어 상의 이유로 이곳을 포기할 것으로 예상하였는지 모르지만 당시 제41중대가 후방작전의 일환으로 확보한 백령도는 대한민국을 가장 서쪽에서 방위하는 든든한 전략거점이 되었고 지금도 그 역할이 막중합니다.

 

[ 현재 백령도는 서해 최북단의 전략거점입니다 ]

그런데 제41중대의 작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서해안 전략도서 확보 작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5월 7일 상륙하여 점령한 석도였습니다.  바로 아래에 있어 함께 점령한 초도(椒島)에 비해 작은 섬이었지만 석도는 대동강 하구인 광량만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습니다.  이곳에서 평양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70여 킬로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북한의 심장을 향해 겨누어진 비수와 같았습니다.

 

[ 대동강 하구의 석도 점령은 북한의 심장부를 향한 비수였는데

이곳은 지금도 인근 비파곶에 잠수함 기지가 있을 정도의 요지입니다 ]


제41중대는 석도의 이러한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통상적인 감시 및 정보 수집 활동은 물론 수시로 적진에 상륙하여 직접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교란하는 작전을 펼치고자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적진 한가운데 구축한 천혜의 요새로 석도가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석도를 점령한 제41중대는 그해 6월 평안남도 안주, 정주 및 인근 도서지역에 기습상륙작전을 펼쳐 탄약고를 파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 석도에 상륙 중인 해병 제41중대는 교체 병력 ]

백령도에서와 달리 해병대의 석도 점령은 평양의 초입인 진남포를 막아버린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반응은 상당히 격렬했습니다.  북괴군은 제6군단 소속 2개 사단을 동원하여 제41중대를 비롯한 아군이 선점하고 있는 서해안 주요 도서를 장악하려는 기도를 보였습니다.  이 시기는 중공군의 마지막 전략적 공세로 평가받는 제6차 공세를 정점으로 하여 전선이 점차 고착화되어 가던 시점이었습니다.

 

[ 전선은 점차 고착화되어 갔습니다 ]

이제 중공군도 1951년 초여름을 끝으로 더 이상 힘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이길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서서히 휴전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의 양상은 상대를 돌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종결 짖겠다는 생각을 접고 휴전 시에 상대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으로 서서히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서해안의 주요 도서들에 대해 공산군의 신경이 예민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계속 )

 


출처 : august 의 軍史世界
         http://blog.chosun.com/xqon/7323706